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6일 미국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대학 로스쿨 건물에는 전세계에서 온 90여 명의 학자와 공익단체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이름조차 낯선 ‘위조방지무역협정’(ACTA·Anti-Counterfeiting Trade Agreement)이었다. ACTA는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이 중심이 되어 개도국 시장을 목적으로 공세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다자간 무역협정으로, 특허·저작권·상표 등 지적재산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ACTA가 기본권과 자유를 위축시킨다”
이들은 꼬박 2박3일 동안 협정을 요밀조밀 살펴본 뒤, 6월23일 ‘긴급성명’을 냈다. 성명의 톤은 강했다. 성명은 “ACTA는 건강권, 프라이버시, 개인 정보의 보호, 표현의 자유, 교육, 공정한 재판과 무죄 추정의 원칙을 포함한 … 기본권과 자유의 향유를 위축시킨다”라고 경고했다.
이 성명은 국내 언론에서 거의 다루지지 않았다. 내용이 낯선 탓이 컸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은 새로운 협정이 우리 사회에 미칠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다. ACTA가 발효되면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이 가지고 있는 특허·상표권·저작권 등 지적재산권이 국내에서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저작권 침해를 둘러싼 법적 분쟁이 심화하고, ‘과잉 처벌’ 논란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중국 등 개도국에서 우리나라 지적재산권이 보장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긴급성명 작성에 참여한 남희섭 변리사의 자문을 받아 협정 내용을 차근차근 살펴봤다.
전체 6장으로 구성된 ACTA 가운데 핵심은 민사 절차, 형사 절차 등의 내용을 담은 두 번째 장이다. 전세계의 시민단체와 학자들도 이 부분을 주목하고 있다.
2장의 ‘형사처벌’ 규정은 논란을 낳는 대표적인 조항이다. 협정문을 보면, 상업적 규모로 이뤄지는 저작권 침해 또는 상표권 침해는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이런 침해 행위가 ‘상업적 규모’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금전적 이득’이 있느냐인데, 문제는 금전적 이득의 정의가 애매하다는 점이다. 협정문은 금전적 이득에 대해 “어떠한 가치(anything of value)의 수령 또는 수령의 기대”라는, 해석의 여지가 무척 넓은 표현을 썼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터넷에서 파일을 내려받는 관행도, 이 조항의 해석에 따라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저작권법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법대로라면,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한 사람은 동기를 따지지 않고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 저작권자를 대신한 일부 법무법인은 사소하게 법을 어긴 청소년들에게 과도한 합의금을 요구해 사회문제를 낳기도 했다. 저작권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이미 형사처벌 기준을 완화한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놓은 상태다. 개정안에서는 ‘저작권의 침해를 영리 목적의 업으로 한’ 사람만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쉽게 말해 ‘업자’들만 처벌하겠다는 뜻이다. 개정안은 현행 저작권법이나 ACTA에 견줘, 합리적인 수준의 처벌 기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ACTA가 국내 저작권법 개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남희섭 변리사는 “지적재산권 침해에 대해 형사처벌의 여지를 크게 둔 ACTA가 발효되면, 국내 저작권법의 처벌기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애매한 ‘중개자’ 개념, 운송업체도 제재 대상
지적재산권을 간접적으로 어긴 이를 뜻하는 ‘중개자’ 개념을 두고도 말이 많다. ‘중개자’의 예로는 인터넷에서 불법 음악파일이나 동영상 파일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공간을 마련한 사이트를 들 수 있다. 문제는 협정이 규정한 중개자의 정의가 애매하다는 점이다. 지난 4월에 공개된 협정 초안에서는 중개자가 법적인 제재 대상이 된다고 규정했지만, 어디까지 중개자로 볼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중개자의 범주는 오히려 최근 유럽 쪽의 판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판결을 보면 정의의 폭은 매우 넓다. 심지어 단순히 복제품의 수송만 맡은 운송업체도 제재 대상이 됐다. 지난해 9월 독일 대법원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복제품 MP3 플레이어를 실어나른 해운업체에도 ‘특허권을 침해한’ 책임을 물었다. 당시 해운업체는 “특허권 침해 여부를 점검할 일반적인 의무는 없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 유럽사법재판소는 지난해 2월 전자우편이나 파일 공유 서비스 이외에 단순히 인터넷 접속 서비스만 제공한 업체도 중개자에 해당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통해 이용자가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면, 저작권자는 해당 업체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금지 명령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이렇게 중개자의 개념을 적용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포털이나 소리바다 등 파일 공유 서비스는 물론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는 통신사도 지적재산권 침해 시비에 휘말릴 수 있게 된다. 