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관행’ 혹은 ‘습관’이다. 6·2 지방선거 뒤 뭔가 변했다는 말은 들리지만, “투표한 보람이 있다”고 체감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새 단체장이, 바뀐 의회가, 눈높이가 높아진 시민이 변화의 단초를 만들어내더라도 관행이라는 벽이 무겁게 버티고 있는 탓이다.
‘사람 중심’ 아니라 ‘도서관 중심’국회 도서관장 출신인 유종필 서울 관악구청장은 ‘사람 중심 관악특별구’를 구정 비전으로 내놨다. 유 구청장의 공약인 작은 도서관 확충, 어린이 전용도서관 건립 등이 핵심 사업이다. 도서관은 주민이 손쉽게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사랑방처럼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 기능도 하기 때문에 풀뿌리 시민운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관악구에서 오랫동안 풀뿌리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재선의 이동영 구의원(민주노동당)은 “사람 중심 관악특별구가 아니라 도서관 중심 관악특별구”라고 비판한다. 왜 그럴까?
아쉬움은 ‘소통 부재’에 있다. 도서관 관련 사업 계획을 세우면서 구청은 지역 주민이나 풀뿌리 활동가들과 간담회 한 번 열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실제 현장의 수요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려면 의견 수렴은 당연한 절차인데, 이런 과정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분야의 정책이나 사업은 후순위로 밀리고, 도서관 사업에만 구청의 관심이 집중된 결과가 구의회에 상정된 ‘관악구 조직개편안’이다. 개편안엔 구청 문화체육과 아래에 있는 도서관팀을 확대 개편해 ‘도서관과’를 신설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동영 의원은 “도서관 사업은 매우 훌륭한 사업이지만, 과유불급이다. 전시행정에 그칠 수 있다”며 “4년 뒤 다른 구청장이 와도 ‘도서관과’가 존치할까? 지금 관악구에서 도서관 사업보다 더 시급한 건 복지 분야 정책·예산·인력인데, 주민과의 소통 없이 구청장 의지대로 이 사업만 밀어붙이다 보니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고 지적했다.
경기 부천시에선 주민 참여에 대한 공무원의 인식·준비 부족으로 주민참여예산제를 위한 조례안이 허울에 그칠 뻔했다. 김만수 부천시장은 후보 때부터 주민참여예산제를 공약했고, 부천 지역 시민단체와도 이를 제대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부천시가 8월10일 입법 예고한 조례안은 이런 원칙이 반영됐다고 보기 어려웠다. 통장, 동 주민자치위원 등 기존 행정조직에 관련된 사람 말고 일반 시민이나 지역 단체가 예산 작성에 참여할 길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지역 단체들은 반발했다. “주민참여예산제를 위한 것이라면 조례를 만들 때부터 시민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해야 하는데, 그런 절차도 없이 공무원들이 일방적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조례안은 주민 참여를 실질화하고 주민자치 역량을 제고하기엔 부족한 내용”이라는 이유였다. 지역 시민단체 대표자들은 김만수 시장을 만나 이런 의견을 전달하고 개선을 요구했다. 그제야 시청은 공청회를 열어 지역 단체와 주민들의 의견을 들었고, 조례안은 단체들이 지적한 내용 대부분을 수용해 고쳐졌다. 김기현 부천YMCA 사무총장은 “실무 공무원들의 ‘관 주도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이런 불필요한 갈등은 반복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공무원들의 ‘비밀주의’도 지방정치의 진보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지방정부의 투명한 정보 공개는 지역의 주인인 시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자치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지방의원들은 당연히 검토해야 할 정보마저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산 지출 자료도 의회에 제출 안 해경남의 한 기초의원은 최근 지방정부에 ‘지출 원인행위 및 지출부’(지출부) 공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지출부는 지방정부가 예산을 쓸 때 언제, 어디에, 얼마나, 왜 지출했는지를 기록하는 일종의 가계부다. 지방의회가 결산심사를 할 때 검토하는 결산서엔 특정 사업에 배정된 예산 액수와 실제 지출한 액수만 적혀 있어 지출의 상세한 내용까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예산이라도 지출부를 보면 특정인에게 퍼주기를 했는지, 쓸 데 없는 물품을 구입하는 데 돈을 썼는지 등이 확연히 드러난다.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분명하게 알아보기 위해 지출부 자료를 요구했지만, “방대한 분량이며 지금까지 기초의회에 제출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것이다.
