적어도 하나의 목적은 달성했다.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브랜드와 ‘서울’이라는 도시 브랜드를 향상시키려던 정부의 목적은 예술·디자인 분야에서만큼은 합격점을 받기에 충분했다.
G20이 열리기 전부터 G20이 끝날 때까지 서울은 커다란 공공미술의 장이었다.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 빌딩, 거리 등지는 온통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합니다’ ‘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과 함께, 세계의 미래가 열립니다’ 등의 문구가 쓰인 포스터와 현수막으로 도배됐다. TV를 틀거나 신문을 들추면 어김없이 한 귀퉁이에 청사초롱이 매달려 있었다. 각국 정상들이 이용한 코엑스 3층 입구에는 칼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도록 철끈으로 감을 매달아놓은 감나무가 등장했고, 행사장인 코엑스 주변 도로에는 전통 문양을 그려넣은 방호벽을 설치했다. 남산에서 코엑스로 이동하는 길에 위치한 한 파출소는 보기 좋은 외벽을 만들어 낡은 건물을 가렸고, 코엑스 주변의 음식점은 튀어나온 간판을 철거해야 했다. 악취를 줄인다는 이유로 인천공항 연결도로와 가까운 곳의 분뇨 및 정화조 처리시설 가동을 중단했고, 서대문구는 행사 기간 중 음식쓰레기를 내놓지 말라고 당부했다가 비아냥이 일자 서둘러 취소했다. ‘외국인에게 먼저 인사하기’ ‘음주문화 개선’ 등의 행동강령은 ‘G20 에티켓’이라는 이름으로 뿌려졌다.
세종대왕의 말풍선, ‘녹(슨)색성장’
G20이라는 행사 하나에 대한 메시지를 포스터나 현수막, 영상 등의 시각예술뿐 아니라 실제 서울 곳곳에 세워놓은 설치미술, 행동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까지 다채롭게 보여준 것만으로 대한민국과 서울은 ‘아시아 문화예술의 허브’이며 ‘디자인 도시’임을 입증했다. 흠이라면 이 거대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 G20 포스터 속 청사초롱 옆에 쥐 한 마리를 그려넣은 남자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 그래서 사람들을 웃게 한 것뿐이다.
웃음은 가장 건강한 저항이다. 제아무리 견고하고 단단한 벽이라 해도 ‘피식’하는 웃음의 빈틈이 생기면 쉽게 허물어진다. 1960~80년대 군사독재 정권은 쉬지 않고 표어를 뽑아냈다. 표어에는 코미디로 맞섰다. 코미디언은 권력자의 성대모사를 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 정부는 포스터 및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거기에는 컴퓨터 등을 이용한 패러디 이미지로 대응했다. 지금 정부는 영상·이미지·설치물 등 가능한 시각예술을 모두 동원한다. 4대강 사업과 미디어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세종시 수정안, G20까지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과 행사를 다양한 채널로 홍보한다. 이런 물량 공세에 맞서 웃음을 이끌어낼 때 가장 필요한 건 아이디어다.
지난 10월24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서울시의 공식 캐릭터인 ‘해치’ 가면을 쓴 ‘해치맨’이 알루미늄으로 만든 제법 무거워 보이는 기계를 어깨에 얹고 나타났다. 기계 앞에는 노트북과 빔프로젝터가, 뒤에는 배터리가 놓여 있다. 해치맨이 벽을 향해 프로젝터를 켰다. 벽에 글자가 나타났다. ‘4대강부터 멈추고 그린을 언급하라. 살릴 수 있을 때 구하라.’ 해치맨은 길바닥이나 나무, 건물을 향해 프로젝터를 쏘았고 그때마다 다른 문구가 비춰졌다. 지나가던 이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벽에 나타난 글자를 응시했다.
지난 11월7일 오후에는 광화문 광장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옆에 말풍선이 떴다. 커다란 말풍선을 들고 광화문 광장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 이는 그때 그 해치맨. ‘녹(슨)색성장’이라는 글자가 쓰인 커다란 말풍선이 떠올랐고, 북한산을 뒤로하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세종대왕은 순식간에 칸 만화 속 주인공이 됐다. G20 정상회의 의제 중 하나인 ‘녹색성장’을 비튼 ‘녹(슨)색성장’은 세종대왕의 속마음이었을까.
