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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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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14돌 기획] 14살의 도전Ⅱ

등록 2008-03-28 00:00 수정 2020-05-03 04:25

창간 14주년에 다시 만난 14살, 창간호에서 만났던 14살들의 꿈과 고민을 기억하는가

▣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어른들을 믿어서 뭐해요?”

아이들이 되물었다. 학교 선생님도 학원 선생님도 신뢰하지 않는다기에 “그럼 어떤 어른을 믿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그럼 여러분은 누굴 믿나요?” 왁자지껄하던 고척중(서울 구로구) 2학년 9반 교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엄마요!” “엄마 말곤 없어요?” “할머니요!” 와르르 웃음이 쏟아진다.

△“14살, 가는 거야!”
고척중 2학년 9반 아이들이 제각각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소영이는 “14살은 인생의 동굴”이라 했고, 변호사가 되고 싶은 가을이는 14살이 빨리 지나가길 바란다. 공부는 최고의 고민. 게임을 못하게 하는 것도 괴롭다. 여드름이 나고 살이 찌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14살의 걱정거리’다.

이웃도 언론도 대통령도 믿지 않아요

“아직 우리 주변에는 본받을 사람이 많다.” 14년 전, 설문조사에서 43.2%의 중학생들이 한 말이다(반대 의견은 20.4%). ‘희망찬 21세기’를 맞고 몇 년이 흐른 지금, 중학생들의 ‘어른 불신’은 각종 설문에서 도드라진다. 2007년 12월 국가청소년위원회가 내놓은 ‘한국 청소년 가치관 조사 연구’(이하 청소년위 조사)를 보면, 전국의 중학생 3081명 중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74.1%(2275명)에 이른다. 53.8%(1653명)가 이웃을 신뢰하지 않으며, 50.5%의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위험이 닥쳤을 때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논현동에 사는 한 중학생은 “얼마 전 안양에서 이웃집 아저씨가 예슬이·혜진이를 죽인 사건 때문에 무섭다”고 했다. 대통령(73.7%)도, 국회의원(86.5%)도, 언론(61.8%)도 ‘별로 믿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을 매우 신뢰한다는 응답은 각각 18%(555명), 8.7%(266명)에 그쳤다.

창간 14주년을 맞은 은 창간호 표지이야기였던 ‘21세기, 14살의 도전’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시대의 ‘14살’들을 다시 만나보았다. 14년 전 아이들이 꿈꾸던 21세기의 모습은 뒤틀어졌고, 21세기를 사는 ‘14살’들은 신뢰와 행복이란 단어를 더 낯설게 여기고 있었다.

창간호 당시 은 21세기에 스무 살이 될 14살 아이들(중학교 2학년) 1천명을 대상으로 현재 생활, 사회의식, 미래상, 장래희망 등을 묻는 설문을 실시한 바 있다. 그 때 14살들은 새로운 세기에 대해 기대와 설렘을 갖고 있었다. ‘21세기 우리 사회상은?’이라는 질문에 그들이 점쳤던 ‘미래’는 어느덧 우리의 ‘과거’가 됐다. 당시 50.2%의 중학생이 ‘21세기에는 최첨단 과학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설문조사에 응했던 전남 신안군 임자도의 학생 91.7%, 충남 청양군의 학생 87.6%가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다. 2003년 1월25일 한국은 ‘인터넷망 8시간 불통’에 아수라장이 됐으니 ‘최첨단 과학국가’가 되긴 했다. ‘깨끗한 정치로 안정된 나라가 될 것’이라던 39.8%의 바람대로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20세기가 가기 전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성숙한 예술과 문화의 나라가 될 것’이란 38.2%의 예상도 전부 들어맞지는 않았다. 영화산업 규모가 몇십 배로 커졌고 케이블 채널이 몇 배로 불어났다. 그리고 2008년 2월 국보 1호 숭례문의 전소 과정이 생중계됐다.

“돈이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1994년 설문조사와 최근 나온 청소년위 조사 결과를 비교해보면, ‘가족’의 가치는 여전하다. 못 믿을 어른들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믿고 기댈 대상이다. 청소년위 조사에서 ‘부모님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에 95.2%가 그렇다고 답했다. 14년 전에도 아이들은 ‘가족’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2위부터는 순위가 요동쳤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생각인가’(한겨레 조사)라는 질문에 ‘가족 행복-스스로의 만족-사회·국가 봉사-명예-부-권력’ 순으로 대답하던 14살 아이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청소년위 조사)이란 질문에 ‘가족-건강-돈-친구-종교-학력’을 꼽는 14살의 아이들로 바뀌어 있었다.