경기 과천에서 2007년부터 ‘주민참여예산 워크숍’을 열어 시 예산안을 주민 토론에 부쳐 불필요한 예산은 과감하게 삭감하고 결산심사도 꼼꼼히 들여다보기로 유명한 서형원 과천시의원은 “관행상 안 보여준다고 하지만, 지출부는 정보공개를 청구하면 당연히 공개해야 하는 자료”라며 “의원들이 잘 몰라서 관행이라는 말에 넘어갈 수도 있지만, 주민 대표인 의원들이 예산을 쓴 내역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방의원들의 구태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지난 7월23일 서울 동작구의회 박원규 의장은 “동작구의회 구성 과정에서 (중략) 당론에 따르지 못하고 (중략) 소속당 의원님들에게 신의를 저버린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의회가 구성된 지 한 달도 안 돼 사과문을 낸 이유는 의장 선출을 둘러싼 ‘알력’ 때문이었다.
동작구의회는 민주당 의원 9명, 한나라당 의원 8명으로 구성돼 있다. 17명 가운데 13명이 초선인데, 다수당인 민주당은 3선인 유태철 의원을 4년 임기 가운데 상반기 2년을 맡는 의장으로 밀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같은 당 박원규 의원이 반기를 들었다. 지난 5대 지방의회 때 낙선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5선이니 먼저 의장이 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7월8일 개원식에 앞서 실시한 투표에서 박 의원은 9표를 얻어, 7표에 그친 유 의원을 따돌리고 의장에 당선됐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에 반발해 회의장을 떠났다. 이어 열린 동작구의회 개원식엔 박 의원을 제외한 민주당 의원 모두가 불참했다. 구의회 안팎에선 박 의원이 “하반기 의장을 한나라당 쪽에 넘겨주겠다고 약속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불거졌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채 사과문으로 일단락됐다.
지방의회 의장은 대부분 다수당이 ‘내정’한 사람으로 결정된다. 의장 선출 전에 후보 등록을 받고 정견발표도 하는 지방의회는 전국에서 부산시·경기도의회, 울산 중구·대전 서구·전남 여수시의회 정도다. 의장을 뽑는 의원들조차 ‘내정자’가 알려지기 전엔 누가 의장으로 나서는지도 모르고, 막상 투표 때가 되면 의장이 되려는 사람이 의회 운영과 관련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투표용지에 이름을 써낸다.
일당 독식 완화됐지만 ‘준비된 후보’ 적어그러다 보니 다수당 ‘내정자’가 되려고 갖은 로비가 벌어진다. 지난 5대 지방의회 때 서울시의회 의장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김귀환 전 시의원의 로비 의혹, 서울 중구의회의 성접대 의혹 등은 모두 이 때문에 생긴 일이다. 구본승 서울 강북구의원 등은 후보등록제와 정견발표제를 구의회 회의규칙으로 규정해 의장 선출을 둘러싼 파행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풀뿌리 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인 하승수 변호사는 “6·2 지방선거 결과 지방의회나 구청장직을 특정 정당이 독식하는 현상은 완화됐지만, 행정·정책·의식 등에서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당선된 경우도 적지 않다”며 “‘누가 뭘 해줬다’가 아니라 ‘우리가 참여해서 바꿨다’를 느끼는 게 지방자치의 의미이자 새로운 정치다. 그러려면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하고, 행정조직부터 소통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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