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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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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2세’의 신파라도 괜찮아


쇼트트랙 미 대표로 나오는 한국계 사이먼 조…
심금을 울리는 가족사에 어울릴 함박웃음 볼 수 있으려나
등록 2010-02-09 15:36 수정 2020-05-03 04:25

샤샤 코헨은 왜 올림픽 무대에 굳이 돌아오려 했을까?
무심코 스포츠 채널을 켰다가, ‘다시 보는 토리노’ 따위의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았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다시 보니 작고 하얗고 금발인 그녀가 정말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손을 발등에 올리고 한 발을 수직으로 올리는, 리듬체조 선수가 지상에서나 할 법한 동작을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가면서 하는 그녀의 스파이럴이 헉 소리 나게 아름다웠고, 그리고 아마도 해설자가 말했는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부모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미국 이민자라는 얘기를 들었고, ‘러시아어’ 인장이 너무도 선명히 새겨진 그녀의 이름이 새삼 다가왔고, 그리고 들었던 생각의 마지막, 그녀에겐 올림픽 챔피언이 돼야 할 이유가 남보다 하나는 더 있겠다, 이민자 가정의 2세가 짊어지는 인생의 무게가 그녀에겐 더 있었겠구나, 지금도 있겠구나,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2006 토리노 겨울올림픽 여자피겨 싱글 은메달로는 부족했던 거로구나.

사이먼 조(가운데). 연합 최재구

사이먼 조(가운데). 연합 최재구

이민자 가정 2세들의 ‘삶의 무게’란

이민자 2세의 올림픽 스토리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여자체조 개인종합 금메달을 땄던 나스티아 류킨. 역시나 금발의 러시아 미녀는 성조기 휘날리며 베이징 올림픽 시상대 맨 위에 올랐다. 1989년 러시아 태생. 그녀의 코치이자 아버지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체조 2관왕에 올랐던 발레리 류킨. 낫이 새겨진 붉은 소비에트 유니폼이 근육과 절묘하게 어울렸던 사나이. 게다가 어머니는 1987년 세계리듬체조선수권대회 곤봉 종목 우승자. 그러나 엘리트 체육인 가족은 1992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일자리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민자 부모는 딸을 보육시설에 맡길 형편이 되지 않았다. 체육관에서 자란 소녀는 부모의 만류에도 자연스레 체조선수가 되었고, 타고난 재질과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고 시상대에서 눈물을 뿌렸다. 이상은 디아스포라 동화의 해피엔딩.

옛 소련에 체조와 피겨가 있었다면, 현 한국엔 쇼트트랙이 있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선 1991년 서울 태생의 청년이 성조기를 달고 해피엔딩을 향해 달린다. 한국계 미국인 사이먼 조(사진 가운데). 먼저 아버지가 1992년 미국에 이른바 ‘밀입국’했고, 나머지 가족도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불법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드라마의 각이 서는 우연 하나. 하필이면 가족은 올림픽이 열리는 캐나다 벤쿠버를 통해서 미국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가난한 가족의 고군분투 스토리 더하기. 메릴랜드 인근에서 초밥 식당을 하던 가족의 생계는 넉넉지 않았으나 아들은 스케이팅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부모는 헌신적이었다. 2007~2008 시즌에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선발된 아들은 불행히도 다음해에 대표팀 탈락과 함께 슬럼프에 빠진다. 그래서 연간 4만달러의 올림픽위원회 지원금이 끊겼고, 부모는 초밥집을 처분해 운동비를 마련하고 아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훈련에 전념한다.

잠시 얘기는 한국인 김 빼는 샛길로 빠진다. 이때 나타난 선인이 하필이면 아폴로 안톤 오노. 한국에선 공공의 적인 그가 사이먼이 운동을 계속 하도록 도왔다. 아시아만 넘어가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동양계로 ‘셈셈’(Same Same)이란 것을 미국에 사는 일본계 혼혈인 오노는 몸으로 알지 않았을까. 하여튼 이런 온정의 손길에 힘입어 사이먼은 지난해 올림픽 선발전에서 개인 500m와 5천m 계주에서 출전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엔딩은 스포일러를 쓰고 싶어도 못 쓰니 나중에 확인.

일본계 안톤 오노의 도움으로 재기

올림픽에 나가고 싶어서 미국 쇼트트랙 국가대표가 되었던 한국 출신 선수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감정도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 앞에선 사르르 녹겠지. 이렇게 이민자 가정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언제나 심금을 울리고, 그들에겐 박수 한 번 더 쳐주고 싶다네. 역시 신파는 나의 힘.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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