‘해치맨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이 작업을 진행하는 이들은 4명의 디자이너로 이뤄진 디자인 그룹 ‘에프에프’(FF)다. 해치맨의 얼굴이 낯익은 이들도 있겠다. 지난 5월 이들은 첫 번째 작업으로 디자인 서울 캠페인 홍보물에 스티커를 붙이는 ‘비공식 불법 디자인 서울 캠페인-아이라이크 서울’을 진행했다. 서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하늘색 광고판에 쓰인 ‘서울이 좋아요’ 자리에 스티커로 제작한 문구를 붙였다. ‘서울은 원래 좋아요’ ‘서울이 좋은지는 우리가 판단할게요’ ‘와! 서울이 서울랜드가 되었어요!’ 등 이들이 트위터(@ilikeseoul)와 홈페이지(ilikeseoul.org)를 통해 시민들에게서 받은 문구가 덧입혀졌다. ‘디자인 서울이 좋다’는 단순한 메시지만을 반복하는 서울시의 캠페인을 거꾸로 이용해 디자인 서울에 대한 시민들의 진짜 의견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었다.
붙이는 ‘불법’에서 닦는 ‘합법’으로‘비공식 불법 디자인 서울 캠페인’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서울시는 이들을 압박했고, 지난 6월에는 경찰에 출석해 공공시설물을 훼손한 혐의로 조사도 받았다. 결국 이들이 붙여놓은 스티커는 다 철거됐고 스티커 프로젝트는 막을 내렸다. 이후 이들은 ‘붙이는’ 불법 캠페인에서 ‘닦는’ 합법 캠페인으로 방향을 바꿨다. 먼지가 가득한 곳을 닦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그려 메시지를 전하는 ‘리버스 그래피티’(reverse graffiti)는 ‘무스’(Moose)라고 알려진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폴 커티스가 고안해낸 방법이다. 그는 영국과 미국 등지의 터널이나 길거리의 벽을 닦으며 그림을 그린다.
리버스 그래피티의 장점은 어쨌든 청소를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디자인 그룹 에프에프는 디자인 서울 거리로 조성되는 곳을 찾아다니며 문구를 새길 곳에 테이프를 붙이고 글자 모양대로 잘라낸 다음 락스와 칫솔 등을 이용해 먼지를 닦아냈다. 대학로의 거리에는 ‘서울의 진보, 인간성의 퇴보’를, 시청 앞에는 ‘겉모습이 가장 중요한 도시 서울에 잘 오셨습니다’를 새겨넣었다. 에프에프의 조성도씨는 “한번 시작하면 6시간이 걸리기도 한다”며 “스티커는 떼어내면 그만이지만 이 문구를 지우려면 거리를 더럽히거나 반대로 다 청소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디자인 서울 관련 프로젝트가 ‘해치맨 프로젝트’의 시즌1 격이었다면 G20 관련 프로젝트는 시즌2다. 이들은 시즌1에서 한 것처럼 G20과 G20의 의제인 녹색성장에 관한 문구를 트위터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서 직접 받았다. G20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어떻게 디자인해 보여줄까 고민하다가 직접 프로젝터를 들고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된 기계 ‘해치버스터’와 헬륨가스를 넣은 말풍선을 떠올렸다. 에프에프의 민성훈씨는 “두 방식 모두 현장에서 바로 보여줄 수 있고, 크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며 “말풍선의 경우 세종대왕의 권위를 이용하는 방식이라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말풍선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갔을 때는 사복경찰과 광화문 광장 관리자들의 제지를 받았다.
G20과 관련해 이들이 보여준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G20SeoulSummit’이라는 트위터 계정이다. G20 공식 트위터 계정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실은 이 계정 주소는 ‘Seoul’이 아닌 ‘Seoui’이다. ‘i’를 대문자 ‘I’로 썼다. 이는 청와대 공식 트위터(@Bluehousekorea)를 같은 방법으로 바꾼 패러디 계정 칭화대(@BiuehouseKorea)가 먼저 했던 방식이다.
말장난처럼 한 글자를 바꾼 계정을 통해 이들은 지난 11월4일 ‘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G20 기간 중 트레이닝복 차림을 자제해주십시오’라는 트위트를 올렸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음식쓰레기를 자제해달라는 공지를 내보낸 것을 패러디한 메지시였다. 이 메시지에 3천 건 이상의 멘션이 달렸다. 조성도씨는 “실제 G20 트위터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화를 내는 이도 많았고, 패러디인 걸 알고 재미있어하는 이도 많았다”고 밝혔다. 이 작은 사건은 트레이닝복 차림을 자제해달라는 황당한 메시지마저 진짜로 착각할 만큼 G20이 경직돼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G20 공식 트위터(@SeoulSummit)는 ‘@G20SeouISummit 계정은 공식으로 운영되는 계정이 아닌 개인의 사칭 트위터이니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트위트를 남겨야 했다.
