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펀펀하게 뻔뻔하게

사장님은 권위 파괴, 직원들은 상상 플러스… 펀 경영 넘어 펀 혁신으로
등록 2009-01-22 14:30 수정 2020-05-03 04:25

어려운 시기를 만나면 기업들은 비장해진다. 최고경영자의 얼굴은 굳어지고, 복리후생 제도는 비용 감축을 이유로 축소된다.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직원은 동료들에게 눈치를 받기도 한다. 혹한기를 맞은 대다수 기업들이 선택하는 ‘엄숙한 태도’는 정말 바람직한 것일까. 인사컨설팅업체 휴잇어소시엇츠의 김용성 상무는 “불황일수록 재미있는(Fun) 조직의 생존력이 훨씬 강하다”고 단언한다. 왜일까. “힘든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노동요와 흑인영가가 나왔듯, 일이 고될수록 동료들끼리 농담을 나누면서 즐겁게 일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울 서초동 버그테스트 사옥에서 노성운 사장(가운데)과 CFO(Chief Fun Officer) 역할을 맡고 있는 직원들이 재미있는 모자와 가발을 쓴 채 활짝 웃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서울 서초동 버그테스트 사옥에서 노성운 사장(가운데)과 CFO(Chief Fun Officer) 역할을 맡고 있는 직원들이 재미있는 모자와 가발을 쓴 채 활짝 웃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CFO는 ‘최고 재미 책임자’

프로그램 테스트 전문 기업인 버그테스트의 노성운 사장은 “행복하니까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다른 회사 사람들이 한 번 웃을 때 자사 직원들은 3~5번 웃게 만드는 게 자신의 미션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사장실 앞에는 “뻔뻔하세요”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펀펀’(FunFun)해지라는 말이다. ‘뻔뻔’과 ‘펀펀’은 어떻게 통하는 것일까.

자사 직원들이 파견 나가 일하는 현장인 고객 회사 ‘사이트’를 찾아갈 때 노 사장이 차려입는 복장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2007년 여름 그는 사이트 방문에 나서며 하와이 원주민 복장에 장난감 기타를 가지고 갔다.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런데 고객사 직원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대부분이 박수를 치는가 하면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하느라 분주했다. 점잖아 보이는 중년의 경영자가 중고생들이 친구들과 스티커 사진을 찍을 때 쓰는 빨강머리 가발을 쓰고 과장된 땡땡이무늬 티셔츠까지 입었으니 그럴 만했다.

물론 항상 성공을 거두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규율을 강조하는 엄숙한 조직문화를 가진 굴지의 정보기술(IT) 기업에 그런 복장으로 찾아갔을 땐,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보고 우르르 달려온 경비직원들에 떠밀려 화물용 엘리베이터로 쫓겨나야 했다. 고깔모자와 뿔피리로 무장하고 찾아간 한 인터넷 포털 업체에서는 주차장 진입을 거부당했다. 잡상인 취급을 받은 것이다. 초창기에는 회사 직원들 중에도 “우리 사장 왜 저러나, 부끄럽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회사에는 팀마다 ‘CFO’(Chief Fun Officer)라는 직책이 있다. 직역하면 ‘최고 재미 책임자’쯤이 되겠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팀원들이 즐거워할까 항상 고민한다. 팀원들의 의견을 모아 어떤 활동을 벌일지 결정하고, 회사에서 내려온 ‘펀펀’ 자금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각 팀이 벌이는 활동은 다양하다. 팀원들이 모두 로또를 사는 ‘로또데이’, 모두 쫙 빼입고 회사에 출근하는 ‘정장데이’ 등 팀원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묻어나게 할 아이디어들을 궁리해낸다. 뭐 대단한 프로그램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일 끝내고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라도 좋다.

