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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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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老學) 연대의 이름으로!



프랑스 청년들은 젊은 세대에게 유리한 정년연장 개혁안에 왜 반대했나…

‘세대 간 연대’에 바탕한 ‘유럽식 모델’ 지키기
등록 2010-11-12 09:44 수정 2020-05-03 04:26

지난 10월 사르코지 정부의 정년연장 및 연금개혁안에 맞선 프랑스 노동자의 저항은 전세계 언론의 주요 관심사였다. 한 달 동안 무려 5번의 전국적 총파업이 조직되고 주요 도시에서는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운수노동자의 파업으로 공항·기차역·고속도로가 마비됐고, 정유공장과 항만노동자의 파업으로 유류 수송이 끊겨 주유소에는 기름이 떨어졌다.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까지도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년연장 및 연금개혁 반대’를 함께 외쳤다.

젊은 세대가 은퇴자 책임지는 연금 구조

»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의 정년연장과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북부 도시 릴의 젊은이들이 지난 10월19일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연합 AFP

»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의 정년연장과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북부 도시 릴의 젊은이들이 지난 10월19일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연합 AFP

이를 두고 한국의 지인 가운데는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년이라도 회사에 더 있으려 하고 은퇴 뒤에도 일자리를 찾으려는 사람이 많은데, 프랑스 노동자들은 왜 정년연장에 반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의 정년연장에 대한 거부감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공적연금제도를 함께 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에서 정년퇴직은 곧 연금 생활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노동자는 60살까지 일하면 기본적인 노후의 삶은 공적연금이 보장한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연금 가입기간의 평균소득 대비 수급 연금액의 비율)은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42.1%다. 이는 40년 가입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국민연금 의무 가입이 20년도 안 된 현재 시점에서 실수령자를 기준으로 보면 12~25%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프랑스의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은 65%에 이른다. 직장에 다닐 때만큼은 아니지만, 노년에 굳이 일하지 않아도 공적연금만으로 기본적 삶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에게 정년연장보다는 적기 퇴직을 바라게 만드는 프랑스 공적연금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세대 간 연대’에 기반한 제도다. 즉, 현재 일을 하는 젊은 세대가 이미 은퇴한 노후 세대의 연금 비용을 책임지고 지불하는 구조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에 공적연금이 처음 도입된 1938년에는 사실 지금과 달리 자신이 낸 연금을 나중에 돌려받는 구조였다. 그러던 것이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비시 정권이 노동자 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독일의 ‘세대 간 연대’ 방식의 공적연금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이후 베이비붐으로 젊은 경제활동인구가 급증하면서 ‘세대 간 연대’ 방식의 공적연금제도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젊은 세대는 비교적 적은 부담으로 많지 않은 노후 세대의 연금을 넉넉히 뒷받침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부모 세대가 누리는 여유로운 노후를 꿈꿨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뒤 이런 ‘세대 간 연대’에 기반한 공적연금제도는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수술대 위에 오른다. 베이비붐 세대는 은퇴하는데, 그들의 연금을 지불해야 할 젊은 세대는 적어졌다. 1960년에는 4명의 젊은이가 1명의 노후연금을 책임졌지만, 2010년에는 1.8명의 젊은이가 1명의 노후연금을 책임져야 한다. 게다가 평균 기대수명이 82살에 육박하면서 젊은 세대가 책임져야 할 노후 세대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 노동자가 정부의 연금개혁안에 반발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정년연장과 연금개혁에 따른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와 사회의 역할 축소에 맞서 ‘유럽식 모델’을 지키기 위한 싸움인 셈이다.

