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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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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책임 추궁당한 ‘금융계의 검투사’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
2년 전 파생상품 투자로 1조6천억원 손해 끼쳤다며 중징계 받아
등록 2009-09-17 16:18 수정 2020-05-03 04:25
황영기 KB 금융지주 회장.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황영기 KB 금융지주 회장.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금융위기의 덫에 걸렸다. 덫은 바로, 전세계 금융회사로 팔려나간 미국발 파생상품이었다.

금융위기 주범인 CDO와 CDS에 투자

금융위원회는 9월9일 황 회장에 ‘직무정지’라는 중징계를 확정했다. 금융권 최고경영자에게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징계가 내려진 것이다. 앞서 금감원은 “우리은행이 2005~2007년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 등 파생상품에 15억8천만달러를 투자할 때 관련 법규를 위반했고, 여기에 황 회장의 책임이 큰 것으로 판단해 이같은 제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우리은행은 투자액의 90%인 1조6200억원의 손실을 봤다. 황 회장 쪽은 “2007년 3월 퇴임할 때까지 이 상품들은 정상적인 가격에 수익을 내고 있었고 손실이 나게 된 것은 2007년 하반기 이후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정상적인 투자였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어쨌든 황 회장은 금융위기의 진원지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CDO와 CDS가 어떤 파생상품이기에 그의 발목을 잡았을까?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보자. 미국발 금융위기의 한가운데엔 탐욕이 웅크리고 있었다. 월가의 천재들이 주목한 곳은 미국의 주택시장이었다. 부시 정부는 주택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부동산 대출 관련 각종 규제를 없앴다. 그러자 모기지 대출업체들은 소득이 불분명하고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집값의 90%나 되는 돈을 빌려주었다. 저금리에 사람들은 이자 부담 없이 마구 돈을 빌렸다.

주택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해준 모기지 업체는 채권을 투자은행(IB)에 팔았다. 투자은행은 모기지와 함께 카드·자동차·기업·학자금 등을 담보로 발행된 다른 대출채권을 뒤섞어 부채담보부증권(CDO)이라는 합성상품을 만들어 헤지펀드나 보험사, 다른 투자은행 등에 다시 팔았다.

무디스나 스탠더드&푸어스 같은 신용평가기관은 정크본드에 가까운 파생상품에 최고위 등급인 AAA나 AA를 부여했다. 월가와 유착한 이들은 파생상품에 실제 이상의 등급을 주었고, 높은 신용등급이 다시 해당 상품의 거품을 부풀리는 악순환으로 작용했다.

파생상품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CDS도 한몫 했다. CDS는 빌려준 돈이 떼일 것에 대비해 드는 보험이라고 할 수 있다. CDS는 미국 정부의 규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증권이 아니어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권한 밖에 있었다. 보험과 유사하지만 일반 보험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보험업 규제도 받지 않았다.

금융당국의 제재가 황영기 회장 한 명의 희생을 통해 나머지 관련자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다는 음모론도 흘러나온다. 2004년 3월~2007년 3월에 황 회장이 우리은행에서 일할 당시 재정경제부와 금감원도 국내 은행들이 파생상품 투자 등 IB 업무를 강화해야 한다고 은행 등을 밀었다.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는 2007년 은행장 간담회에서 “대출에만 매달리지 말고 IB로 변신하라”고 재촉했다.

정부도 투자은행 탈바꿈 권유해놓고…

이런 분위기에서 ‘검투사’ 황 회장의 과감한 투자도 이뤄졌다. 은행의 건전성을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 당국은 이를 방관한 뒤 뒷북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금감원은 2007년 6월 우리은행 종합검사 때는 파생상품 투자와 관련한 법규 위반 내용을 적발하지 못했다가 올해 6월 검사에서는 위험관리 규정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황 회장이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졌을 때는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다, 황 회장이 내부 ‘파워 게임’에서 힘을 잃으면서 금융감독 당국이 뒤늦게 징계에 나섰다는 비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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