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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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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워라, 공공기관장 ‘스탈린식 숙청’

등록 2008-05-09 00:00 수정 2020-05-03 04:25

국책 연구기관장들에게까지 “일괄 사표 내라”, 근거도 전례도 없는 이명박 정부식 물갈이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4·9 총선이 끝난 뒤 대한민국 모든 공공기관이 대혼란에 빠져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상 초유의 ‘공공기관장 일괄 사표’ 파동 때문이다. 우리나라 공공기관은 현재 총 305개로, △공기업(한전·가스공사·관광공사·석유공사 등 24개) △준정부기관(국민건강보험공단·한국소비자원(옛 한국소비자보호원)·한국농촌공사·신용보증기금 등 78개) △기타공공기관(주요 금융공기업과 국책연구기관·국립대학병원·국립오페라단 등 196개)으로 나뉜다. 총선 이후 지금까지 대다수 공공기관장들은 이명박 정부에 사표를 제출했거나 사의를 표명했다. 제출된 사표는 수리될 수도 있고, 선별적으로 반려될 수도 있다. ‘물갈이’ 대상에 포함될지, 남은 임기를 채울 수 있을지는 5월 초에 결정될 예정이다.

정치권력이 바뀌면 마을 이장들까지 다 바뀌게 된다는 우스갯말이 있긴 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권이 출범했으니 공공기관장 스스로 사표를 내고 ‘재신임’을 묻는 게 당연한 것일까?

3월부터 감사원 동원한 전방위 압박

사표를 낸 대다수 기관장들은 “지금으로선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사표가 수리될지 반려될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황 탓도 있다. 노동부 산하의 한 기관장은 “새 정부 들어 장관이 바뀐 뒤 알아서 사표를 제출했다. 서로 모여서 딱히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지만, 다른 산하기관장들도 공직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분들인데 분위기를 고려해 스스로 사표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부 산하기관장 가운데 마지막까지 버티던 선한승 한국노동교육원장과 심일선 산재의료관리원 이사장도 4월21일 끝내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부 부처들은 “우리가 사퇴를 요구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산하기관장들이 새 정부 들어 재신임을 받는다는 차원에서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안다”고 말하고 있지만, 공공기관장들의 사표는 사실상 강요된 형태로 일괄 제출됐다. 총선 직후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노무현 정권에서 그 정권의 이념과 철학에 맞춰 임명된 사람들은 정권교체가 됐으므로 (새 정부가) 자신의 이념과 맞는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사의를 표하고 재신임을 묻는 게 옳은 일”이라고 사퇴를 거듭 촉구했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이 “노무현 정부의 코드 인사는 나가라”라며 선봉에 섰다. 사표 제출 종용에 반발하던 기관장들도 ‘토끼몰이’식 일괄 정리 파동 속에서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며 줄줄이 사표를 제출하는 풍경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보건복지가족부는 국민건강보험공단·국민연금공단·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산하기관장에게 일괄 사표 제출을 통보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금융위원회 산하의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주택금융공사·예금보험공사 등 금융공기업 기관장들도 전원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심지어 국무총리실이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 한국개발연구원·한국노동연구원·산업연구원·조세연구원 등 23개 국책 연구기관장들에게도 일괄 사표 제출을 요청했다. 물론 ‘국책’ 연구기관이긴 하지만, 학문 연구기관의 수장들에게도 일괄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국책 연구기관장들에게 일괄 사표를 요구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참여정부 시절의 기관장을 ‘몰아내는’ 작업은 감사원을 동원한 전방위 압박 형태를 띠고 있다. 감사원은 새 정부 출범 직후인 3월10일부터 도로공사 등 공기업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감사를 벌이고 있다. 물론 감사원은 감사원법에 따라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 대해 감사를 실시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도 3월부터 공기업 경영평가를 강도 높게 진행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평가 결과 경영실적이 부진한 공공기관에 대해 기관장·상임이사의 임명권자에게 그 해임을 건의하거나 요구할 수 있다. 사표 제출을 않고 버티던 기관장들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공기관 감독권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마녀사냥식 루머도 파다하게 떠돌아

