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나도 읽고 싶다”

시·청각장애인의 정보접근권 보장에 준비 안 된 한국 사회…
도서관·전시장·대학·서점에서 차별받는 그들의 집단소송
등록 2010-04-13 15:05 수정 2020-05-03 04:26
시각장애 1급인 허주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전남지소 소장이 점자책을 읽고 있다. 점자나 시각장애인용 바코드를 활용하면 시각장애인도 인쇄매체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다.

시각장애 1급인 허주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전남지소 소장이 점자책을 읽고 있다. 점자나 시각장애인용 바코드를 활용하면 시각장애인도 인쇄매체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다.

지난 1월 이아무개씨는 겨울방학을 맞아 딸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찾았다. 시각장애 1급인 딸은 점자책을 읽거나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걸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란 기대는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도서관에는 점자책이 단 한 권도 없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지원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엄마라도 책을 읽어달라”는 딸의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지난 2월9일 이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접수했다. 상대는 도서관이었다.

“점자책 없으니 참석하지 마십시오”

같은 날 진정을 제기한 것은 이씨뿐만이 아니었다. 30여 명의 시·청각장애인이 모여 집단으로 진정을 냈다. 진정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보접근과 의사소통에서 차별을 받아온 이들의 답답함이 가득하다. 한 사이버대학교에서는 강의 자료로 음성변환이 지원되지 않는 ‘PDF 파일’만 나눠줘 시각장애인 학생이 시험공부를 할 수 없었다. 은행에서 약관을 직접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출을 거부당한 사연도 있다.

이들이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외친 구호는 간단하다. “서점에서 책을 읽고 싶다!” “학교에서 마음 놓고 책 읽으며 공부하고 싶다!” 오래된 소망이다.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 3년, 시행 2년을 맞은 2010년, 한국의 시·청각장애인은 여전히 소외 속에 고통받고 있다.

시각장애 1급인 허주현(44)씨는 출장을 다닐 일이 많아 기차를 자주 이용한다. 뉴스 읽기를 좋아하는 그는 기차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싶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볼 수 있다지만, 시각장애인인 그는 터치스크린을 사용할 수 없다. 이동 중이니 인터넷 사이트를 읽어주는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도 없다. 결국 그는 전화를 꺼내든다. 시각장애인연합회(1577-6655)와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02-880-0900)은 전화로 신문기사를 읽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들이 입력해놓은 뉴스만 들을 수 있는 단점이 있지만, 허씨에겐 이나마도 소중하다. 보통 20개 정도의 신문 기사와 사설을 듣고나면 1시간이 훌쩍 지난다.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지만 감수해야 한다. “신문과 잡지를 기차에서 읽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전화를 끊을 때마다 허씨는 생각한다.

정보접근이 차단되면 시각장애인은 너무도 쉽게 사회에서 배제당한다. 지난해 12월, 부산시각장애인연합회에 소속된 시각장애 1급 사회복지사 한아무개(34)씨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부산에서 장애인체육 관련 설명회가 열린다기에 주최 측에 전화를 걸어 행사장 위치를 문의했다. 한씨가 시각장애인임을 밝히자 상대는 “우리 설명회에는 점자설명지도 없고 교통도 불편하니 비장애인 직원이 참석하라”고 말했다. 한씨는 “당시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설명회장을 찾아갔지만 자료집을 읽을 방법이 없었다. 담당자에게 자료집의 내용을 문서 파일로 줄 것을 요청하자 “2~3주 뒤에 어차피 홈페이지에 올라갈 테니 그때 확인하라”고 했다. 한 달 뒤, 비로소 문서 파일을 구해 읽을 수 있었다. 문의 사항이 있어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설명회를 듣기냐 한거냐”며 드러내놓고 무시를 했다. 한씨는 “장애인 체육 관련 일을 한다는 사람조차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답답했다”고 말했다. “점자책이 없다”, “음성지원 장비가 없다” 등의 말은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정중하고도 잔인하게 사회로부터 배제당하는 방식이다.

시각장애인은 이런 ‘일상의 배제’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한다. 시각장애 1급인 이상훈(35)씨는 지난해 지방직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부산시청에서 일하는 꿈을 꿨다. 부산시청에 자신의 장애 사실을 밝히고 자신이 시험지를 읽고 답을 적을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지역의 장애인 단체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장애인 단체들이 나서서 부산시청에 탄원서를 넣었다. 이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기도 했다. 몇 달의 노력 끝에 비로소 부산시청은 그를 위해 점자 시험지를 준비했다.

4월8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2주년 기념 토론회 모습. 토론 내용은 모두 수화로 안내됐고, 자료집 상단에는 ‘2차원 고밀도 바코드’가 삽입됐다.

4월8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2주년 기념 토론회 모습. 토론 내용은 모두 수화로 안내됐고, 자료집 상단에는 ‘2차원 고밀도 바코드’가 삽입됐다.

편의 제공 의무를 출판·영상물로 확대해야

현재 장애인차별금지법은 20조와 21조에서 ‘정보접근에서의 차별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법은 어떠한 개인이나 공공기관도 정보접근에 있어 장애를 이유로 차별하지 말도록 못박았다. 특히 21조에서는 공공기관이나 방송사업자가 자막·수화·점자·음성 서비스를 통해 시·청각장애인에게 의무적으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하지만 처벌 조항은 없다.