이 회사는 왜 이런 별난 시도를 하게 된 것일까. 노 사장이 ‘뻔뻔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은 2006년 말. 프로그램 테스트를 하는 업무의 특성상 사원 대부분은 10명·20명씩 팀을 나눠 테스트를 맡긴 기업에 파견을 나가 일한다. 회사에 대한 소속감이 떨어지고, 잦은 이동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1년이면 5명 중 하나는 회사를 떠날 만큼 직원들은 마음의 닻을 내리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이직률을 낮출까 고민한 끝에 노 대표는 이런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뻔뻔 프로그램은 통했다. 사원들끼리 뭉치게 되고, 사장과도 자주 스킨십을 나누게 되니 소속감이 커졌다. 이직률은 5% 미만으로 떨어졌다. 딸림 효과도 있었다. 고객사 가운데 버그테스트 직원들의 ‘쾌활함’이 그리워 다시 일을 맡긴다는 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회사의 성적표도 좋다. 한국기업데이터의 기업분석보고서를 보면, 2005년 5억원이던 매출은 2006년엔 16억원으로 늘었고, 2007년엔 1~3분기 동안만 치더라도 20억원에 이른다. 회사는 매출액의 3% 정도를 각 팀의 ‘뻔뻔’ 활동을 위한 군자금으로 쓴다. 노 대표는 “솔직히 올해 수주액이 급감하는 등 창사 이래 최악의 경영환경을 맞고 있지만, ‘뻔뻔 활동’ 지원은 조금도 줄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회사 안에 다양한 ‘펀스테이션’ 마련

여행·레저 업계에서 ‘펀 경영’의 간판으로 꼽히는 기업은 ‘여행박사’다. 환율 급등과 경기 악화로 최악의 계절을 맞은 게 사실이지만, 여행박사 직원들의 웃음까지 뺏어가지는 못했다. 사무실 곳곳에는 임직원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다. 음료와 술이 거의 무료로 제공되는 ‘야스미’라는 이름의 카페와 회의실 겸 노래방, 숙직실, 체력단련실 등은 경제 한파에 지친 직원들을 보듬어주는 공간이다.

회사는 창업 초기 어려울 때부터 ‘가족’ 같은 조직문화를 강조했고, 규모가 커진 지금도 여러 제도를 도입해 이런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탄력근무제의 경우가 그 한 예다. 직원이 20~30명이던 시절에는 늦게까지 일한 다음날 늦게 출근하는 제도였다. 그러다 직원 수가 200명을 넘어 규율과 통제가 필요해지면서 없어졌는데, 2007년 노사가 의기투합해 부활시켰다. 자신도 탄력근무제 덕에 신혼 시절 오전 10시 출근 저녁 7시 퇴근을 해보았다는 박혜경 해외마케팅팀 대리는 “대기업에서도 결혼하거나 출산한 뒤 직장 다니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에선 그런 어려움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펀 경영’이 짧은 역사의 벤처기업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리온은 지난해 초부터 ‘초코파이 밴드’란 사내 음악 동아리를 지원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내 행사의 ‘분위기 메이커’로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 회사에는 닌텐도 위 게임기와 미니 당구대, 만화책 등이 갖춰진 ‘펀스테이션’이 조성돼 심신이 지친 직원들에게 활력을 제공해준다. 보안서비스 업체 ADT캡스는 잘 노는 직원을 만들기 위해 스포츠를 통한 펀 경영을 추구하는 사례다. 회사는 2005년부터 직무 교육과 스포츠를 결합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모든 직원은 매년 최소 두 차례 이상 입소해 승마·수상스키·스노보드 등을 배운다.

참여율 낮은 일회성 행사는 실패

세계적으로 펀 경영이 유행하는 것은 웃음이 조직문화를 활기 있게 만들고 생산성까지 높인다는 사례가 다양하게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펀 경영을 제대로 하려면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펀 경영을 도입한 기업들 중 고리타분한 일회성 행사만을 운영하다가 실패한 사례가 많다. 어떤 이벤트를 벌일 것인지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해 정한 경우가 성공률이 높다.

‘펀’은 쉽고도 어려운 경영기법이다. 어떻게 해야 펀 경영을 안착시킬 수 있을까. 마침 조언을 구할 만한 좋은 한국인 강사가 있다. 석·박사 학위가 없으면서도 펀 경영 강의로 실리콘밸리와 세계 곳곳의 기업들을 사로잡은 한국인 진수 테리(52)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그는 펀(FUN)에 ‘신나게’(Fun), ‘독창적으로’(Unique), ‘보살펴라’(Nurturing)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풀이한다. 펀 경영은 스스로 권위를 버리는 데서 출발하는데, 잘못했을 때 인정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스스럼없이 요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설명도 따른다. 또 펀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리더 스스로 웃음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는다. 사장님이 뒷짐을 진 채 무게를 잡으면서 직원들에게 펀한 회사를 만들어줄 수 없다는 뜻이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