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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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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화폐, 두 개의 계급

등록 2008-03-07 00:00 수정 2020-05-03 04:25

쿠바 인민페소와는 1대 25로 교환되는 외국환 페소, 이중 화폐제도가 빈부격차 심화시켜

▣ 아바나(쿠바)=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쿠바의 아바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눈여겨본 것은 사람들이 손에 쥔 돈이었다.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화폐인 ‘외국환 페소’(CUC)와 쿠바인들이 사용하는 ‘쿠바 인민페소’(CUP)가 서로 달랐다. CUC의 환율은 달러화와 유로화의 중간 정도로, CUP와는 1 대 25로 교환되고 있었다.

베이징대 학생은 모두 암달러상[%%IMAGE4%%]

중국도 이와 비슷한 시기를 거쳤다. 1993년 초 방문한 중국에서 마주쳤던 풍경이 오늘의 쿠바와 닮아 있었다. 지금은 단일 화폐인 ‘위안화’가 사용되고 있지만, 개혁·개방 초기 중국에서는 위안화와 이른바 ‘외국환 증서’(FEC·Foreign Exchange Certificate)란 두 가지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FEC로 수입된 물품을 살 수 있었지만, 위안화로는 수입품을 살 수 없다는 점 외에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미화 1달러에 대한 위안화와 FEC의 환전가는 8원과 5원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위안화를 ‘암시장’에서 몰래 환전해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2주간 베이징대학 구내에 머물면서 특이한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중국 대학생 몇몇이 유학생 기숙사 건물 들머리에 진을 치고 있다가, 외국인 학생이 지나가면 낮은 목소리로 “달러 바꿔요”라고 말하곤 했다. 이 때문에 어떤 학생은 “베이징대 학생 모두를 암달러상으로 만들고 있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아바나의 거리를 걷다 보면 길가에 앉아 관광객에게 숙박지를 권하고 식당을 소개하는 쿠바인들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다. 카페나 길 모퉁이에 앉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외국인만 나타나면 아연 활기를 띤다. 가치가 높은 CUC를 벌기 위해 수많은 쿠바인들이 다른 일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관광산업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CUP로 월급을 받는 노동자나 교사, 공무원들과 관광산업에 뛰어들어 CUC를 벌어들이는 운수업 종사자들이나, 식당·숙박 업계 종사자들 사이의 부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단 며칠만 벌이를 해도, 한 달 내내 힘들게 일해서 받는 월급의 몇 배는 거뜬하게 벌 수 있다. 이런 현실은 관광산업 이외의 분야에 종사하는 절대다수 쿠바 국민들의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고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라울 카스트로 신임 국가평의회 의장이 취임 일성에서 ‘통화 단일화’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요즘은 사업이 거의 중단된 상태다.” 아바나에서 시계 판매업을 하는 스위스인 사업가 킬체르만(53)은 울상부터 지었다. 그는 미국의 금수 조치가 하루빨리 해제되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주 고객은 미국에 사는 친지들로부터 미화를 송금받는 쿠바인들이다. 하지만 조지 부시 행정부가 2003년 미국인의 쿠바 여행을 3년에 한 차례로 제한하고, 달러 송금도 3개월에 300달러로 규제하는 추가 제재 조치를 단행한 뒤부터 킬체르만의 고객들 지갑도 말라갔다는 게다.

미국 버지니아산 사과가 버젓이

변화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2월25일 오후 아바나 옛 시가지를 걷다가 마주친 사과 노점상이 이런 분위기를 웅변해준다. 쿠바에선 사과를 재배하지 않기 때문에 주변엔 행인들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비싼 탓에 선뜻 사과를 집어드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외국인을 발견한 행상은 다짜고짜 사과를 들어 보이며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떠벌렸다.

실제로 좌판 옆에 놓인 사과 상자엔 ‘버지니아’란 생산지 표시가 영문으로 박혀 있었다. 철저한 경제 제재에도 미국산 농산물까지 버젓이 쿠바로 들어오고 있는 게다. 하긴 파나마에서 쿠바로 들어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많은 미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반세기 봉쇄를 뚫고, 더디지만 변화는 그렇게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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