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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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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노동중독증 한국사회

단시일에 산업화 이루면서 ‘행복 중심’에서 ‘노동 중심’으로 유전자가 이동해
등록 2010-02-10 10:17 수정 2020-05-02 19:26

상당수 한국인은 놀면 불안하다. 이것은 집단적 노동중독 증세에 가깝다. 좀 놀아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주 5일 근무제 도입을 앞두고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던가. 경쟁력 저하, 비용 증대 운운은 당시도 매우 심했다. 하지만 주 5일 근무자 대부분은 과거로 돌아가라고 하면 눈앞이 캄캄해질 것이다. 여전히 한국에선 사회뿐 아니라 개인도 쉬는 것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저서 에서 “‘일중독’이란 우리 삶의 내면이 공허할 때 그 허기를 일(성과)로 채우려는 일종의 질병”이라고 지적한다.

일을 통한 성취에 모든 것을 걸었던 직장인들은 느닷없는 해고 통고에 존재의 의미를 한꺼번에 잃게 된다. 한겨레 자료

일을 통한 성취에 모든 것을 걸었던 직장인들은 느닷없는 해고 통고에 존재의 의미를 한꺼번에 잃게 된다. 한겨레 자료

10개 중 하나만 잃어도 모두 잃는 시스템

일중독의 저변에는 강한 동일시가 있다. 남들이 100년에 이룬 산업화를 30년에 압축해 이루면서 한국인은 자신을 사회의 시스템과 강하게 동일시하게 됐다. 이러한 자본에 대한 한국인의 자발적 복종은 과노동으로 드러난다. 강수돌 교수는 “일제강점기, 경제개발기를 거치면서 한국인의 유전자(DNA)가 행복 중심에서 노동 중심으로 변형됐다”며 “가정·직장·사회에서 칭찬과 보상을 통해 노동중독이 강화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노동중독에 머무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편안한, 뒤틀린 사회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에게 성장의 기억은 너무나 가깝다. 아직도 열심히 일해서(한국에선 공부도 일이다) 남보다 높이 올라가려는 욕망을 누구도 쉽사리 놓지 못한다. 그러나 이훈상 동아대 교수(한국사)는 한국 사회의 강한 하향 지향성을 지적한다. 그는 “한국은 돈·명예·권력이 단단히 결합되고 독점된 사회”라며 “10개 중에 1개만 잃어도 모두를 잃게 되는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이렇게 모두가 떨어지면 죽는다는 집단 무의식에 시달린다. 여기서 일은 불안을 달래는 가짜 약이다. 그래서 삼성전자 부사장부터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까지 일에 매달린다. 이 교수는 “기득권층은 떡고물을 누리면서 중독되고, 서민은 떡고물을 동경하며 중독된다”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강수돌 교수는 “일은 신이 됐다”고, 이훈상 교수는 “시간을 자신이 조절할 수 없으면 그것은 근면이 아니라 시간의 노예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연말에 일부 금융계 회사원은 ‘리프레시’라는 명목의 열흘짜리 휴가를 얻었다.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대통령의 ‘한 말씀’에 부응한 은행의 시급한 정책으로 열흘씩 ‘의무로’ 쉬었던 것이다. 물론 일자리 확산 없이 비용 절감만 됐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열흘을 ‘놀아’본 한 은행의 윤아무개 과장은 “다른 휴가와 겹쳐서 13일을 쉬었는데, 직장 생활 15년 만에 비로소 살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예전엔 쓰지 않으면 연말에 지급하던 연·월차 수당을 이제는 돈으로 주지 않으니 올해도 열흘의 휴가가 생겼다. 그는 벌써 4월과 9월로 휴가를 나누어 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홍콩인, 일주일 미만 쉰다면 “이민 가겠다”

그동안 한국인은 참으로 무던했다. 최장 연휴가 일주일 미만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홍콩의 모리스 응, 싱가포르의 필립 팡은 “이민을 가겠다”고 답했다. 이슬람이 다수인 말레이시아에도, 힌두교도가 많은 인도에도 종교 기념일에 맞춰 일주일가량 일을 ‘제치는’ 때가 있다. 이만큼 살면서 요만큼 노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놀아본 사람이 노는 법이다. 사람만 아니라 사회도 그렇다. 1년에 한두 번 일주일씩 다 함께 일을 놓으면 세상이 더 잘 돌아갈지 모른다. 돌이키지 못하는 주 5일제 도입에서 보듯이, 한번 받은 휴일은 다시 뺏기지 않는다. 다 함께 노올자, 차차차!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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