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년 만의 타결, 그 지난함과 초라함

등록 2010-01-08 11:30 수정 2020-05-03 04:25

용산 참사를 둘러싼 협상이 2009년 12월30일 타결됐다. 영하 10도까지 수은주가 곤두박질하던 날이다. 사건이 터진 그해 벽두도 그리 추웠다. 아니, 살 수 없을 만치 뜨거웠다.
지난 1년이 그랬다. 망루에 불이 붙던 정초, 검찰이 “용산 참사, 경찰의 과잉 진압은 없었다”고 발표한 2월, 검찰이 수사 기록 3천여 쪽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던 5월, 문규현 신부가 단식 농성으로 쓰러져 사경에 발을 디뎠던 10월, 그리고 법원이 기소된 철거민 모두에게 유죄를 내린 또 10월…. 2009년의 어느 계절도 이들에게 따뜻하지 않았다.

2009년 12월30일 오전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시청 별관에서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던 시각, 참사가 난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앞에서 영정을 끌어안은 유족들이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의 별도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09년 12월30일 오전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시청 별관에서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던 시각, 참사가 난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앞에서 영정을 끌어안은 유족들이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의 별도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공치사’만 화려하다. 국무총리가, 서울시가, 국회의원이 ‘적극적’이었다. 재개발조합은 ‘인도적’이다. 보상금·위로금·장례비를 모두 떠맡았다. 하지만 그들만의 ‘따뜻한 세계’는 쪼들린 몸 하나를 누일 아주 작은 방, 잡초처럼 키 낮은 꿈 하나 키울 또 작은 가게는 절대 포용하지 않는다.

죽은 자의 고향은 가진 자들의 낙원으로 바야흐로 바뀔 참이다. 숨진 이들은 1월9일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사라질 것이다. 다들 극적 타결이라 하는데, 저들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이들이 원하는 36.5℃의 자그마한 세계는 오지 않은 탓이다.

2009년 9월1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유족과 시민들이 용산 참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삼보일배를 하다 경찰에 가로막혀 있다.

2009년 9월1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유족과 시민들이 용산 참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삼보일배를 하다 경찰에 가로막혀 있다.

참사 140일째인 2009년 6월10일 젊은 예술가들이 희생된 5명의 얼굴이 담긴 초상화를 철거 가림막에 새기고 있다.

참사 140일째인 2009년 6월10일 젊은 예술가들이 희생된 5명의 얼굴이 담긴 초상화를 철거 가림막에 새기고 있다.

2009년 4월29일 서울역 앞에서 시민들이 ‘용산 참사 100일 추모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2009년 4월29일 서울역 앞에서 시민들이 ‘용산 참사 100일 추모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2009년 3월12일 희생자들의 주검이 있는 서울 순천향병원 영안실 앞에 박래군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의 수배 전단을 손에 쥔 경찰이 서 있다.

2009년 3월12일 희생자들의 주검이 있는 서울 순천향병원 영안실 앞에 박래군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의 수배 전단을 손에 쥔 경찰이 서 있다.

참사로 숨진 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씨의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글. 참사 당일 고인의 생사와 행방을 알아보려 유가족들이 분투한 흔적이 보인다.

참사로 숨진 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씨의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글. 참사 당일 고인의 생사와 행방을 알아보려 유가족들이 분투한 흔적이 보인다.

2009년 1월20일 새벽 경찰의 무리한 강제 진압으로 6명의 희생자를 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고 있다.

2009년 1월20일 새벽 경찰의 무리한 강제 진압으로 6명의 희생자를 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