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산 의료기관 전화조사, 34.8%가 지정 사실 모르고 48% 응급키드 갖추지 않아
▣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지난해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지낸 강혜정(32·가명)씨는 “우리 병원들이 여성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강씨는 한 여자 어린이가 분만실에 있는 것을 보았다. 간호사 등 의료진들이 “쟤 누구야?” “성폭력 피해 아이래” 등의 말을 낮게 주고받는 것을 들었다.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산부인과 외래도 휴진했다. 아이는 적절한 증거 채취는 물론이고 정신과적 상담 등 성폭력 피해 아동에게 필요한 적절한 처치를 받지 못했다. 병원에는 성폭력 피해자를 진료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장비인 ‘성폭력 응급키트’(이하 키트)조차도 없었다.
“전담의료기관입니까” “여기가 그런가요?”
키트는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원하는 병원에 공짜로 내려보내는 의료용품이다. 키트 안에는 피해 여성과 의사가 작성하게 돼 있는 ‘증거물 채취 동의서’ ‘진료 기록서’ 등의 서류와 손톱 밑 이물질을 채취할 수 있는 손톱깎이·손톱긁개, 털을 확보할 수 있는 빗·종이수건, 피해자에게서 가해자의 정액을 채취하는 데 쓰는 멸균면봉·슬라이드글라스·슬라이드글라스 보관함 등이 들어 있다.
성폭력 피해 여성을 치료하는 일은 민감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르고 꼼꼼한 진료와 증거 채취다. 의사는 피해 여성이 받았을 심리적 충격을 고려하면서도 꼼꼼한 문진을 통해 여성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정확하게 짚어내 기록해야 한다. 진료가 길어지면 여성이 받아야 하는 심리적 상처와 수치심이 커질 수 있고, 짧아지면 꼭 필요한 진료나 증거 채취를 빼먹게 된다. 그 와중에 응급 피임과 혹시 있을지 모를 성병 감염 여부도 살펴야 한다. 강씨는 “시설·의료진이 우수하다고 알려진 대학병원에서 정신과·산부인과·외과 등의 협진은 고사하고서라도 증거 채취를 위한 키트조차 없다는 것이 황당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 전담의료기관’(이하 전담의료기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담의료기관제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2년 도입됐다. 의료기관이 전담의료기관 지정을 신청하면 지방자치단체가 심의해 지정한다. 해마다 지정기관의 수는 늘기 시작해 2007년 12월 현재 333개에 달한다.
은 2월27일 서울과 부산의 전담의료기관 43곳에 전화를 걸어 전담의료기관으로 지정돼 있는 사실을 아는지 조사했다. 전체 43개 기관 가운데 37.2%인 16곳에서 지정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사 중 우왕좌왕하는 응답이 많았다. “거기가 전담의료기관이 맞습니까.” “여기가 그런가요? 제가 확인을 해봐야 하는데….” 서울의 한 산부인과의 간호사는 당황스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웅성웅성 여러 말이 오가고 있었다. “원장 선생님이 아시는 부분인 것 같고 저희는 잘 모르겠는데요.” 이 병원의 문아무개 산부인과 전문의는 “여기가 전담의료기관이라는 얘기는 지금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병원에 온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원장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 피해자가 온다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산의 한 산부인과도 마찬가지였다. 병원 관계자는 ‘전담의료기관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런 문제라면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더 실망스런 것은 키트의 보유 현황이다. 여성부 담당자는 “전담의료기관으로 지정된 병원 가운데 산부인과·종합병원 등은 성폭력 응급키트를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현장에서 그 비율은 40%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비인후과·신경정신과·치과 등을 제외한 서울·부산 전담의료기관 43곳 가운데 ‘키트가 없다’고 답한 곳은 서울 15곳, 부산 6곳을 합쳐 21곳(48%)이었다.
키트가 없다고 답한 서울동부병원의 한 간호사는 “일단 병원에 찾아오는 성폭력 피해자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예전에 한 번 피해자가 온 적이 있긴 한데, 그때 정신과 선생님, 산부인과 선생님과 상담을 했어요. 그 밖에 피해자 몸에서 증거(정액 등)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우리 병원에서는 안 돼서 다른 병원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서울동부병원은 서울시가 서울의료원에 위탁을 맡겨 운영하는 시립병원이다.
옮겨다니면서 심리적 상처 더할 수 있어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의료 업무 매뉴얼’을 작성한 원형섭 국립경찰병원 응급의학과 과장은 “키트 사용은 성폭행 피해자를 위한 가장 우선적인 처치”라고 말했다. 이른 시간 안에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증거 확보가 쉽지 않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여성에게 심리적인 상처를 더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의사가 키트 이용 방법을 알고, 순서에 따라 피해자를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제도가 현장에서 겉도는 것은 강제조항이나 의무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키트 보유도 ‘강제사항’이 아니어서 키트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 여성부에서는 사후 관리도 하지 않는다. 이산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원은 “성폭력 피해자 전담의료기관을 지정하고서는, 단 한 번도 이 병원들이 키트를 갖고 있는지, 치료는 적절히 하고 있는지를 체크한 적이 없다”며 “그러니까 해당 병원들이 자신들이 전담의료기관인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일도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부 담당자는 “전담의료기관이 잘 운영되려면 처벌과 인센티브가 함께 가야 하는데 처벌은 법무부 소관이고 인센티브는 보건복지부 소관이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담기관제 무용론도 나온다. 2006년 9월, 전담의료기관으로 지정된 건국대학병원 관계자는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 정신과적 치료, 법의학적 증거 채취, 외상 치료, 성병 검진 등이 잘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통상적인 치료만 이뤄질 뿐이어서 전담의료원의 의미가 무색한 것 같다”고 했다.
예고 없는 폭력, 예고 없는 환자의 방문
취재 과정에서 접한 병원들은 ‘케이스가 드물다’거나 ‘그런 환자를 접한 적이 없다’는 말로 성폭력 피해자 문제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성폭력은 예고하고 닥치는 사고가 아니다. 성폭력 피해로 병원을 찾는 환자도 예고하고 찾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세심하게 배려받아야 할 치명적인 상처를 안고 있는 환자가 들이닥칠지 모르지만 병원은 “그 수가 적다”며 나몰라라 하고만 있었다.
은 서울과 부산의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여성부 지정) 43곳의 현황을 조사했다. 전화를 직접 걸어, 통화한 의사·간호사·직원에게 해당 의료기관이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인지를 아는지와 성폭력 피해자 처치 과정에서 증거 채취를 위해 필요한 성폭력 응급 키트가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서울 지역에서 조사한 32개 의료기관 중 11곳이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인지조차 몰랐으며, 50%에 가까운 15곳이 성폭력 응급 키트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부산의 11개 전담 의료기관 중에서도 4곳이 ‘전담 의료기관’인지를 몰랐고, 6곳이 성폭력 응급 키트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한의원·신경정신과·내과·치과 등 2차 진료기관은 조사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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