서울 고척동과 경기 연천의 아이들은 “돈이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교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도, 경찰을 꿈꾸는 아이도 목표는 ‘돈’이었다. 한 농민의 아들은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농사는 짓기 싫다”고 했다. 고척중 2학년 9반 37명 중 9명(24%)이 살아가는 데 ‘돈’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했다. 전원이 “대학에 진학할 계획”인데 이유는 “그래야 취직이 잘된다”였다. 그들에게 고척동은 ‘옆동네인 목동보다 물가가 싼 동네’다. 강남 대치동에서 만난 아이는 “대치동을 떠나 시골로 가면 대저택에 살 수 있는데 나 때문에 여기서 산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럽다”고 했다. 부모가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고스란히 아이들 눈에 비쳐 있었다.

청소년위 조사에서 ‘행복하냐’는 질문에는 19.1%(584명)만이 확실하게 긍정해주었다. 취재 중 만난 대치동 중학생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해지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그 아이들의 질문에 우리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창간호에 만난 14살들, 14년 뒤…

경진이의 죽음과 승렬이의 거절



은 창간호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1980년에 태어나 1994년에 중학교 2학년이 된 이들이었다. 서울 강남의 대준이, 태백 탄광촌의 경진이, 충남 청양의 종수, 섬 소년 승렬이, 도시 빈민의 아들 경훈이였다. 이들이 스무 살이 된 2000년에 다시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경훈이는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다시 2008년, 그들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2000년 당시 간암을 이겨냈다며 환하게 웃던 경진이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경진이 어머니는 “인터뷰를 하고 얼마 안 돼 세상을 떴다”고 했다. 세상을 뜨기 전에 에 난 기사는 부모와 함께 보았다고 한다. 2000년에 만난 경진이는 암에 걸린 자신을 도와준 태백 사람들과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현재 경진이 부모는 태백을 떠나 경기 안산에 거주하고 있다.
목포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승렬이는 끝까지 인터뷰를 거절했다. 어머니를 통해 “승렬이가 더 이상 언론에 자기 얘기가 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세월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2000년에 미국 이스트먼 음대에 진학해 첼로를 전공하고 있던 대준이도 한국의 이스트먼음대 동문회에서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성공하는 것이 꿈이라며 2000년 당시에도 “내일부터 영어 단어를 5개씩 외울 생각”이라던 종수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현재 전국 3032개 중학교에서 110만139명이 ‘중학생’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2007년 교육통계연보) 그 아이들 중 몇 명을 만났다. 경기 연천 동막읍, 서울 고척동·방배동·대치동, 강원 가평 등 다양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14살’들이 조심스레 자기 이야기를 풀어놨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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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연천군 이호천·이호산
“수입 안정적인 군인이 최고죠”

호천(14)이와 호산(14)이는 쌍둥이 형제다. 호천이가 형이지만 서로 그냥 이름을 부른다. 쌍둥이는 같은 반에 두지 않는 원칙 때문에, 둘 다 연천중 2학년에 재학 중이지만 같은 반이 될 확률은 없다. 호천이는 1반, 호산이는 4반. 연천중 2학년은 4반까지밖에 없다.

호천이는 연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위로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와 고등학생인 형이 있다. 형도 바로 옆 연천고를 다니고 누나는 ‘삼성’에 취직했다. 호천이의 부모님도 연천중·고교를 나왔다. 호천이네 집에선 벼농사도 하고 고추농사도 한다. 집 앞쪽에는 논밭이 있고 뒤쪽에는 비닐하우스가 여러 채다. 그 옆으로는 닭과 오리 사육장이 있다. 호천이와 호산이는 학교가 끝나면 바쁘다. 얼른 집에 가서 부모님을 도와주어야 한다.

꿈을 묻자 호천이는 “직업 군인이 될 거예요”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집 근처에는 군부대가 있다. 친한 군인 아저씨도 여럿이다. 군인이 되면 ‘대민’을 나와 부모님 농사도 도와드릴 것이란다. 그의 역할 모델인 사촌형 역시 군인이 됐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오는 형의 모습은 호천이의 이상형이다. 늘 농사를 지으며 불규칙한 수입에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봐온 터다. “풍년이냐 흉년이냐에 따라 농사 수입은 오락가락하거든요. 안정적으로 잘 살기 어려우니까 농부는 되지 않으려고요.”

