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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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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제사가 같은 마을

등록 2008-09-05 00:00 수정 2020-05-03 04:25

128명이 학살당한 경남 산청군 시천면·삼장면, 주민들이 돌아본 학살의 기억

▣ 산청=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빼가지(뼈)나 올케 나오겠나?”

임남수(81)씨의 말에는 한가닥 기대가 섞여 있었다. 지난 8월26일 경남 산청군 시천면 동당리 큰길에서 연결된 산길을 따라 25분을 걸어올라가니 4평쯤 되는 컨테이너 한 동이 나왔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임씨가 컨테이너 안에 몸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앉아서 혼자 하루를 보내는 곳이다. 임씨는 녹내장으로 오른쪽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다. 그는 1949년 국군의 총탄에 남편을 잃은 뒤 아들과 힘겹게 살아왔다. 임씨에게 남은 건 하동에서 막일을 하는 손자와, 지난해 숨진 아들이 마련해준 이 컨테이너집뿐이다. 그래도 유해 발굴이 되고 있다고 하니, 남편의 유골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보는 것이다.

“서운해서 해골로라도 보고 싶어”

경남 산청군 시천면·삼장면 등 두 곳에서는 1949년 7월부터 1950년 1월 말까지 모두 128명이 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11월20일 이 사건을 진실 규명한 데 이어, 올해는 이 지역을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우선 사업장으로 정해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근 원리에서 유해 발굴이 시작된다는 말에 임씨는 7살 많은 남편이 죽던 날을 떠올렸다. 나이 차이 때문인지 자신에게 무척이나 잘해주고 허물도 덮어주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7월이었재. 갑자기 군인들이 우리 삼당마을에 와서는 집집마다 3명씩 나오라 캐. 남자들은 다 나오라 캐서 끌고 갔지. 끌고 가고 나서도 며칠을 오늘 오낑가 내일 오낑가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생전 안 오대. 그날이 마지막이야. 인자 이래 빼를 찾는다카니 해골로라도 볼 수 있을라나. 그날 그때부터 입때까지 혼자 살았재. 너무너무 서운해서 해골로라도 보고 싶어.”

남편 이세우씨가 인근 원리로 끌려가 숨진 1949년 7월18일이 집단 학살의 첫날이었다. 국군 3연대 2대대는 이날 지리산 유격대 토벌작전을 펼치던 중 1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군인들은 화풀이를 마을에 했다. 곧장 삼당마을로 와 이씨를 포함해 마을의 젊은이 27명을 모조리 모아 인근 신천국민학교와 덕산국민학교(현 덕산중학교)에 데려갔다. 그러고는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숨진 이들은 대부분 땅 파먹고 살던 농부였다. 그뿐이 아니다. 마을 전체를 불살랐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집이 불타던 날은 아들이 태어난 지 딱 두 달 되던 때다. 임씨는 갓난아기를 둔 22살 어린 엄마였다. “불 지르기 전에 다 나오라 카대. 와 그라는지도 몰랐는데 우선 겁이 났어. 우리 얼라를 들쳐업고 뭐 좀 집어서 나올라 카는데, 군인이 총부리로 등을 딱 때렸어. 그때 맞아가꼬 내가 지금도 등을 똑바로 못 핀다 아이가.”

임씨의 오그라든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그가 급하게 밖으로 나오자마자 군인들은 집을 불태웠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나. 그 3연대 군인들이 전라도에서 와서 그런가, 우리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기라.” 집이 홀랑 불타는 바람에 남편 유품 하나 챙기지 못했다.

옆마을 원리에서는 그로부터 나흘 뒤인 7월22일에도 대규모 학살이 이뤄졌다. 국군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끌어내 모두 100여 명의 사람들을 덕산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원리 이장이던 정태인씨도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날 모두 78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학교 뒷산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주검들 주변을 개들이 맴돌았다. 당시 16살이던 김상수씨는 “개들이 온통 시신에서 물어온 옷가지들을 물고 다녔다”고 말했다. 당시 6살이던 정태인씨의 아들 맹근(65)씨는 “덕산국민학교가 당시 3연대 주둔지였기 때문에 감히 무서워서 시신을 수습하러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7월마다 100여 집이 한꺼번에 제사를 지내던 터라 1960~70년대만 해도 장날이 되면 제수 음식이 다 떨어져서 아침 일찍 장에 가느라 분주했다”고 말했다.

경남대 발굴단, 두 곳 발굴 중

같은 날 끌려갔다가 살아나온 김종술(87)씨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에 다 꿇어앉히더라고. 그 다음에 빨갱이한테 쌀 준 사람, 짐 든 사람 손을 들래. 그 다음에는 군인·경찰 가족 손을 들래. 그렇게 사람들을 분류했어. 양심적으로 손 들면 죽는 거야. 그날 나는 일하다가 끌려와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있었어. 군인들이 귀신이 들렸나. 분류하는 과정에서 나이 든 어르신 세 분이 앉아 있는 곳으로 나를 휙 밀대. 아무것도 모르고 거기 앉아 있는데, 노인들은 가래. 그래서 나도 보내주대. 그때만 해도 그렇게 다 죽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이요.”

정갑조(86)씨의 19살 시동생도 바로 그날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정씨는 시동생이 둘째형수인 자신을 유독 잘 따랐다며 눈물을 지었다. 정씨는 “그때 결혼도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온 동네가 영혼 결혼식을 시켜줬다”며 “마을 전체가 매일매일이 제삿날”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집단 학살 뒤로도 마을 젊은이들이 매일 한두 명씩 학살을 당하던 공포의 시대였다. 초등학교, 마을 뒷산, 농회 창고 뒷산, 중산리 계곡, 마을 앞 논 등 마을 전체가 ‘살인’의 무대였다. 이 학살 현장 가운데 주검이 묻혀 있을 만한 두 곳을 현재 경남대 발굴단이 발굴하고 있다. 이미 덕산중학교 뒤쪽 산에서 4구의 유골을 찾았다. 이상길 경남대 교수는 “유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마을 여기저기가 과수원, 주택, 도로 등으로 바뀌어서 발굴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지만, 열심히 찾고 있다”고 말했다.

‘진실 규명’ 이후 해야 할 일

진실 규명이 이뤄진 원리에서 이제 필요한 것은 유해 발굴과 그에 이은 후속 조처다. 정창일 산청·시천·삼장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은 “진실 규명도 참 고마운 일이지만, 이제 그럼 유족들이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할 것 아니냐”며 “유족들이 매년 가신 원혼을 달래고 자기 한도 풀 수 있도록 돌아가신 분 위패를 만들고 위패를 둘 수 있는 위령공원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맹근씨는 어머니 얘기를 들려줬다. “어머니는 아직도 마음이 아파서 아버지 제삿날이면 방에 꼭 들어가 계십니다. 아직도 원통한 거라. 다른 건 다 태우고 아버지 저고리 하나만 갖고 있는데 그걸 꼭 관에 넣어달라고 하십니다. 그거 들고 저승에서 만날 끼라고.”

진실 규명만으로는 국가 폭력에 느닷없이 가족을 저승으로 떠나보낸 유족들의 원망을 달랠 수 없다. 유해를 발굴하고 그 유해를 편안한 곳에 안치한 뒤 위령사업을 하는 등 ‘진실 규명 이후’가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돼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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