이에 반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25살 미만 프랑스 젊은이들의 실업률은 20%대에 육박하고 있다. 결국 ‘세대 간 연대’ 방식의 연금제도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연금재정 적자는 빠르게 증가하면서 국가재정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기업의 사회보장비 분담 증액 요구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1993년부터 연금제도 개혁을 추진해왔다. 당시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는 100% 연금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연금 의무 납입기간을 37년6개월에서 40년으로 늘리고, 이를 채우지 않으면 1년당 10%의 연금액을 삭감하는 안을 관철시켰다. 이어 1995년 알랭 쥐페 총리는 민간 부문에서만 이루어진 1993년 연금개혁 내용을 공공 부문에도 적용했다. 현재 사르코지 대통령의 연금제도 개혁안은 이같은 개혁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르코지 정부의 안은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저 퇴직 정년을 60살에서 62살로 연장하며, 전액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65살에서 67살로 늦추는 것이다. 아울러 전액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의무 납입기간을 40년6개월에서 2013년까지 41년3개월로 늘릴 계획이다.

이같은 개혁의 추진과 그에 대한 반발은 프랑스인들만의 관심사는 아니다. ‘사회’와 ‘연대’라는 가치에 기반한 ‘유럽식 모델’의 지속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유럽 국가는 프랑스처럼 세대 간 연대에 기반한 공적연금제도를 운영해왔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시장보다는 국가의 역할, 개인보다는 사회적 연대를 중시하는 유럽식 모델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인구구조와 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 제도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가 생겼다. 영미권에서 시작된 시장의 역할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유럽 대륙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다수의 국가는 이미 이 문제에 칼날을 대고 있다. 대표적으로 1940년대 프랑스가 공적연금제도의 원형으로 삼았던 독일은 공적연금제도의 구조를 2001년부터 바꾸고 있다. 또 프랑스 연금개혁과 같은 의무 납입기간에 따른 연금 차감 제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결국 프랑스 노동자가 정부의 연금개혁안에 반발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정년연장과 연금개혁에 따른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와 사회의 역할 축소에 맞서 ‘유럽식 모델’을 지키기 위한 싸움인 셈이다.

그런데 이번 프랑스 연금개혁과 관련된 사회적 갈등 국면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 전역 수백 개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사르코지 정부의 연금개혁에 대한 반대 집회에 대대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사실 이번 연금개혁 문제는 세대 간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이었다. ‘세대 간 연대’에 기반해 있는 프랑스 연금제도의 특성상 젊은 세대나 은퇴 세대 중 어느 한쪽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 연금제도가 지속될 경우 가장 큰 피해자는 젊은 세대임을 강조하며, 정부-노조간 갈등 전선을 구세대-신세대간 갈등 전선으로 분산시키려 했다. 그런데 젊은 세대가 이에 동요하지 않고 세대 간 연대를 택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번 총파업을 주도한 프랑스 노조들의 정책적 역량이 컸다. 프랑스의 양대 노조인 노동총동맹(CGT)과 민주노동동맹(CFDT)은 정부의 감세정책 철회와 기업들의 사회보장비 분담 증액이란 정책적 대안들을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폭넓게 이끌어냈다. 양대 노총 사무총장들은 TV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했고, 이 기간에 이들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학자들의 언론 기고도 활발했다. 사회당을 비롯한 야당들이 차기 집권을 위한 이해관계에 매몰돼 정책적 대안 마련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노조들이 정책적 역량을 앞세워 젊은 세대와 은퇴 세대가 이해관계로 대립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 결과다.

그럼에도 정년연장과 연금개혁 법안은 이미 상·하원 의회의 표결을 모두 통과했다. 노조의 반발은 주춤한 모습이다. 고등학생들도 만성절 방학 이후 조용히 학교로 복귀했다. 그리고 정부는 “이 기간 동안 하루 4억~6억유로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세대 간 연대’에서 ‘사회적 연대’로

이번 갈등의 결말이 프랑스에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입힌 것은 물론 개혁안에 반대한 71% 국민에게 다소간 패배감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의 젊은 세대가 현재 프랑스 연금제도의 특징인 ‘세대 간 연대’ 모델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확실히 했다는 점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나 연대의 가치는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하는 데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세대 간 연대’의 가치를 지켜내고 그 한계를 ‘사회적 연대’로 극복해보려는 지금의 사회적 갈등이 프랑스로서는 결코 손해 보는 시간들이 아님을 확신한다.

파리(프랑스)=윤석준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유럽학연구소 박사과정 연구원 sem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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