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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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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과 은행, 죽음으로 가는 몸집불리기

등록 2008-07-11 00:00 수정 2020-05-03 04:25

‘문어발 확장’ 자금 끌어대는 대기업, 단기 성과 늘리려 대출 경쟁하는 은행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규제 완화를 틈타 대기업들이 또다시 ‘문어발 확장’에 나서고 있다. 올 1∼5월 은행권의 대기업 대출 증가액은 10조9천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조7천억원)의 6.4배에 달했다. 대부분 인수·합병(M&A) 자금 마련을 위한 대출이다. M&A 붐 속에서 30대 그룹의 계열사는 최근 843개로, 지난 3년 사이에 179개나 불어났다. 대기업마다 M&A를 통한 기업 성장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대우조선해양과 현대건설, 하이닉스, 산업은행 등 구조조정 기업의 매각과 공기업의 민영화를 앞두고 대기업마다 더욱더 ‘실탄’ 확보에 나서고 있다.

30대 그룹 부채총액은 3년새 38% 급증

게다가 새 정부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 규제를 완화하고 보험·증권지주회사에 제조업 자회사를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대기업의 M&A 유인은 더욱 커지고 있다. M&A를 위한 차입을 확대하면서 빚 부담도 커지고 있는데, 10대 그룹의 부채비율(제조업 상장 계열사 기준)은 2007년 말 81.86%에서 올해 3월 말 86.84%로 상승했다. 대기업 전문 분석업체인 ‘재벌닷컴’에 따르면, 30대 그룹 계열사의 부채총액은 2005년 3월 말 403조4420억원에서 올해 3월 말 556조7360억원으로 38% 급증했다.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등 초대형 M&A를 성사시킨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경우 이 기간의 부채총액이 22조1740억원으로, 96.4%나 늘었다.

대기업들의 대형 M&A는 대부분 빚을 내서 기업을 인수하는 LBO(Leveraged Buy Out) 방식이다. 외부 차입을 통해 M&A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 것으로, LBO는 피인수 기업의 유·무형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차입해 기업을 인수하는 금융 기법이다. 인수기업은 통상 인수대금의 10∼15%만 자기 자금으로 조달하고 나머지 85∼90%는 LBO로 조달한다. 차입금의 직접적인 상환 부담을 상당 부분 피인수 기업에 전가하는 방식이다. 적은 자본으로 대형 기업을 인수할 수 있고, 기업 가치를 높인 뒤 되팔기도 쉽다. 박성규 한국기업평가 선임연구원은 “1980년대 이자율이 하락하고 주식시장이 활황에 접어들 시기에 LBO를 통해 기업을 인수한 뒤 이 기업을 재매각해 차익을 남기는 투자가 성행했다”며 “2000년대 이후에는 사모펀드(PEF·Private Equity Fund)와 투자은행들이 M&A를 주도하면서 대규모 자금조달을 위한 LBO 거래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그룹의 49억달러짜리 미국계 밥캣 인수, 유진그룹의 하이마트 인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대한통운 인수 등이 모두 LBO 방식이었다. 최근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겠다며 밝힌 자본 조달 방식도 차입 인수다.

그러나 두산·STX·금호아시아나 등 무리하게 빚을 내 대형 기업을 인수한 그룹마다 주가가 폭락하고 신용등급이 깎이는 등 M&A의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M&A를 성사시켜 그룹이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인수 대금을 조달하기 위해 끌어썼던 외부 차입금이 부각되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일수록 기업의 안정성이 더 부각되기 때문에 M&A 관련 기업마다 주가가 폭락하고 있다. 이는 요즘 주가가 연일 급락하고 있는 원인의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M&A가 기업의 성장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주식시장이 약세장에 접어들수록 당장의 자금 부담에 대한 우려가 퍼지는 것이다. 예컨대 금호산업의 경우 연일 신저가 행진을 지속하고 있는데, 대우건설을 인수할 당시 과다하게 외부 차입금을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수익성 악화돼도 대출로 총자산 늘려

