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의학센터 시신보관실 157구는 12년째 방치돼… 관련 법 없어 진실화해위 활동 완료되면 안장은 오리무중으로
▣ 산청·청주=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깊이 1m도 채 되지 않는 구덩이 속에 유골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두개골은 모두 땅바닥에 엎어져 있고 모양이 확인되는 팔뼈는 하나같이 골반뼈 위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꺾여 있다. 녹이 슨 탄피 22개도 구덩이 옆과 뒤쪽에 모아져 있다. 참혹한 학살의 현장, 이 구덩이에만 23구의 유골이 흙과 돌 아래에서 잠자고 있었다.
수백명 총살, 소문이 진실로
8월25일 오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지리산 자락의 이 작은 마을 앞산 중턱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안병욱)의 유해 발굴 중간 결과 브리핑이 열렸다. 지난 7월18일 발굴이 시작된 이곳에서만 모두 230여 구의 유골이 나왔다. 발굴 책임을 맡고 있는 이상길 경남대 교수는 “유골들이 마구 겹쳐져 있는 것이, 사살한 뒤에 따로 매장한 게 아니라 일부러 판 구덩이에서 바로 총살한 뒤 그 위에 돌과 흙을 덮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산청군 외공리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진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발굴된 유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고 왜 죽었을까? 때는 찬바람 속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마을 주민 공인호(86)씨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버스 12대와 장갑차 1대, 지프차 1대 그리고 군용트럭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봤다. 비녀를 꽂은 여성, 지퍼 달린 개량 바지를 입은 남성, 흰 광목천 옷을 입은 남성 등이 내렸다. 이들이 총을 든 군인들을 따라 산길을 올라간 지 1시간이나 지났을까, ‘드르륵, 탕탕’ 총성이 들렸다. 다시 산을 내려온 군인들은 차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단서는 여기까지다. 발굴 현장에서 비녀와 옷핀, 단추 등 유류품이 나왔지만 유골의 정체를 밝힐 만한 것은 없었다. 노용석 진실화해위 조사총괄과 팀장은 “230여 명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 시골마을까지 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고 흙 속에 묻혀야 했는지에 대해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나오기를 바랐지만, 이번 발굴에서도 마땅히 이들의 신원을 추적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국가 폭력에 의한 집단적인 희생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가 이들을 60년 가까이 땅속에 방치해놓은 탓에 이제는 학살의 진실을 찾고 그들의 원혼을 달랠 길마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국가의 직무유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발굴 작업이 계속되면서 유해들이 속속 햇볕을 보고 있지만, 발견된 유해들은 여전히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튿날 찾은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유해감식센터. 학교 정문에서도 15분을 걸어들어가야 하는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감식 장비들로 가득할 줄 알았던 센터 한쪽에 흰색 반투명 플라스틱 상자 240여 개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유골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기에 관 대신 투명한 박스를 선택한 것이다. 어떤 상자에는 유골 1구가 온전히 들어가 있는가 하면 두개골, 척추, 치아 등 부위별로 추려서 모아놓은 상자도 있었다.
유골들은 모두 지난해 진실화해위가 전국 4곳에서 발굴한 것이다. 충북 청원 분터골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118구를 비롯해 경남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죽임을 당한 보도연맹원 및 대구형무소 수감자 107구 등 모두 273구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여기엔 전남 구례 봉성산과 대전형무소 학살 피해자들의 것도 포함돼 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유해들은 이미 지난 2월 감식작업이 모두 끝나고 보고서까지 작성됐지만, 한국전쟁 기간 중 희생된 민간인 유해를 안치할 국가 시설이 없어 6개월째 이곳 감식센터에 놓여 있다.
12년 전 유해는 신원 확인도 어려워
여기에 8월25일 산청에서 발굴된 230여 구의 유해와 올해 들어 청원·경산에서 추가로 발굴된 170여구 등 400여구의 유해들도 이곳 충북대 감식센터로 옮겨올 예정이다. 이들 유해까지 합하면 충북대 감식센터에는 670여구의 유해들이 방치 상태로 놓여있게 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렇게 갈 곳 없는 유해들이 각지에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 법의학센터 시신보관실에도 157구의 민간인 희생자 유해가 12년째 보관되고 있다. 1950년 9월 국군이 경기 고양·파주지역을 수복한 뒤 10월9~31일에 지역 주민 가운데 북한군 점령 시기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이들을 연행해 모두 총살했다. 고양시 유족회는 1995년 자체적으로 처형지를 발굴해 157구의 유골을 수습해 서울대에 감식을 의뢰했다. 당시는 발굴에 대한 전문적 기술이 없던 때여서 유해들은 개체별로 수습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유전자 검사를 통해 희생자 신원을 확인하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다. 지난해 진실화해위가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가 사과할 것, 서울대 법의학 교실에 안치된 유해를 영구 봉안할 수 있도록 시급히 조처할 것 등을 권고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인 상태다. 결국 항온·항습 시설 등 적절한 보관 설비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은 이 곳에서 유해들은 12년째 풍화작용을 일으키며 썩어가고 있다.
