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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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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유적지는 거기 없다

등록 2008-08-15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오류를 지적한 뒤 재조사를 하였으나 중국 쪽 관리 말만 믿고 엉뚱한 곳을 계속 지목</font>

▣ 글·사진 이봉원 기록영화 제작가·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90년이자 정부 수립 60돌이 되는 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는 제헌 헌법의 전문(‘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과 현행 헌법의 전문(‘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이 이러한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현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60돌’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으며, 일부 보수 세력은 아예 8월15일을 ‘광복절’보다 ‘건국절’로 기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이 건국절이 돼야 한다는 얼빠진 주장은 한마디로 독립운동 선열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모독하는, 반헌법적인 책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형편 잘 아는 독립운동가 여러 명이 증언

그런데 우리 선열들과 임시정부를 모독하는 사례는 또 있다. 정확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중국 지방정부의 말만 믿고,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로 엉뚱한 곳을 지정한 우리 정부와 관련 업무 종사자들의 행태가 그것이다.

지난 2002년 문화관광부와 독립기념관, 한국근현대사학회는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행했다. 그런데 보고서에 나오는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 내용에 오류가 많았다. 이를 뒤늦게 안 글쓴이는 2007년 상반기에 일부 언론과 국회 토론회를 통해 이의를 제기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정부는 2007년 여름에 일부 유적지에 대해 재조사를 한 뒤 그해 12월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글쓴이가 지적한 것들 중 몇 군데는 수정을 했지만, 나머지 문제에 대해선 조사단이 현지에 갔으면서도 조사를 안 한 것인지, 재조사 결과 수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인지, 일절 언급이 없다.

더욱이 당시 현지에 거주해서 그곳 형편을 잘 아는 독립운동가 여러 명이 청사가 있던 실제 위치를 증언하고 있음에도, 정부는 무슨 까닭인지 중국 쪽이 일방적으로 지목한 장소만을 여전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라고 공문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 한 예로, 정부가 2002년에 발표한 1차 보고서에서는 1939년 4월부터 1940년 10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장소(당시 주소는 기강현 임강가 43호)를 현재 중국 중경직할시 ‘기강현 고남진 상승가 27호’라고 현장 사진과 함께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에 상승가 27호에서 20여m 떨어진 이웃집(상승가 107호)에 살았던 애국지사 신순호(당시 18살) 선생은 임시정부 청사는 주택가 속에 있는 상승가 27호가 아니라 거기서 조금 떨어진 기강의 강변에 있었고, 1990년 5월에 부군인 애국지사 박영준 선생과 함께 현장에 가서 확인을 했다고 증언한다. 또 애국지사 고 지복영(당시 21살) 선생도 “그때 임시정부 어른들께선 길 아래 강가에 집 한 채를 얻어서 계셨다”고 생전에 글쓴이에게 증언했고, 그것을 녹화한 테이프도 남아 있다. 또 당시 청사 건물에 살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당시 12살) 선생은 2005년 8월에 100여 명의 답사단을 이끌고 현지로 가서, 기강의 강가에 있는 청사 터(왼쪽 사진·아파트 자리)를 확인하고 돌아온 바 있다.

“임정 청사는 강변에 있었다”

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정 청사는 강변에 있었다. 내가 소학교 5학년이던 1939년부터 2년 동안 임정 청사 바로 옆집에 살아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이동영 선생 등 임정 요인들이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다. 내가 집에서 수영복을 입고 바로 길 건너 강에 가 멱을 감곤 했다. 10여 년 전에 가봤을 때는 건물이 헐리지 않았는데, 3년 전에 갔을 때는 다 헐고 아파트를 짓고 있더라. 기강 부분을 보면 (정부 쪽이 발간한) 보고서를 불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독립운동 관련 학자들이 조사했다는 건데, 엉터리도 그런 엉터리가 있을 수 없다.”

글쓴이는 2007년 1월에 이들의 증언과 사진을 가지고 현지로 가서, 그곳이 현재 ‘고남진 타만 8호’ 지역인 것을 확인했다. 증언 내용과 증언자가 찍은 사진과도 완전히 일치하는 지형 조건을 갖춘 곳이다. ‘타만’이라는 지명도 임시정부가 그곳에 자리잡은 뒤 ‘임강가’로 바뀌었다가, 그 뒤에 다시 ‘타만’으로 고쳐졌다는 것이 신순호 선생과 현지인들의 증언이다.

그런데 정부가 2007년 여름에 독립기념관 연구원들을 현지로 보내 재조사까지 벌이고도 12월에 발간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가? 나중에 글쓴이가 확인한 바로는, 연구원들이 현지 지방정부 기관에 가서 관련 자료가 있는지 조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조사 보고서에 그와 같은 내용을 아예 싣지 않았다는 게 해명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중국 현지 지방정부의 말은 증거 자료가 없어도 믿으면서, 당시에 현지에서 생활했던 임시정부 요인 가족 네 명의 생생한 증언은 그냥 무시해도 좋단 말인가? 그 결과, 우리 정부의 공식 문서에는 2008년 8월 오늘까지도, 1939년 4월부터 1년6개월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중국 내 주소는 ‘상승가 27호’(오른쪽 사진·지금은 재개발로 정확한 주소지 확인 불가)로 돼 있다.

네 명의 증언자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두 명도 고령이어서 관련 기관이 하루빨리 증언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영원히 미궁에 빠질 우려가 있고, 따라서 우리 국민은 엉뚱한 곳을 계속 임시정부 유적지라고 여기며 기념하게 생겼다. 그리고 이처럼 잘못된 기록은 내일도 학계와 언론매체, 관련 단체, 역사 서적들을 통해 국민에게 계속 전파되고 교육될 것이다.

생존한 증언자 두 명도 이미 고령

자랑스러운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유적지를 정부가 이처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큰 죄를 짓는 일이다. 독립운동 선열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성실한 재조사를 통해 진실한 역사를 기록하고, 잘못된 기록이 ‘건국절’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책잡힐 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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