특히 M&A에 적극 나섰던 기업마다 신용등급이 강등되면서 자금 조달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M&A 성공에 대한 환호는 잠시에 그치고, 유상증자 실패 사례가 속출하는 등 된서리를 맞고 있는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인수 의향을 밝힌 한화그룹과 두산그룹의 경우 M&A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대규모 유상증자설이 나돌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있다. 고유가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져들고 금리는 급상승하면서 ‘큰돈’을 빌려 기업을 인수한 데 따른 리스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조 대기업 쪽에 차입 인수를 통한 M&A 붐이 일어나는 가운데, 국내 은행권 역시 최근 수년간 과도한 외형 경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다. 대우그룹 사태와 카드 대란 여파로 잠시 주춤했던 국내 은행의 외형 경쟁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됐다. 국민은행을 따라잡기 위해 우리·하나·신한은행 등이 경쟁적으로 총자산을 늘리는 외형 확대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0.6%, 7.8%에 머물던 국내 은행의 총자산 증가율은 2006년 13.1%, 2007년 12.2%로 치솟았다. 올해는 1분기에만 총자산이 무려 7.5%나 증가했다.

외형 경쟁은 대출 경쟁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국내 은행의 총대출 증가율은 2006년 14.2%, 2007년 15.4%로, 총자산 증가율을 웃돌았다. 대기업 대출이 감소하면 중소기업 대출과 가계대출을 늘리고, 가계대출이 줄어들면 대기업 대출을 늘리는 등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즉, 2007년에 가계대출은 5.1% 증가한 데 그친 반면 대기업 대출과 중소기업 대출은 각각 30.5%, 22.4% 급증했다. 거꾸로 올 1분기에는 가계대출과 중소기업 대출이 크게 둔화된 가운데 대기업 대출은 21.1%나 폭증했다. 대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차입 M&A를 통한 몸집 불리기에 나서면서 은행권에서 거액의 빚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기업대출 증가는 시중 유동성 증가로 이어지고 물가 상승을 압박하게 된다.

외형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은행의 수익성은 악화하고 있다. 은행마다 대출 경쟁에 나서면서 예대금리차는 2005년 1.97%포인트에서 올 1분기 1.44%포인트로 크게 낮아졌다. 순이자 마진은 외형 경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던 2005년 말 2.81%에서 올 1분기에 2.39%로 추락했다. 특히 시중 자금이 예금에서 펀드·종합자산관리계정(CMA) 등으로 빠져나가는 ‘머니 무브’(money move) 현상이 일어나는 와중에 은행마다 외형 경쟁을 추구하면서 양도성예금증서(CD)와 은행채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 자금 조달비용이 큰 CD와 은행채 발행은 시중금리를 상승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박병원 경제수석 기용에 ‘대형화’ 가속

서병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외형 경쟁 탓에 국내 은행의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2005년 말 13.0%에서 올 1분기에 11.16%로 크게 하락했다”며 “특히 올 1분기에 국내 제조업의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는데도 기업대출은 급격하게 증가하고, 미분양 주택이 늘고 있음에도 주택담보 대출이 꾸준히 증가하는 등 은행의 자산 건전성이 나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의 각종 지표들이 올 1분기에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다는 얘기다.

국내 은행들이 외형 경쟁에 매달리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은행장에 대한 보상이 자산규모에 비례하고, 재신임이 단기성과 위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은행장마다 당장의 경영성과를 개선하기 위해 무리한 대출 경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줄곧 ‘메가뱅크’를 주창해온 박병원씨가 최근 제2기 청와대 경제수석에 기용되면서 국내 은행들의 고질병인 대형화 움직임이 가속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서병호 연구위원은 “최근 고유가, 경기침체와 물가·금리 상승으로 경영난에 봉착하는 기업들의 연체율이 점점 증가하고 가계의 이자상환 능력이 훼손되면서 부실채권이 급증할 소지가 있다”며 “외형 경쟁에 계속 나설 경우 은행의 신용 리스크가 현격하게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은행과 대기업 모두 치열한 외형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경제가 본격적인 하강 국면에 들어서면서 이제 M&A와 대출 경쟁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사태가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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