남희섭 변리사는 “우체국 등 택배회사나 의약품의 인·허가권을 쥔 식품의약품안전청 등도 중개자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정손해배상제도’도 논란거리다. 법정손해배상제도란 지적재산권 위반 행위에 대해 법정에서 배상액을 미리 정해놓은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지적재산권을 가진 쪽은 구체적인 손해의 발생 또는 손해액의 규모를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 권리침해가 있었다는 점만 입증하면 일정한 배상액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실제 손해액이 큰 경우에는 소송을 통해 손해 규모를 입증하고 더 많은 배상을 받아내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CD 한 장당 2만5천달러? 손해배상 하한 보장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저작권 침해의 경우 상품 하나마다 750~3만달러씩, 상표권 침해의 경우 500~10만달러씩을 법정 손해액으로 정해놨다. 지난 2000년 미국 UMG 레코딩사는 디지털 음악파일 판매회사인 엠피3닷컴(MP3.com)이 불법적으로 MP3 파일을 CD에 담아 팔았다고 고소했는데, 법원은 CD 한 장당 무려 2만5천달러의 배상액을 제시했다. 엠피3닷컴이 물어야 할 액수는 CD 판매량 4700장에 손해액을 곱한 1억1750만달러였다. 당시 최종 배상액의 규모가 적정한지를 놓고 미국 안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작권 침해 여부만 입증하면 손해배상액의 하한선을 보장해주는 이 제도가 민법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가해자가 물어줘야 하는 손해의 범위는 실제 손해액과 맞춰야 한다는 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직접적 연관이 적지만 ACTA의 ‘국경조치’도 국제적인 논란을 낳고 있다. ACTA에서는 한 나라의 세관이 지적재산권을 어긴 것으로 보이는 물품을 직권으로 폐기 처분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지난해 국제에이즈지원기구에서 클린턴재단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와 남미 지역의 에이즈 환자들에게 전해주려고 한 의약품이 네덜란드 세관 당국에 압류됐다. 이 의약품은 인도 제약업체에서 생산한 것으로, 수출국과 수입국에서 지적재산권 침해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네덜란드의 특허권을 침해한 것이 문제였다. 이에 대해 인도와 브라질은 지난 5월 네덜란드와 EU를 상대로 WTO 분쟁 해결 절차를 시작했다. 아메리칸대학의 긴급성명에서도 “협상 대표들은 (ACTA가) 의약품의 합법적인 국경 간 이동을 제약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제약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국제 시민단체인 옥스팸 아메리카 고문인 로히트 말파니는 6월27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협정 때문에 값싼 약품이 빈국으로 이동하는 길이 막히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과 EU, 일본이 ACTA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배경에는 저작권 수출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있다. WTO의 지난해 국제무역 통계를 보면, 지적재산권 관련 전세계 수출액은 모두 1843억5500만달러(약 226조원)였다. 이 가운데 미국(826조1400만달러·44.8%), EU(596조4700만달러·32.4%), 일본(232조2900만달러·12.6%) 등 세 경제권은 전체의 89.8%를 차지했다. 지적재산권 관련 무역에서 흑자를 보는 경제권도 미국, EU, 일본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도 없다. 지적재산권 규제를 강화하면 혜택이 어디로 갈지는 명확한 셈이다. 우리나라는 2009년 지적재산권 관련 무역 적자만 33억9900만달러(약 4조1718억원)였다. 수출액은 17억3500만달러, 수입액은 51억3400만달러였다.
김병일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수준으로 협정이 체결되면 앞으로 의무 이행에 상당한 부담이 있을 수 있지만, 중국이나 아세안 국가에서 우리 지적재산권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을 수 있다”고 지난해 11월 열린 불법복제 관련 세미나에서 밝혔다. 남희섭 변리사는 “선진국들은 협정의 목적이 해적판이나 위조 상품을 근절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 협정문은 지적재산권의 침해가 문제될 만한 모든 행위를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협정이 발효되면 경제적 파급효과가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협상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협정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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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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