이밖에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집단 학살됐던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2003년 발굴된 163구는 현재 경남대의 컨테이너에 안치 중이다. 이 유해들은 경남대와 시민사회단체가 자체 발굴한 것으로 마땅히 둘 데가 없기 때문이다.
이송덕 서울대 의대 교수(법의학)는 “지난 12년 동안 계속 문제 제기를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국가적으로 희생당한 이들의 유해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결국 1995년부터 2008년 현재까지 발굴된 990여 구의 민간인 희생자 유해가 갈 곳이 없는 상태로 여기저기 임시보관돼 있거나 방치돼 있다.
이들 유해가 누구인지 밝혀질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까. 진실화해위는 확실한 유족이 존재하고, 희생자의 연고 지역이 특정돼 있고, 발굴된 유해의 상태가 양호한가 등을 따져 유전자 검사 여부를 결정한다. 유전자 확인을 할지는 진실화해위의 결정에 따르기로 유족들도 합의를 마친 상태다. 개별 유해를 유족에게 찾아주는 것보다 국가로부터 학살에 대해 사과받는 게 중요하고, 개별 보상보다 위령사업을 통해 희생자 모두의 한을 풀 수 있기 바란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임시안치소 둘 수 있는 기간 3년
진실화해위는 유해를 충북대 감식센터 안에 언제까지고 놓아둘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감식센터 위층에 임시안치소를 설치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다. 9월 말이면 마무리될 예정인 임시안치소에는 3천여 구의 유골을 안치할 수 있다. 유골의 부패를 막기 위해 항온·항습 시설도 갖출 계획이다. 그러나 임시안치소에 둘 수 있는 기간도 3년에 불과하다. 3년 뒤에는 이 유해들을 어디에 둘 건지에 대해 결정된 바가 전혀 없다.
죽임을 당한 것만으로도 억울한 이들 유해가 진실화해회의 ‘진실 규명’ 결정을 받고도 푸대접을 받는 것은 유해 발굴과 안장을 위한 관련 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유해 발굴이 이뤄지는 것은 진실화해위의 ‘실지조사’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별도로 유해 발굴을 뒷받침하는 법적 근거는 없다. 또한 진실을 캐기 위한 발굴 작업이야 어떻게든 이뤄진다 해도 수습된 유해를 진실화해위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은 발굴 작업 뒤의 위령 사업 및 피해자 보상과 관련해 과거사역사재단을 만들어 논의할 수 있다고만 규정할 뿐, 과거사역사재단을 언제 어떻게 만들 것인지, 비용은 어떻게 댈 것인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과거사에 대한 정권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고 관련 논의가 이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 상태로 2010년 4월 진실화해위의 활동시한이 만료되면, 더 이상의 진실 규명은 물론 그때까지 발굴된 유해의 안장, 이후 유족의 위령사업 등도 모두 오리무중 상태에 빠지게 된다.