사실 지금처럼 밀어붙이기식으로 공공기관장들한테 일괄 사표를 받은 건 정권교체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과거 정부의 경우 남은 임기를 고려해 한두 명씩 점차 물갈이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와 관련해 중앙인사위원회가 1월15일 국무회의에서 보고한 ‘정부 교체시 임기제 고위직 운영실태’를 보자.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정권 출범 뒤 3개월 이내에 임기제 고위직(공정거래위원장·감사원장·방송위원장 등 장·차관급 임기제 정무직 및 공공기관 임원)이 교체된 비율은 각각 56%, 45%, 15%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공공기관 임원의 교체 비율은 문민정부 53%(28개 직위), 국민의 정부 51%(23개 직위), 참여정부 10%(6개 직위)였다. 물론 참여정부는 재창출된 정권이었기 때문에 교체된 공공기관 임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윤영진 계명대 교수(행정학·공공기관운영위원회 위원)는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살펴보니 정부 산하기관이 몇 개 있는지조차 파악이 안 될 정도였다. 그 이전 정부들마다 공공기관장을 정치적으로 임명해왔던 것이다”라며 “그래서 당시 능력과 전문성 등을 고려해 공공기관장들을 교체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바뀌면서 진행된 공공기관장 교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괄 사표 제출과는 성격이 달랐다는 얘기다. 사실 정부‘투자기관’ 관리기본법은 1980년대 중반부터 존재했으나, 정부 ‘산하기관’ 관리기본법은 김대중 정부에서야 제정이 추진돼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 제정됐다.

공공기관장 일괄 사표라는 전례 없는 일이 진행되면서 공공기관 안팎에서 마녀사냥식 루머가 파다하게 떠도는 등 혼란상이 더해가고 있다. 금융공기업의 경우 “누구누구는 참여정부와 인연이 깊다”거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는 비방(?)이 돌고 있는 것이다. 또 일부 공공기관장들은 자신의 거취 표명 방식이 ‘사표’가 아니라 ‘사의 표명’이라고 해명하는 등 혼선을 빚기도 했다. 일부 금융공기업 기관장의 사표 제출에 대해 금융위원회는 “일부 산하기관장에 대해서는 금융위가 법적인 임면권을 갖고 있지 않고, 사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해명자료까지 내놓았다.

과연, 정권이 바뀐 경우 공공기관장이 임기와 상관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할까? ‘밀어붙이기식 일괄 교체’라는 형식의 문제를 넘어, 정권교체에 따른 공공기관장 교체는 합리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일괄적 재신임, 국제적 추세 아니다”

김영우 서울시립대 교수(행정학)는 “외국 사례를 보면 정권이 바뀌었다고 무조건 공공기관장을 바꾸는 건 기본적인 추세가 분명 아니다”라며 “외국은 임용 당시부터 실적과 능력을 철저하게 검증하는 시스템이 정책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스탈린식 일괄 숙청은 국제적 추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윤영진 교수는 “물론 새 정부의 방침인 공기업 민영화에 반대한다거나 경영평가에서 아주 나쁜 실적을 보인 몇 명을 교체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공공기관장 재신임을 ‘일괄적으로’ 묻는다는 것은 국내 어떤 제도와 규정에도 없다”고 말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괄 사표 제출은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다. 2007년 4월에 제정된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은 ‘임명된 기관장의 임기는 3년으로 하고, 이사와 감사의 임기는 2년으로 한다.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의 장은 임명권자가 해임하거나 정관으로 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임기 중 해임되지 아니한다’고 정하고 있다. 낙하산 인사로 인한 잦은 교체의 폐단을 막기 위해 임기 보장을 못박은 것이다. 즉 법으로 임기를 보장받고 있는데, 정권이 교체됐다는 이유만으로 사표를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 공공정책과 관계자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공공기관장들의 사표 제출은 본인들 스스로 사표를 쓰는 형태로 이뤄지는 것일 뿐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과는 전혀 상관없다”며 “주무부처 장관 등이 해임을 요청하고 있는 형태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은 공공기관의 자율경영과 책임경영 체제를 강조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임기 보장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 경제개혁연대는 “정치적 환경 변화로 인해 전임자가 법률로 보장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조기 낙마했을 때 후임자는 임기를 보전하기 위해 경영 시스템 개선이나 경영성과의 제고라는 본연의 책무 대신 정치적 변수를 우선 고려하게 되는 잘못된 유인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장을 바꾸면 국민이 아니라 정권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장만 판치게 된다는 설명이다.

한나라당 총선 낙마자용 자리 만들기?