군인이 되면 더도 덜도 말고 150만원만 넘게 받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호천이에게 ‘150만원’은 ‘안정적으로 살 만한 돈’의 이미지다. “월급이 많으려면 계급이 높아야 하니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학교의 한 남자 선생님이 “대학 학점이 좋아야 높은 계급의 군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그 외의 구체적인 정보는 아직 모른다.

호천이는 호산이도 군인이 되고 싶어할 것이라고 했지만 호산이는 “아직 고민 중”이라고 했다. “호천이처럼 군인이 될지 누나처럼 ‘삼성’에 들어갈지 모르겠어요.” ‘삼성 취직’은 어느새 아이들에게 ‘회사원’의 대명사가 돼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사촌형과 누나가 하는 일은 그렇게 막연한 목표가 됐다.

호천이 어머니도 군인의 꿈을 반대하진 않는다. 학교 학부모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막둥이들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지만 공부를 강요하진 않는다. 대신 아이들의 밝고 건강한 모습이 자랑거리다. “쌍둥이가 없었으면 농사를 못 지었을 거에요. 이번에 집에서 기르는 개가 새끼를 낳을 때도 쌍둥이들이 다 받았어요. 얼마나 영특하게 일을 잘하는지….”

호천이와 호산이는 휴대전화가 없다. “필요가 없어요.” 학원도 안 다닌다. 한 반에 학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은 3~4명에 불과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어다니기 힘든 거리라 수업이 끝나면 공중전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한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작은 트럭을 몰고 두 아이를 데리러 온다.

이 학교 국어 담당 김혜경 교사는 경기 의정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연천으로 왔다. “의정부는 지하철로 쉽게 도시에 연결되니 아이들이 세상을 좀 아는데, 이곳 아이들은 연천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어요. 때 묻지 않고 착하고 맑은 것이 장점이죠.” 단점도 지적한다. “세상을 좀 좁게 보고 뚜렷한 꿈이나 목표를 갖는 경우가 드뭅니다.” 헤어지려는데 호산이가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가 바퀴 위에서 울고있던 고양이를 꺼내온다. “큰일 날 뻔 했잖아!” 군인이 될지 삼성에 취직할지 몰라도 아이들은 “행복하다. 연천에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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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가평 청심국제중고 김서연
“네오 엘리트가 되고 싶어요”

“어디서든 자기 하기 나름이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연(14)이가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서연이는 경기 가평에 있는 청심국제중학교 2학년. 전교 1등이다. 1학년 1·2학기 모두 1등을 해 장학금을 받고 있다. 같은 학년에는 82명의 아이들이 네 반으로 나뉘어 있다. 국어, 국사 등의 교과만 빼고 대부분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영어가 더 편해졌다”고 한다.

산속에 있는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엄마와 떨어져 사는 일이 쉽진 않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선택한 것이니 억울하지 않으려면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젠 바로 옆에 병원도 있고 잘하는 애들만 모아놓아 경쟁도 할 만한 이곳에 적응이 됐다. 주말이면 경기 군포시 산본에 있는 집으로 간다. 누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던 10살 남동생은 이제 공부 잘하는 누나를 은근히 자랑하고 다닌다.