나 대신 시위하는 ‘스파이 아바타’이들은 왜 이런 ‘혼란’을 야기하는 걸까? 민성훈씨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스티커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지 알게 됐다. 정부에서 내보내는 단순한 캠페인성 메시지가 아닌,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계속해나가고 싶다. 부담감도 있지만 확신도 있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스스로를 ‘비정규직 예술가’라고 소개하는 권은비씨는 지난 6월 광화문 광장에서 ‘은밀한 저항-광장점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은밀했다. 권씨는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사람 모양의 초를 만들었다. 이들은 억울한 일 때문에 1인시위를 하고 싶은데 감시하는 눈과 소심한 성격 때문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시위를 해줄 ‘스파이 아바타’다. 그리고 트위터와 전자우편으로 은밀한 저항을 하고 싶은 이들에게 저항의 장소와 목적, 초가 들고 있을 피켓 내용 등을 신청받았다. ‘빨갱이 신고는 스파이에게’ ‘세종대왕 그냥 크다’ 등의 피켓을 들고 있는 아바타 초가 곳곳에 세워졌다. 증거사진 촬영과 이후 이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됐는지에 대한 기록도 빼놓지 않았다.
권씨는 “지난 5년 동안 시각예술적인 방법으로 사회적 의제를 건드리는 작업을 해왔다”며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가능하면 풍자 형식으로 즐겁게 다가가 같이 행동하면서 노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시각적으로 이슈를 던지고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강조하는 권씨는 미술계의 경직된 시선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작업실이 아닌 현장에서 사회참여적 예술을 하는 작가들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내거나 미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는 얘기다. 권씨는 “조형적이고 미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것만이 예술은 아니다”라며 “이번 쥐 그래피티 포스터 사건처럼 사건에 반응하는 현상 자체가 예술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유머, 오늘을 견뎌내는 가장 큰 힘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저항은 이렇듯 때로는 대놓고, 때로는 은밀하게 이뤄진다. 이들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시각적이며 공간적인 메시지에서 한계와 모순을 읽어내고, 아이디어를 시각예술로 구현하고, 또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시할 줄 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황과 결과물은 즐기기에 충분하다. 청사초롱을 들고 있는 쥐 그림도, 세종대왕 옆에서 떠다니는 말풍선도, 트레이닝복 차림을 자제해달라는 트위터도, 실종돼버린 수많은 아바타 초들도 보고 있으면 현실 세계와 묘하게 겹치면서 웃음이 난다. 그 웃음이야말로 우리가 지금을 견뎌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른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버블·해치맨 프로젝트 참여 방법
함께해요! 즐거운 저항!
모든 창작물에 저작권이 따라다니는 세상이지만, 저항을 위한 아이디어에는 저작권이 없다.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간단한 저항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먼저 ‘해치맨 프로젝트’가 스티커 작업을 할 때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버블 프로젝트’(사진)가 있다. 광고판에 비어 있는 말풍선을 붙여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적어넣을 수 있도록 하는 버블 프로젝트는 구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이지별씨가 2002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해 영국 런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공공장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광고의 타깃이자 피해자인 우리가 그 광고판을 거꾸로 이용해 마음껏 표현의 자유를 누리자는 게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버블 프로젝트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1. 홈페이지(thebubbleproject.com)에서 자유롭게 원하는 크기의 말풍선을 내려받아 프린트한다.
2. 프린트물을 가위로 잘라 풀을 이용해 원하는 광고판에 붙인다.
3. 자신이 직접 메시지를 쓸 수도 있고, 원하는 누군가 쓸 수 있도록 말풍선만 제공할 수도 있다.
4.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버블 프로젝트 도시별 페이스북에 올릴 수도 있다.
해치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그룹 에프에프는 최근 소책자를 발행했다. 책자에는 노트북과 배터리를 장착해 움직이면서 빔프로젝터를 사용할 수 있는 해치버스터 제작 방법과, 청소를 하면서 문자나 그림을 새기는 ‘리버스 그래피티’ 방법이 도면·그림 등과 함께 자세히 실려 있다.
리버스 그래피티를 하는 법은 간단하다.
1. 청테이프·칼·칫솔·물·물통·락스·휴지를 준비한다.
2. 문구를 새길 면에 테이프를 붙인다.
3. 미리 준비한 문구를 테이프 위에 붙인 다음 칼로 글자 모양대로 잘라낸다.
4. 바닥이 드러난 부분을 락스와 칫솔로 닦아낸다.
5. 바닥이 마르면 테이프를 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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