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점점 짙어지는 ‘의혹의 그림자’

한상률 전 국세청장 ‘SD 아들 봐주기 세무조사’ ‘MB 대선자금 직보’ 의혹 잇따라…
본인 귀국 미루는데 검찰은 묵묵부답
등록 2009-12-11 01:26 수정 2020-05-02 19:25
국세청 내부 권력다툼에서 대통령 차명 보유 재산 의혹으로까지 번진 사건의 주인공 한상률 전 청장을 검찰은 왜 소환하지 않는 것일까. 한 전 청장이 지난 11월26일 미국 뉴욕주립대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안원구 국세청 국장이 제기한 의혹을 모두 부인한 뒤, 자신이 저술 중인 책의 서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 김지훈

국세청 내부 권력다툼에서 대통령 차명 보유 재산 의혹으로까지 번진 사건의 주인공 한상률 전 청장을 검찰은 왜 소환하지 않는 것일까. 한 전 청장이 지난 11월26일 미국 뉴욕주립대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안원구 국세청 국장이 제기한 의혹을 모두 부인한 뒤, 자신이 저술 중인 책의 서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 김지훈

‘한상률 게이트’의 몸집이 점점 부풀고 있다. 모든 의혹은 안원구 국세청 국장의 그림 강매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 비롯됐다. 국세청 내부의 권력투쟁이 빚어낸 안 국장 사건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튀었다. 안 국장의 잇따른 폭로로 현직 대통령의 숨겨진 재산을 둘러싼 의혹이 다시 불거졌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표적 사정’ 의혹도 키웠다.

충성심 인정받으려 세무조사?

12월2일에는 CBS 가 안원구 국장의 또 다른 문건을 입수해 소개했다. 한상률 전 청장이 재직 시절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의 아들 지형씨에 대해 세무조사를 지시한 의혹이 있다는 보도였다.

보도에 따르면, 한 전 청장이 2008년 초 이 의원의 아들 지형씨에 대한 세무조사를 서울의 한 세무서장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이 의원이 세무조사 사실을 알게 되자 한 전 청장은 자신도 모르게 진행됐다는 취지로 해명했다는 내용이었다.

정권 교체기였던 2007년 말부터 2008년 초 국세청장 유임을 위해 이상득 의원에게 줄을 대려 노력한 것으로 알려진 한 전 청장이 거꾸로 이 의원의 아들 세무조사를 지시한 사실은 쉽게 연결되지 않는 대목이다. 한 전 청장이 이 의원에게 로비를 시도했다고 폭로한 사람도 안원구 국장이었다.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통령직인수위 막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전 청장이 이지형씨 회사 세무조사를 지시한 뒤, 안 국장에게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득 의원에게 알려주라고 시켰다. 하지만 안 국장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한 전 청장이 ‘그럼 안 국장 당신은 빠져라’라며 다른 경로를 통해 이 의원에게 이 사실을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안 국장의 부인 홍혜경씨 이야기도 비슷하다. 홍씨는 12월2일 밤 과 만나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홍씨와의 일문일답이다.

-한상률 전 청장이 안원구 국장에게 이상득 의원의 아들 관련 세무조사 사실을 알린 일이 있나.

=그렇다.

-안 국장은 그 사실을 이 의원에게 전해주라는 한 전 청장의 지시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남편이 한 전 청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말고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한 전 청장이 사람을 보내 ‘이 의원의 아들 관련 세무조사를 하고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라’, 이런 취지로 지시를 내린 뒤 곧바로 다시 전화를 했다. ‘직접 전할 테니 안 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거부한 것이 아니다?

=남편은 세무조사 사실을 몰랐으니까 내용을 파악해야 알려주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말만 대신 옮기는 심부름꾼도 아니고, 내용도 모르고 어떻게 ‘걱정하지 마시오’ 이렇게 대뜸 전화할 수 있나.

-그렇다면 한 전 청장이 노린 건 뭐라고 보나.

