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4일 노조의 파업 철회로 일단락된 철도 파업의 불씨는 코레일(철도공사)의 일방적인 단체협약 해지였다. 철도 노사가 임금체계 개편 등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이던 11월24일 밤, 코레일은 갑자기 단체협약 해지를 통보했다. 이에 따라 철도 노사는 앞으로 새로운 단체협약이 체결되지 못할 경우 6개월 뒤인 내년 5월24일 이후 단체협약이 없는 사업장이 된다. 이른바 ‘무협약’ 상태라는 초유의 사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사태 전개 과정으로 볼 때 노조가 완전 항복을 선언하지 않는 한, 코레일은 새로운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노사 교섭을 질질 끌 것이고 결국 무협약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단협 해지 기원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철도를 비롯해 공공부문마다 ‘신종 노동 인플루엔자’가 대유행하고 있다. 바로 사용자 쪽의 일방적인 단체협약 해지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공공부문 사용자들은 지난해 말 이후 노사가 맺은 기존 단체협약을 줄줄이 해지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이 새로운 ‘기획상품’은 공공부문을 필두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면서 민간부문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
단체협약 해지의 기원은 19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32조는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을 2년으로 정하고 있는데, 통상 단체협약에는 ‘새로운 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기존 협약의 효력이 지속된다’는 별도의 약정을 두고 있다. 기존 협약이 만료된 뒤에도 노사 협상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19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때 새로이 도입된 32조의 단서 조항이 문제다. 이 단서 조항은 위와 같은 별도의 약정이 있더라도 당사자 일방이 협약 해지를 통고할 수 있도록 했다. 통고 시점에서 6개월이 지나면 종전의 단체협약은 효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애초 이 조항이 도입될 때는 효력 만료 시점을 3개월 이후로 정했다가, 1998년 2월 재개정 때 6개월로 바꿨다. 변동하는 사회·경제적 여건을 단체협약에 적용하고 교섭의 장기화를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6개월 전 통보에 의한 단체협약 해지권’이 도입된 것이다.
민주노총 이수봉 대변인은 “도입 이후 단체협약 해지 사태가 거의 없었고 노사 일방 어느 쪽이라도 기존 단체협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 쪽에 크게 불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러나 지금 이명박 정부 들어 사용자들이 단체협약 해지권이라는 무기를 일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철도와 한국노동연구원 사태 등이 보여주듯, 공공부문 사용자마다 기존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이 만료되면 기다렸다는 듯 즉각 단체협약 해지권을 발동하고 있다. 단체협약이 해지되면 노사관계는 어떻게 될까? 임금·근로시간 등 개별적 근로조건에 관한 기존 단체협약 조항은 효력이 지속되지만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된 모든 조항은 협약 종료와 함께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무단협 상태가 되는 즉시 노조 전임자에 대한 현업 복귀 명령과 노조사무실 폐쇄, 조합비 원천징수 중단 등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단체협약 해지는 노동조합 활동 중단을 뜻하고, 무단협 상태에서 노사관계는 격렬한 파열음을 내며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왜 그럴까? 단체협약은 노사 간의 자치 규범이자 계약이다. 따라서 단체협약이 해지되면 노사 간의 신뢰는 금방 무너지고 분쟁 국면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한국노동연구원 사태에서처럼 사용자 쪽은 ‘단체협약 해지 통보→불성실 교섭→무단협 사태’로 끌고 가고 있다. 이상훈 민주노총 정책부장은 “정부 주도의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단체협약 해지는 복수 노조 및 전임자 임금 금지와 연계해 기존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포석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1조는 “헌법에 의한 노동3권을 보장하고… 노동관계를 공정하게 조정하여 노동쟁의를 예방·해결함으로써 산업 평화의 유지와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한다”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 정부의 공세적이고 도발적인 단체협약 해지는 오히려 산업 평화를 깨고 분쟁을 촉발하고 있다.
과거에는 자본이 노조 파괴자나 깡패를 동원해 노조 와해에 나섰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가 적극적인 노조 파괴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번에는 깡패가 아니라 치밀하고 세련된, 그러나 ‘극악한 신종 노조 탄압’ 수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노사관계를 파행으로 몰아가면서 이렇듯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하는 이유는 뭘까? 노사분규 비중에서 단체협약 관련 쟁의의 비중이 임금 인상 관련 쟁의보다 더 많아진 건 1995년부터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임금 인상 위주에서 점차 탈피해 경영 참가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사회적 의제를 주요 요구사항으로 내걸면서 단체협약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단체협약 파괴자’로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노조의 사회적 역할이 커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단체협약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사실 단체협약은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헌법’으로 산업 민주주의의 요체다. 단결권과 단체행동권도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민주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매년 방대한 분량의 단체협약 체결지침서를 만들어 각 회원사와 노동조합에 내려보내고 있다. 그만큼 노사관계의 성과를 집약해놓은 결정체가 단체협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노동부가 작성한 ‘단체교섭 및 단체협약 체결 관련 지도지침’은 “단체협약 유효기간과 관련해 당사자 일방이 6개월 전까지 상대방에게 사전 통고하면 종전의 단체협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노동부의 지도지침은 사실상 단체협약 해지권 조항을 적극 활용해 무단협, 즉 ‘노동조합이 활동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대다수 노동조합은 외환위기 이후 자본과 정부의 공세에 맞서 그동안 싸워서 쟁취해놓은 성과물이라도 지키는 것이 지상 과제다. 이명박 정부가 단체협약 해지권을 앞세워 노동조합 와해를 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이 구속·수배와 가압류·손해배상까지 감수하면서 그나마 얻어낸 작업장의 민주적 제도들(단체협약 조항)까지 한순간에 날려버리겠다는 계산이다. 정부가 표방하는 ‘공공부문 선진화’의 맨 앞줄에 노조의 인사·경영권 참여 삭제가 들어가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의 진두지휘로 정권 차원 총공세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경우 지난해 11월부터 서울을 필두로 충북·울산·경북·부산 등 지역 교육청들이 교원노조와 맺은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고 있다. 전교조와 각 지역 교육청이 맺은 단체협약에 △학교운영위원회 활성화 등 학교의 민주적 의견 수렴 절차 보장 조항 △학부모 교육비 경감을 위한 수학여행·교복 구매시 학교운영위원회 심의 관련 조항 등 지난 10년간 교육 민주화 운동의 성과물이 들어가 있는데, 교육청은 단체협약 해지를 이용해 이를 한 방에 무너뜨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유연화 속에서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항상 ‘불만의 겨울’을 맞아왔다. 그러나 역대 정권에 비해 올겨울은 분명히 뭔가 다른 점이 있다. 전례 없이 대통령이 맨 앞에 서 진두지휘하면서 정권 차원의 총공세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법상의 단체협약 해지권 조항 자체가 악용되고 있기도 하지만, 대통령이 공격적으로 직접 움직이면서 노동조합들이 투쟁으로 따낸 단체협약마다 무기력하게 그 효력을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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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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