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의 저점으로 내려가는 때에 이루어져, 최근 몇 달 사이 가까워지고 있는 북-중 관계 눈여겨봐야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뉴욕 필하모니가 평양에 갔다. 그들의 화음에는 울림이 있었다. ‘평양의 미국인들’은 미국 국가를 연주했다. 북한은 대미관계 개선 의지를 국제사회에 보여주고 싶어했다. 뉴욕 필도 을 연주했다. 미국 또한 북한에 다가설 수 있음을 보여줬다. 과거 냉전 시기 음악외교는 얼어붙은 마음의 문을 여는 중요한 계기였다. 그들의 화음이 과연 북-미 관계의 문, 북핵 해결의 문도 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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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불능화’ 완료까지는 가능할 듯
외교관계에서 상대에 대한 이미지는 중요하다. 북한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악의 축’으로 인식돼왔다. 북한 역시 ‘반미’를 체제 정당성의 기반으로 활용해왔다. 그런 점에서 뉴욕 필의 음악외교는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분명 울림이 있다. 미국의 주요 언론은 이번 공연을 냉전 시대의 역사적인 문화외교와 비교한다. 평양 시민들의 반응도 자연스럽다. 미국 사람들이 을 연주한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해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서로에 대한 적대적 이미지의 개선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문화외교의 힘이다. 앞으로 북한과 미국 사이에 다양한 문화 교류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의 북-미 관계에서 보면, ‘울림’은 제한적이다. 북-미 양국이 풀어가야 할 정치군사적 현안이 만만치 않다. 만약 뉴욕 필의 공연이 1년 전에 이루어졌다면, ‘울림’은 더욱 컸을 것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현 시점은 마치 너무도 아쉽게 지나가버린 지난 2000년의 그 뜨거웠던 가을을 연상케 한다. 2000년 가을이 어떠했는가? 조명록 차수가 군복을 입고 백악관에 들어가 빌 클린턴 대통령과 ‘조-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곧이어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가을은 너무 짧았다. 11월 대선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북-미 양국이 꾸었던 ‘춘몽’은 ‘악몽’으로 변했다.
2008년도 마찬가지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미국에서 선거가 있는 해다. 북핵 문제는 협상의 고점에서 교착의 저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신고 문제를 둘러싼 입장 차이가 지속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지원국 해제를 비롯해 적극적인 ‘이니셔티브’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이 떨어지고 있다. 북한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부시 행정부를 상대하기보다, 차기 행정부를 기다리는 쪽으로 생각을 바꿀 것이다.
제한된 시간은 가능한 선택을 낳는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 그것도 아니라면 최악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부시 행정부 입장에서 임기 안에 ‘핵 불능화’를 마무리하고 ‘핵 폐기’ 단계로 전환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핵 폐기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테러지원국 해제를 비롯한 정치군사적 관계 개선에 필요한 상응 조치를 취해야 하고, 경수로 제공 문제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북한의 농축 우라늄 의혹이 해명되지 않는 현실에서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부시 행정부는 결국 임기 내에 가능한 현실적인 목표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마도 핵 불능화의 완료일 것이다.
이미 영변 핵시설을 못 쓰게 만드는 불능화는 80% 정도 진행됐다. 북한이 미국의 상응 조치 지연에 불만을 제기하면서 속도를 늦추곤 있지만, 최소한 이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불능화의 완료는 핵 동결에 머물렀던 클린턴 행정부와 비교해서 분명 진전된 성과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시 행정부는 ‘핵 폐기’의 욕심보다는 ‘클린턴 행정부보다 낫다’라는 자족을 받아들일 것이다.
올림픽을 위해 북한을 달랜다
북핵 문제가 이쯤에서 ‘개점휴업’을 하고, 장기 교착상태로 접어든다면 어떻게 될까? 북한은 과연 2006년처럼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시도 때도 없이 쓰는 건 아니다. 상대의 태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설 때 주로 활용했다. 벼랑 끝 전술을 써도 효과가 없으면, 굳이 상황만 악화시키고 국제적인 제재를 받을 수 있는 선택은 피하려 할 것이다. 지난 20여 년에 걸친 북핵 역사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몇 달 동안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는 북-중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평화적인 환경에서 베이징올림픽을 치르겠다는 중국의 의지는 어떤 외교적 목표보다 앞선다.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최소한 악화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중국은 6자회담이 열려도 미국의 요구를 북한에 전달하기보다 북한의 입장을 미국에 설명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을 향한 중국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북한 역시 생각을 바꾸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북한은 미국을 직접 상대하고, 남북 관계를 활성화하면서, 중국과 거리두기에 나섰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북-미 관계의 동력이 떨어지고, 한국에는 보수정권이 들어섰다. 남북 경제협력의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내년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가 들어서 구체적인 대북정책이 나오려면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남북 관계가 나빠지면 북한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좋든 싫든 북-중 관계의 재정상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마침 올림픽을 치러야 하는 중국의 ‘수요’가 있기 때문에, 북한은 유리한 조건에서 중국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미국은 교착상태에서 다시 중국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 북한을 달래서 올림픽을 무난히 치르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북한 역시 상황관리를 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뉴욕 필의 평양 공연은 관계 진전의 돌파구라기보다, 상황 악화의 방지책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동북아의 정치가 변화하고 있다. 모든 ‘선수들’이 현재 시점의 한계를 알고 상황관리 모드로 전환하려고 한다. 그러면 남북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명박 정부는 현재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북핵 문제와 남북 관계의 연계 정책으로 돌아가고, 남북 경협과 대북 지원을 조건화한다면, 남북 관계의 악화는 불가피하다. 10년 전의 낡은 이념적 접근을 고집한다면 남북 관계의 악화는 물론, 동북아 정치에서 고립될 수 있다. 남북 관계가 악화하고, 한국의 북한 설득 능력이 약화하면, 미국은 통상적으로 남-북-미 삼각 대화보다 미-중-북 삼각 대화에 의존한다.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국가와 대책을 논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북-중 삼각 대화 ‘시너지 효과’
한반도의 안정적 상황관리에서 남-북-중 삼각 대화 또한 중요하다. 북-미 교착 국면에서 그동안 한-중 양국은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 밀접하게 협력해왔다. 중국의 북한 설득 노력과 한국의 대북 협상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왔다. 그러나 새 정부의 중국 경시 정책이 지속된다면, 북한 문제를 둘러싼 한-중 양국의 협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6자회담의 개점휴업이 예상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용’적인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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