=남편이 이지형씨와 친하니까 세무조사 사실을 알고 있는지 탐색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또 상대방을 봐주는 척하면서 신세지도록 하는 게 한상률 전 청장의 전형적 수법이다. 전자일 거라고 본다. 자기가 생색낼 수 있는 일을 안 국장에게 시키겠는가.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와 홍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한 전 청장은 이 의원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인정받기 위해 이지형씨 관련 세무조사를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신이 기획한 세무조사를 통해 이 의원의 약점을 확보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의원의 눈도장을 받기에는 충분한 소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전 청장의 유임이 확정된 2008년 3월 무렵 정치권 안팎에는 한 전 청장이 이지형씨 관련 세무조사를 무마해준 덕분에 이 의원의 눈에 들었다는 관측이 파다했다. 실제 세무조사가 이뤄졌는지 여부와 그 내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상률 전 청장은 또 2007년 대선 직후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에게서 “국세청이 만든 MB 파일을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정 의원은 당시 이상득 의원과 함께 여권 최고 실세로 알려져 있었다. 한 전 청장은 정 의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오히려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이상득 의원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정두언 의원의 MB 파일 요구건과 이지형씨 관련 세무조사 무마건 등을 통해 한 전 청장이 이 의원에게 깊은 신임을 받았다는 풀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어쨌든 한 전 청장의 유임이 확정된 것은 이런 일화가 모두 매듭지어진 뒤, 그러니까 2008년 3월 중순이었다.

국세청 직원 “ 그림 구입 지시받아”
송영길 민주당 최고위원이 지난 11월27일 당 확대간부회의에서 ‘한상률 게이트’와 관련한 서류를 들어 보이며 한 전 청장의 귀국을 촉구하고 있다. 민주당은 송 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한상률 게이트 및 안원구 국세청 국장 구속 진상조사단’을 꾸려 관련 의혹을 파헤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송영길 민주당 최고위원이 지난 11월27일 당 확대간부회의에서 ‘한상률 게이트’와 관련한 서류를 들어 보이며 한 전 청장의 귀국을 촉구하고 있다. 민주당은 송 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한상률 게이트 및 안원구 국세청 국장 구속 진상조사단’을 꾸려 관련 의혹을 파헤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2008년 태광실업 세무조사에서도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것이 야당과 안원구 국장 쪽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11월30일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한 전 청장이 태광실업 세무조사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한 내용 중에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이 대통령 쪽에 건넨 대선자금에 대한 부분도 포함돼 있다는 의혹이었다.

박 의원은 이날 국회 법사위에서 “국세청이 조사 당시 입수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여비서의 다이어리에는 이명박 대통령 쪽에 건너간 자금의 리스트가 있었는데, 한 전 청장이 이를 이 대통령에게 직보했다”며 “검찰에 넘겨진 리스트는 이명박 대통령 쪽으로 흘러간 자금 부분이 삭제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자신도 문제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또 한 전 청장의 유임 로비 의혹에 대해 “이미 정부에선 이상득 의원과 한 전 청장의 개인 문제로 정리했다”며 “현 정부 고위층이자 실세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박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한 전 청장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과정에서 현 정권의 약점이 될 만한 내용을 파악하고서도 이를 덮어버렸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무조사-약점 파악-무마-신뢰 형성’의 구조가 반복된 셈이다.

이렇게 하나하나가 메가톤급 이슈일 수밖에 없는 의혹들을 낳고 있는 한상률 게이트의 초점은 이제 의혹의 출발선인 한 전 청장을 다시 향하고 있다. 그가 인사 청탁의 대가로 전임 전군표 청장에게 그림 을 건넸다는 의혹을 뒷받침할 진술이 나온 것이다. 한 전 청장의 측근은 검찰에서 “한 전 청장의 심부름으로 학동마을 그림을 구입했고, 비용도 한 전 청장이 냈다”고 진술했다. 그림을 “본 적도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던 한 전 청장의 주장도 거짓이었다는 말이 된다. 미국에 도피 중인 한 전 청장을 검찰이 부르지 않고서는 꼬여가는 ‘그림 로비’ 의혹의 실체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형국이다.

