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박미석 낙마에 이어 이동관·곽승준 등도 투기 의혹… 여윳돈 많고 개발 정보 빨리 얻을 수 있어</font>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서울시청 기자들 사이에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 1980년대 말 서울시장을 지낸 인사에 관해서다. 그는 기자들과 함께 지역을 다니다가 “저기 땅 좋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눈치 빠른 기자들은 곧바로 돈을 빌리거나 어떻게 해서든 그 땅을 샀다고 한다. ‘기자 관리’를 위해 개발을 앞둔 땅의 정보를 은근슬쩍 흘렸던 셈이다. 그런 땅을 사둔 사람 가운데 기자는 ‘새발의 피’일 뿐 대부분의 땅은 고위 공직자들이 사들였고, 이 땅들은 몇 년 뒤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코미디 같은 얘기가 버전을 달리한 채 요즘에도 나온다.
서민은 거주 때문에 아파트 선호
4월24일 발표된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 청와대 고위 공무원들이 땅투기 의혹에 줄줄이 걸려들었다. 박미석 사회정책수석은 영종도 농지에 대한 ‘투기 목적 농지 매입’ 의혹을 피하려고 거짓 ‘자경사실확인서’(농지 소유자가 직접 농사를 짓고 있다는 증명)를 만들어 청와대에 낸 것이 드러나 끝내 낙마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강원도 춘천의 절대농지를 구입한 뒤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아 농지법을 위반한 데 이어, 농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가짜 농업경영계획서’를 낸 의혹까지 제기됐다. 곽승준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농지 매입을 위해 대학 시절 위장 전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은 충남 아산 지역의 땅을 동생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세금을 줄이려고 매매가 아닌 증여 형식을 취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은 경기 안성의 논·밭 세 필지를 산 뒤 인근 지역으로 주소를 이전했지만 실제 거주한 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위 공직에 나오는 이들은 왜 땅에 집착할까? 땅 가운데서도 왜 하필 ‘농지’일까? 시중에 떠도는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 정부’에 빗댈 경우, 이명박 정부는 ‘강남 농지 부자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월 말 경기 김포의 절대농지 투기 의혹으로 물러난 박은경 당시 환경부 장관 내정자는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한국의 부유층은 왜 투기 목적으로 아파트보다 농지를 더욱 선호하는 것일까? 아파트라는 상품은, 물론 택지공급의 제약이 있긴 하지만 공급이 계속 증가할 수 있고, 공급이 늘면 자연히 가격이 하락하게 된다. 특히 가진 돈이 많지 않은 서민들 처지에서 보면, 투기 목적을 염두에 둔다 해도 농지보다는 아파트 구입을 선호하게 된다. 왜 그럴까? 어차피 가족이 살 집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거주+집값 상승’이란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아파트 구입에 나서는 것이다. 반면 여윳돈이 풍부한 부유층은 돈을 묻어두더라도 생계에 걱정이 없기 때문에 ‘농지’를 사두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기게 된다.
게다가 토지와 건물이 합쳐진 아파트와 달리 토지라는 상품은 원천적으로 공급 제약에 직면한다. 이른바 ‘지대’가 발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토지는 주변 개발 호재라는 재료가 뒷받침돼야 개발 가치가 높아져 가격이 폭등한다. 전국 어느 토지나 한꺼번에 가격이 오르는 건 아니다. 실제로 서울의 땅값이 해마다 치솟지만 오지 산골짜기에 있는 땅값은 수십 년째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결국 토지 가격을 변동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개발 정보’다. 이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지배 엘리트와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일수록 사돈에 팔촌들까지 살펴보면 각종 고급 개발정보를 조금이라도 빨리 획득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 이들이 평소에 교분을 나누는 사회적 연줄망을 통해서도 진짜 개발정보를 얻을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다. 물론 엘리트그룹에 속하지 않는 일부 국민도 농지를 매입해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으려고 애쓰지만, 잘못된 개발정보를 믿고 농지를 구입했다가 낭패 보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즉, 땅값이 오르기는커녕 수십 년째 오히려 떨어지고,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 농지를 소유해 골치 썩이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정보 접근의 비대칭’과 위험성 때문에 서민들은 농지 투기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반면, 엘리트 부유층은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다들 농지 투기에 ‘베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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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농지법도 원인
농지법이 허술하게 운영되는 점도 농지 투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 현행 농지법은 ‘경자유전’(직접 농사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이라는 농지 소유 자격과 소유 상한을 규제하고 있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은 사실이 입증되면 법을 어긴 것이 되고, 농지 처분 명령을 받게 된다. 서민들은 ‘경자유전 원칙’이란 말을 들으면 내가 농지법을 어기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농지 구입을 감행하지 못한다. 반면 부유층은 나중에 농지 소유 자격이 문제가 돼 처분 명령이 내려지더라도 “안 지켜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과감하게 농지 투기에 나서는 건 아닐까? 물론 그러다가 고위 공직자가 될 기회를 잃는 상황이 닥치게 되지만.
현재 전체 농지의 50% 이상은 부재지주가 소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처럼 외지인의 농지 소유가 크게 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농지 소유 규제를 전면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공직자들만 농지를 불법으로 소유해서 걸리는 게 아니라 상당수 국민도 불법으로 농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재산 공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안 걸리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농지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전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이런 규제는 철폐해야 한다는 논리다.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은 “국민의 살림살이를 좋게 만들기 위해 생긴 규제가 오히려 국민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득보다 실이 많은 토지거래허가제, 농지전용 등의 규제는 국민을 위해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은경 경기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도 “농업의 경제성이 감소하고 농가 인구의 고령화와 노동력 부족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 땅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농지를 양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많은 국민이 땅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일부 부유층이 많은 땅을 보유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토지의 쏠림현상이 심하다는 얘기다. 지난해 10월 당시 행정자치부가 내놓은 ‘2006년 토지소유 현황’을 보면 우리나라 땅부자 1%(50만 명)가 개인소유 토지 면적의 56.7%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땅의 쏠림현상이 심각한 상태다. 20살 미만의 미성년자가 소유한 땅도 2005년 말 133㎢에서 2006년 말 142㎢로 늘어났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8.4㎢)의 16.9배에 이른다.
백지신탁제와 토지공개념
부유층이 불법으로 농지를 구입했거나 농지를 통해 불로소득을 얻었다면 고위 공직에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도, 공직에 버젓이 나오는 도덕적 해이 문제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래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는 고위 공직자의 땅투기 의혹 낙마 사태를 없애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시민단체에선 주식백지신탁처럼 토지에 대해서도 백지신탁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동산백지신탁은 고위 공직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과 직계 존·비속 소유의 부동산 가운데 실제로 활용하고 있는 부동산이 아닐 경우 국가기구에 백지 상태로 맡기고, 퇴직 때는 백지신탁된 부동산의 시가와 매입가의 원리금 중 낮은 금액으로 돌려주는 제도다. 고영근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부장은 “백지신탁을 하는 고위 공직자는 불로소득을 포기하게 되기 때문에, 과거에 땅을 산 것이 투기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부동산통상학부)는 “부동산 제도는 근본적으로 건강하고 정의롭고 효율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토지는 공공의 것이라는 토지공개념을 부활시켜 헌법에 ‘토지공개념’이라는 용어를 명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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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