특히 대다수 공공기관장은 ‘임원추천위원회 → 공모·심사 → 주무기관장 제청 → 대통령 임명’ 절차를 거쳐 선임된다. 물론 정치적 고려도 개입되긴 하지만 ‘공모’를 거쳐 임명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공공기관이 국민에게 제공하는 공공서비스 상품이 과연 정권에 따라 크게 바뀌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새 정부는 재신임 여부를 가르는 기준으로 △전문성 △경영능력과 경영실적 평가 △재임 기간과 남은 임기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공감 여부 등을 제시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코드 인사’ 성격이 짙은 기관장은 교체 대상이 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김영우 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장을 바꾼다면 공공기관의 생산성과 대국민 공공서비스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물론 지난 정권에 정치적 성향에 따라 임용된 기관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법(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고, 최대한 법의 취지를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새 정부가 기관장을 모두 바꾸려면 관련 법을 새로 개정하든지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임기제 원칙은 기본적으로 지켜지는 게 맞지만 정권이 바뀌는 시기에는 예외를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윤영진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몇몇 주요 관료들을 보면 노무현 정부에서 변신한 사람도 꽤 있다. 새 정부와 국정철학이 맞다, 안 맞다는 기준이 공공기관장들일수록 더 애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공공기관장 물갈이 파동은 한나라당 총선 낙마자들과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위한 ‘자리 만들기’ 목적이 아니냐는 의혹을 살 만하다. 한 기관장은 “법에는 기관장 임기가 보장돼 있고, 위에서는 ‘각자 잘 알아서 판단해 처신하라’면서 사표 제출을 강요해 고민 끝에 사표를 냈다”며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방송공사 정연주 사장은?


“사퇴 1순위” vs “퇴진시킬 근거없다”


공공기관장들이 줄줄이 사표를 제출했지만, 한나라당이 정권교체에 따른 ‘최우선 물갈이 대상’으로 꼽는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은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심재철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공공연히 “정연주 사장이 사퇴 1순위”라고 주장했지만, 정 사장은 “정권이 교체됐다고 공영방송사 사장이 물러난다면 방송의 공공성과 독립성이 유지될 수 없다”며 사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방송 관계자는 “외부 개입을 통해 한국방송 사장을 퇴진시키려 들면 위법 논란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한국방송은 지난해 말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운영법) 적용 대상에서 최종적으로 제외되면서, 현재 공기업도, 준정부기관도, 기타 공공기관도 아닌 상태다. 방송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도록 방송통신위원회(위원 5명)의 감독만 받을 뿐, 행정부 산하 공공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현행 방송법은 ‘한국방송 사장은 한국방송이사회(11명)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만 규정하고 있다. 즉, 한국방송 사장 ‘해임’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규정돼 있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결격 사유, 정당법상의 당원 신분 등 명확히 규정된 몇 가지 결격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3년 임기를 보장받는 것이다. 정연주 사장 임기는 2009년 11월까지다.
방송통신위원회든 한국방송이사회든 사장 해임을 ‘건의’ 또는 ‘의결’할 수 있다는 조항도 따로 없다. 이사회가 ‘한국방송 정관’을 바꿔 이사회의 사장 해임 조항을 추가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럴 경우 상위법인 방송법에 위배된다. 종합하면, ‘법대로’ 할 경우 정 사장은 결격 사유가 발견되지 않는 한 해임될 수 없게 돼 있다.
그래서일까? 현재 한나라당은 말로만 정 사장 퇴진을 외치고 있을 뿐, 실제로 힘을 동원해 정 사장 퇴진 투쟁에 앞장서는 건 한국방송노동조합(위원장 박승규)이다. 현 한국방송노조 집행부는 2007년 1월 ‘정연주 퇴진’을 선거 구호로 내세우면서 노조를 장악했다. 현 노조 쪽은 “정연주 사장이 (국회에서의) ‘한국방송 수신료 인상안’ 통과에 실패하고 적자경영을 했다. 반면 다른 공중파 방송은 흑자를 냈다. 또 새로운 국회와 방송통신위가 구성되면서 새롭게 공영방송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와중인데, 정 사장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노조가 단지 임금인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정연주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정 사장이 물러나야 수신료 인상안이 통과되고, 이에 따라 경영흑자가 달성되면 임금인상을 현실적으로 요구·쟁취할 수 있다는 논리다.
흥미롭게도 노조의 이런 정 사장 퇴진운동을 둘러싸고 한국방송 내부에서 찬반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기자, 프로듀서, 경영·기술직 등 직군에 따라 우세한 의견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고 직군 안에서의 의견 대립도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방송 편성제작팀 심웅섭 프로듀서는 최근 사내 인터넷 게시판에 ‘사장 퇴진운동 명분 없다’는 글을 올려 △정 사장은 능력과 성과를 떠나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의 추천을 받아 임명된 사장이며 △적자경영과 수신료 인상 실패는 정 사장의 책임만으로 보기 어렵고 △법치국가에서 법으로 보장된 임기를 노조원의 여론만으로 단축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정 사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하는 것이야말로 방송의 독립성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일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국방송 고위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공영방송 사장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공영방송 체제를 뿌리째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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