꿈을 묻자 “분자생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이젠 로스쿨에도 갈 생각이 생겼어요. 과학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논리적인 제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어요.” 진로로 고민을 하자 최근에 엄마가 한 신문 기사를 보여줬다. ‘네오 엘리트’란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완벽한 영어 실력에 문과와 이과적 소양을 겸비한 새로운 엘리트’라는 의미였다. 일단 고등학교까지 국내에서 마치고 대학은 미국 아이비리그로 갈 계획이다. “세계가 내 말을 경청해줄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같은 학급에는 미국인도 있고 조기유학을 다녀온 아이들도 많지만 서연이는 ‘국내파’다. 미국은 2주 정도 여행을 한 것이 전부다. “어려서부터 반도체 연구원을 총괄하는 아버지가 아침마다 국제전화로 회의를 하곤 하셨어요. 그때 영어 리스닝이 많이 좋아졌죠.” 영어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땐 영어학원을 꾸준히 다녔다. 피아노와 플루트도 계속 하고 있다. 6학년 때부터는 영재교육원에 다녔다. 5살 때부터 수영을 해 전국체전에 경기도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서연이는 “우리 학교는 2박3일 합숙으로 학생을 선발해 인성도 중요하다”고 했다. 입학 당시 경쟁률은 50 대 1을 넘어섰다. 학교 선생님들을 향한 신뢰도 강했다. “매일 파워포인트나 수업자료, 각종 액티비티를 준비해 오시는 등 열정이 넘치시는 데다 대학도 매사추세츠공대(MIT) 같은 곳을 나온 분들”이라고 소개한다. 길을 걷다가 “우리 심심한데 영어로 토론하면서 걸을까?”라고 제안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친구들도 좋다. 이 학교에서 도덕 교과를 가르치는 이선주 교사는 “예전에 일반 학교에 있을 때와 비교해보면 아이들의 수준이 확실히 다르다. 뭔가를 말하면 바로 알아들으니 가르칠 의욕이 더 생긴다”고 말했다. 자신이 “스스로 볶는 성격”이라 좀 힘들다는 서연이에게 14살은 ‘고등학교 정보를 수집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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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방배동 프로게이머 전태양
“게임하나 학원 다니나 힘든 건 마찬가지”

태양(14)이는 21명의 형들과 함께 산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프로게임단 ‘위메이드 폭스’의 최연소 프로게이머로 발탁된 뒤부터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빌라에 있는 숙소에 합류한 뒤 경기 안산 호동초등학교에서 잠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지금은 숙소에서 가까운 방배중에 다닌다.

태양이가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아빠 친구네 집에 저보다 한 살 많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을 통해 게임을 알았어요.” 처음 시작하고는 재밌어서 3년간 매일 4~5시간씩 했다. 대리운전을 하는 아버지와 아울렛에서 일하는 어머니는 아이와 마주칠 때면 종종 “게임 좀 그만하라”고 했다. 4학년부터는 자연스레 게임을 하는 시간이 줄었다. 컴퓨터 게임보다 축구하고 노는 것이 좋아질 때쯤 ‘한빛소프트배 스타짱을 찾아라’ 대회에 나갔다가 준우승을 했다. 인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6학년인 태양이를 발탁해 숙소 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원종욱 수석코치는 “태양이는 또래에 비해 실력이 월등한 데다 집중력과 성실함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중학생 프로게이머를 보긴 쉽지 않을 듯하다. 갈수록 프로게이머 연령이 낮아져 20대 중반만 넘어서면 설 자리가 좁아지니 구단들이 어린 선수의 영입을 자제하기로 했다.

안산에 있는 집에는 1년에 5~6번 간다. 갈 때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남동생은 친구들에게 줄 사인을 해달라고 한다. “부모님도 이제는 프로게이머가 수입이 괜찮은 직업이라 여기셔서 많이 지원해주세요. 숙소에도 자주 찾아오시고요.” 숙소 생활은 규칙적이다. 학교가 끝나면 숙소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연습에 들어간다. 숙소 지하에는 일반 PC방과 같은 형태의 연습실이 있다. 저녁 8시까지 연습하고 저녁을 먹은 뒤 다시 밤 12시까지 연습이다.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다 보니 학교에 가면 늘 피곤하다. 지난해 경기 때문에 2~3일 빠지고 나서부터는 수업도 따라가기 힘들다.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보다 자신이 힘들게 살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같은 반 친구들도 밤 12시까지 학원에 다녀요.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는 거나 제가 12시까지 게임 연습하는 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주변에 자신도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단 친구들에겐 대답이 조심스럽다. “프로게이머가 돼서도 인정을 못 받으면 차라리 공부하는 게 낫습니다. 이쪽 사는 애들은 그래도 공부를 좀 하는데 괜히 게임하다 학원도 못 다니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죠. 어차피 다 똑같은 경쟁을 하며 사는 겁니다.”