‘집단 진정’을 제기한 시·청각장애인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1조의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일단 정보접근권을 보장해야 할 사업자의 범위를 현재의 공공기관·방송사업자에서 더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추진연대, 장애인정보문화누리 등 장애인 단체는 “정보접근 편의제공 의무 규정을 출판물 제작자와 영상물 제작·배급사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효정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활동가는 “장애아가 공부하려면 출판물의 접근성 보장이, 문화생활을 향유하려면 영상물의 접근성 보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미 박은수 민주당 의원 등이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지만 아직까지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만으로 단속과 처벌이 약하다면 관계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나설 수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 문제 전반을 다루는 만큼 실무적인 부분에서 여러 부처와 얽혀 있다. 인권위의 한 관계자는 “저상버스와 관련해서는 국토해양부가, 특수교육과 관련해서는 교과부가 나서서 홍보와 단속을 강화한다면 더 빨리 장애인 차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경기도가 “공공기관의 장애인 차별 조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겠다”고 나선 것이 좋은 예다. 경기도는 수원, 성남, 고양, 부천 등 인구 50만 명 이상인 8개 시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54개 항목의 장애인 차별 규정을 적발했다. 고용과정에서 ‘의견 발표의 정확성’과 ‘용모 기준’을 둬 장애인을 차별한 규정, 공공장소에 애완동물의 출입을 금하면서 안내견을 동반한 시각장애인의 출입까지 제한한 규정 등을 삭제하거나 수정하기로 했다.

제도 정비와 더불어 정보접근을 막는 현실적인 문제들도 고민해야 한다. 현재 시각장애인이 문자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다. 컴퓨터상의 글자는 그나마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문서 파일이나 인터넷상의 글을 소리내 읽어주는 소프트웨어가 있기 때문이다. 단, 문서 파일은 (아래)한글 파일만 변환이 가능하다. 두 번째는 점자책이다. 이는 점자를 배운 이들만 읽을 수 있고 점자책 제작에 따로 돈이 든다. 마지막으로 책장에 특수 바코드를 인쇄해 이를 스캐닝하면 책 내용을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시스템이 있다. 이 이번에 시사 매체로는 처음으로 도입한 ‘2차원 고밀도 바코드’가 바로 이 시스템이다.

‘바코드 리더기’ 지원 방식도 부실

이렇게 모든 책에 바코드가 삽입된다면 서점이나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의 불만은 해소될 수 있다. 문제는 출판사나 각종 언론매체가 시각장애인용 바코드 삽입과 같은 ‘접근성 강화’ 작업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따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철환 장애인정보문화누리 부장은 “공공기관의 문서와 언론매체에 시각장애인용 바코드를 삽입하는 일은 최상의 방법이며 동시에 필수적이라고 본다”며 “법 개정을 통해 시각장애인이 오프라인 매체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모든 도서가 책장에 바코드를 삽입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바코드는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가 있어야만 스캐닝과 음성 출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기 값이 수십만원을 호가한다. 보건복지부가 이 기기를 구입하는 비용을 최대 80만원까지 지원한다. ‘재활보조기구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 구입을 지원받기는 사실상 쉽지 않다.

우선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는 보건복지부가 구입을 지원하는 재활보조기구 12개 품목 중 하나다. 그 밖에 욕창 방지용 방석 및 커버, 음성증폭기, 음성탁상시계, 자세보조용구, 보행보조차, 식사보조기구, 기립보조기구 등이 있다. 장애인은 이 가운데 단 한 가지만 골라야 한다.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는 다른 품목보다 ‘급박하지 않은’ 물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

또 현재 보건복지부의 ‘재활보조기구 지원’ 전체 예산은 9억원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예산이 적다 보니 지역별로 배분하다 보면 일선 구청에 내려가는 돈은 몇백만원 수준으로 미미하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보건복지부는 ‘교부제한지침’을 두어 재활보조기구 지원을 통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0년 교부제한지침’을 보면, 지난해 한 번 구입 지원을 받은 사람은 올해 지원을 받을 수 없다. 1년에 한 가지 품목도 지원받기 어려운 셈이다.

지난 4월8일, 100여 명의 장애아 부모가 집단으로 진정을 제기했다. 이중 12건은 “보조기기 지원 부재로 인해 차별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 부모는 “뇌병변장애인 아이가 척추가 휘어 200만원짜리 특수휠체어에 150~300만원짜리 맞춤형 자세보조용구를 사용해야 한다”며 “구입 비용에 건강보험조차 적용되지 않으니 평범한 월급으로는 버티기가 어렵다”고 호소했다. 보조기구를 구입할 돈이 없어 장애가 심해진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건복지부의 무대응은 실질적인 장애인 차별”이라고 외쳤다.

장애아 부모들 “보조기기 지원 않는 건 차별”

장애아 부모들의 ‘집단 진정’이 있던 날,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는 ‘장애인차별금지법 2주년 기념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제공된 자료집 우측 상단 귀퉁이에는 작은 바코드가 있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시각장애인들은 음성변환 출력기를 통해 자료집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토론회장을 벗어나면 이런 환경은 꿈꾸기 어렵다. “읽고 싶다”는 소망은 아직까지 시각장애인들에게 꿈이다. 전인옥 한국시각장애인여성연합 상임이사는 “다른 사람과 함께 보고 즐기고 호흡하는 것이 나에겐 당연한 일이 아니라 너무 감사한 일”이라며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010년, 그 단순한 소망 앞에 한국 사회는 서 있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