피해 유가족들로서는 애가 탈 노릇이다. 충북 청원 분터골 사건 때 당시 27살이던 아버지 박종철씨가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희생당한 박남순(64)씨는 “당시 아버지는 ‘내가 지은 죄도 없는데 금방 다녀오겠다’며 쌀 세 되를 들고 나가신 뒤 돌아오지 못했다”며 “지금이라도 유골을 지역별로 시유지나 국유지 한 군데에 모아서 모시고 위령탑을 세워 어린 학생들과 정치인 등이 과거에서 교훈을 얻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조사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것은 제대로 된 화해를 이끌어낼 수 없다”며 “유골들의 후속 조처에 관한 논의가 정치권 등에서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반복된다
구체적인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유족 단체들마다 조금씩 의견을 달리한다. 제주와 경남 거창, 충북 노근리처럼 이미 개별적으로 위령 사업을 벌이고 있는 지역은 논외로 치더라도, 유해를 모두 한 곳에 모을지 아니면 개별 지역마다 별도로 위령 사업을 진행할지에 대한 논의는 현재 진행 중이다. 어쨌건, 지금처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는 유족들의 의견이 모아진다.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의 서우영 사무국장은 이 문제에 손 놓고 있는 정부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가기구인 진실화해위가 발굴한 유해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 상식이다. 법 제정 문제를 놓고 국회에 공을 미룰 게 아니라 우선은 중앙정부가 나서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함께 애도의 뜻을 밝혀야 할 것이다. 또 발굴된 유해에 대해서는 위령 및 교육 사업을 어떻게 할지 후속조치법을 제정하든, 공론화해야 한다. 정부는 지금 눈 가리고 아웅하고 있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한국현대사)도 “과거사 규명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스펙트럼을 넘어 정권의 변화와 상관없이 일관성 있게 이뤄져야 하는 것”이라며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국가도 우리 사회도 이들을 어떻게 할지 별 말이 없다. 그래서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진실은 여전히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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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발굴 관련 법
▣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유해의 뒤처리에 앞서 발굴 작업 자체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학살당한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지난해 유해 발굴 작업을 할 때의 일이다. 유해가 매장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은 모두 7군데였다. 그러나 이 중 1번과 2번 지역은 토지 소유주의 반대로 발굴을 하지 못했다. 1번 자리에는 교회가 있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2번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하지만 토지 소유주는 진실화해위가 땅을 파려면 몇십억원을 주고 땅을 산 뒤에나 하라고 했다. 현행법으로는 토지 소유주가 반대하면 유해 발굴을 할 수 없다. 결국 가장 많은 유골이 나올 것으로 예측된 두 곳에는 삽 한 번 꽂아보지 못했다. 노용석 진실화해위 팀장은 발굴하기까지 토지 소유주와의 협의가 힘들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런 조정 기간 때문에 진실화해위의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속도는 더디다. 위원회가 민간인 집단 학살이 이뤄져 유해가 방치돼 있을 것으로 보는 곳은 모두 168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39곳이 우선 발굴 대상지다. 하지만 지난해 4곳과 올해 7곳 등 2년 동안 발굴 작업을 한 곳은 11곳밖에 되지 않는다. 진실화해위는 내년에도 잘해야 4~5곳을 추가로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국회에서 배정받는 예산의 한계 때문에 발굴 대상지를 더 넓히기도 쉽지 않다. 희생 현장 목격자들도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어서, 빠른 발굴이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의 경우도 유일한 목격자 2명이 모두 80대 중반이다. 이제는 기억마저 흐릿하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숨진 군인들의 유해 발굴 작업과 뚜렷이 대비된다. 국방부는 올해 2월 국회를 통과한 ‘6·25 전사자 유해의 발굴 등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군인들의 유해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이 법은 9조에서 “전사자 유해가 있다고 인정되면 해당 토지·공유수면 등을 조사·발굴할 수 있고, 타인의 토지에 출입하거나 일시 사용할 수도 있고, 그 토지에 있는 농작물과 나무 등의 장애물도 제거·변경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문화재가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문화재청장과 협의를 거친 뒤 협의 결과에 따라 전사자 유해를 조사·발굴할 수 있는 등 필요한 곳을 필요한 때에 발굴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두고 있다. 이 법은 또 발굴된 유해의 처리 방안도 명확히 규정하고 있어 민간인 학살 피해자에 대한 처우와 대조된다. 발굴된 전사자 유해의 경우 유족이 있을 때는 국립묘지에, 유족이 없을 때는 국방부 장관이 지정한 유해보관소에 안치하도록 돼 있다.
민간인 학살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대처 방안이 정치권에서 논의가 안 된 건 아니다. 지난 17대 국회 때 김원웅 의원 등 11명의 의원은 진실화해위의 발굴 작업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개정안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과정 중 희생자의 사체 또는 유해 발굴을 위하여 토지의 형질변경, 죽목의 벌채, 물건의 적치가 필요한 경우 위원회는 토지 소유자·지상권자 등의 동의를 얻어 관할 행정기관의 장에게 미리 신고한 후 토지의 형질변경 등을 할 수 있도록 함”이라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개정안은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17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됐다.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김원웅 전 의원은 “대한민국이 건국 과정에서 정권의 합리화 방법으로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양민 학살을 일삼았다.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규명을 신속히 하기 위해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도 쉽게 할 수 있도록 개정안을 제출한 것인데, 당시 여권 내부의 동력도 부족했고 야권과의 합의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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