프로게이머로 산 지 벌써 3년째. 고민도 깊다. “e스포츠가 더 발전해서 판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전 임요한·이윤열 선수처럼 나이 들어서도 잘하는 선수로 남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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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치동 한이현·이수현·김민재
“저 때문에 대치동 산다는 게 싫어요”

“친구들이 항상 ‘너는 미국서 살다 왔으면서 왜 영어를 못하냐’고 놀려요.” 언북중 2학년에 재학 중인 이현(14)이가 배시시 웃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태어난 이현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아이들의 영어 교육을 위해 부모가 내린 결단이었다. 2년간 살다 왔지만 이현이는 “영어가 제일 싫다”고 말했다. 현대고 1학년인 언니는 이현이보다 훨씬 영어를 잘한다.

지난해까지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생활을 하다가 최근에 다 끊어버렸다. 대신 학교에서 하는 방과 후 학교를 선택했다. 언북중은 현재 ‘방과 후 거점학교’로 지정돼 인근 아이들을 위한 수업을 학원보다 낮은 가격에 제공하고 있다. “학원은 돈만 많이 들고 선생님들 질이 낮은 것 같아 끊었는데, 방과 후 학교도 별로예요. 차라리 학원 선생님들은 문제 잘 푸는 방법이라도 알려주는데….” 방과 후 학교 초기에는 ‘상·중’으로 수준별 수업을 해 ‘상’반에서 공부했는데 몇 달 새 아이들이 확 줄어 이제는 한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은 집 근처에서 세탁소와 비디오·책 대여점을 함께 하고 있다. 엄마는 늘 이현이에게 “영어 단어 좀 외우라”고 한다. “한동네에 사는 사촌동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 4학년인데 학원을 너무 많이 다녀서 불쌍해요. 우리 엄만 그렇게 극성맞은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패션 디자이너가 꿈인 이현이는 “디자인 학원이나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현(14)이는 얼마 전 교회에 와서 기도를 했다. “제발 학원이 없어지게 해주세요.” 대명중에 다니는 수현이는 영어학원이 지긋지긋하다. “영어 단어 시험에 통과 못하면 5시간이 넘도록 잡아둬요. 그러니까 맨날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요.” 대치3동에 사는 수현이는 “대치동은 살기 안 좋은 동네”라고 했다. “지금 사는 집은 좁은데, 이 돈으로 시골 내려가면 대저택에 살 수 있을 것 아니에요. 매일 부모님께 그 얘길 하는데, 부모님은 제 교육을 위해 여기서 살아야 한대요.”

외동딸인 수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왕따’를 당해본 경험이 있다. “왕따나 은따는 늘 있죠. 지금 우리 반엔 없는데, 대신 5학년 때 절 ‘왕따’시켰던 아이와 같은 반이어서 좀 그래요. 그냥 잘 지내긴 하지만요.” 아버지는 용산에서 당구장을 하고 어머니는 삼촌 회사 일을 도와 도배를 해주곤 한다. “엄마는 ‘내가 일하면 일당이 10만원’이라면서 자꾸 일하려고 하세요. 그래서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 많죠.”

어릴 땐 키가 커서 모델을 하란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지금의 꿈은 미용사다. “예전엔 빨리 결혼해서 대학을 안 가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젠 미용 관련 학과가 있는 전문대에 가고 싶어요.” 두 소녀의 꿈은 교실을 벗어나 있었지만 이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여전히 ‘영어 단어’였다.

민재(14)는 시간을 맞춰 만나기 어려워 전화 통화를 했다. “학원에서 영어 단어 시험이 있어서 지금 다 외워야 해요.” 전화 하는 시간에도 숨이 찼다. 휘문중에 다니는 민재는 “학원에서 시험 점수가 떨어져 수준이 낮은 반으로 떨어질까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얼마 전 한의원에 갔더니 건강이 안 좋다고 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테니스를 치러 간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 학교를 거쳐 학원까지 갔다 오면 파김치가 된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는 학원에 더 많이 다녔는데, 지금은 많이 줄인 거예요.” 과학자가 될 생각인 민재는 일단 과학고에 진학할 계획이다. “2학년 때는 물리와 수학을 많이 보충해야 해요.”

대치동 동광교회 황기석 전임전도사는 “이 지역 아이들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부모가 스케줄을 조정하기 때문에 여가 시간이 없다”고 했다. 3년 전까진 서울 강서구 발산동의 교회에 있었다. “그쪽 지역 아이들은 활발하고 시간 여유도 있어 이곳 분위기와 많이 달랐죠.” 아이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봤더니 “나중엔 행복해지겠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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