검찰 ‘그림 로비’ 수사 시간 끄는 이유 뭘까

과연 한상률 전 청장을 국내로 불러들이는 것이 가능할까? 한상률 게이트의 본질, 혹은 한 전 청장이 그동안 벌인 로비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와 여론은 한 전 청장의 강제 귀국을 압박하고 있지만, 검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한 전 청장이 안원구 국장 이외에도 여러 라인을 통해 이상득 의원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며 “그가 미국으로 나간 것이나 그림 로비 의혹 수사가 지지부진한 것은 정권 최상층부의 묵인이나 방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당장은 ‘그림 로비’ 의혹이 수사의 대상이지만, 한 전 청장을 둘러싼 의혹은 그 밖에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한 전 청장의 뇌물수수 의혹이다. 일단 검찰에 구속돼 있는 안 국장이 “한 전 청장이 차장 승진 대가로 3억원을 요구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안 국장은 또 한 전 청장이 2008년 유임 확정 이후 전국 6개 지방국세청을 순시하며 인사 청탁과 금품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아직까지는 ‘돈 준 사람’이 직접 나서지 않는 상황이어서 안 국장의 일방적인 주장에 머무는 수준이지만 검찰이 마음만 먹는다면 사실관계 확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안 국장 등의 주장이다.



숨고르기 들어간 민주당
역풍 우려해 치밀한 자료 검증에 집중


예기치 못한 제동이 걸린 걸까, 의도적인 숨고르기일까? 민주당이 조용하다. 안원구 국세청 국장이 구속된 지 일주일 되던 날인 지난 11월25일 민주당은 ‘한상률 게이트 및 안원구 국세청 국장 구속 진상조사단’(이하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이날 오후엔 안 국장 사퇴 종용과 관련한 녹음 파일 12개를 언론에 즉각 공개한 데 이어, ‘이명박 대통령 도곡동 땅 실소유 의혹’ ‘태광실업 기획 세무조사 의혹’ ‘한상률 전 국세청장 연임에 이상득 의원 연루 의혹’ 등을 연일 제기하며 여권을 향해 총공세를 펴는 듯했다.
하지만 12월로 넘어오면서 민주당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진상조사단장인 송영길 최고위원의 기자간담회도 열리지 않았다. 이런 변화는 ‘BBK 학습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 때 숨가쁘게 이명박 대통령의 BBK 연루 의혹을 제기했지만, 끝내 검찰이 무혐의로 결론을 내리면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엔 안 국장이 한 전 청장에게 ‘원한’을 품은 상황에서 터져나온 폭로라, 섣불리 안 국장의 ‘입’만 따라갔다간 ‘허무 개그’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한상률 게이트’가 4대강 사업과 세종시 문제 등 극도로 민감한 현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전선’을 복잡하게 만들고, 당의 공격력을 떨어뜨린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깔려 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도곡동 땅 실소유주가 이 대통령이라는 의혹과 관련한 안 국장의 문건을 확보하고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안 국장은 포스코건설 내부 자료를 바탕으로 A4 용지 10여 장 분량으로 이런 내용의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쪽은 “안 국장이 작성한 자료 자체가 원래 이건지, 아니면 우리에게 다 안 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문건은 ‘이 대통령이 도곡동 땅 주인’이라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수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안 국장이 넘긴 자료의 신빙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도 된다.
현재 진상조사단은 안 국장에게 건네받은 파일을 분석하는 팀, 도곡동 땅 실소유 관계를 규명하는 팀, 한 전 청장과 권력기관 관련 의혹을 규명하는 팀 등 세 팀으로 나눠져 있다. 진상 규명 속도는 더뎌 보인다. 민주당 관계자는 “안 국장에게 받은 자료의 등장인물만 수십 명이다. 일일이 접촉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관련 자료를 분석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더구나 한꺼번에 터트리면 관련 인물이 ‘입단속’을 당하거나, 우리 조사 자료가 사건을 덮는 데 역이용될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국장이 포스코건설의 도곡동 땅 관련 문서를 발견한 뒤 ‘보안 유지’를 지시했다는 장승우 전 대구지방국세청 조사1국장과 나눈 대화의 녹음 파일은 전문가까지 동원했지만 아직 다 분석하지 못했다. 녹음 상태가 나빠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게 민주당 쪽 설명이다. 민주당은 우선 이 파일 분석 내용을 바탕으로 도곡동 땅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기사 누락 경위, 국세청 내부 권력다툼, 한상률 전 청장 관련 의혹을 순서대로 파헤칠 계획이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