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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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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가 살아났어요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살림] 죽어가던 지시제를 생태공원으로 되살리는 전주 우미아파트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제 얘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사람들은 저에게 ‘지시제’라는 이름을 붙여줬어요. 한때는 저도 잘나가는 농업용 저수지였답니다. 전북 전주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1990년까지만 해도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때 물을 토해주며 큰 사랑을 받았는데, 그 뒤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어요.

미꾸라지 풀어 황소개구리 잡아

1995년 이곳 전주시 평화동에 아파트가 급속하게 들어서면서 제게 ‘평화’동은 ‘전쟁’동으로 바뀌었답니다. 각종 폐기물과 쓰레기가 제 속에 쌓이면서 물이 썩기 시작했어요. 악취가 나는 것은 당연했죠. 모기 유충이 저를 좀먹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황소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며 뛰어다녔어요. 그놈들은 다른 개구리종의 올챙이와 물고기 알까지 먹어댔어요. 주변 아파트 주민들은 제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와 모기떼, 황소개구리 무리에 시달린다며 저를 매립하자고 했어요. 억울했어요. 그게 어디 제 탓인가요?

그런데 우미아파트 주민들이 조금 다른 목소리를 냈어요. 2003년 8월 이 아파트 주민 60여 명이 ‘지시제 살리기 주민모임’을 결성해 두 차례 간담회도 열었답니다. 자연습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거죠. 주민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제 몸에 떠다니는 쓰레기부터 걷어냈어요. 솔직히 제가 ‘한 덩치’ 해요. 1만5200여㎡(4600여 평) 크기랍니다. 한 번 청소하는 데만 3시간이 넘게 걸려요. 주민들은 열심히 저를 깨끗하게 해줬어요. 근처에 있는 지곡초등학교 학생 100여 명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와 청소를 한 일도 있는데, 그때부터 주민들의 관심이 더 커졌답니다.

‘지시제 살리기 주민모임’의 이원택(39)씨는 그해 10월 ‘가을 문화제’를 열었어요. 우미아파트 주민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지요. 그림 그리기 대회, 노래자랑, 지시제 사진 전시회가 진행됐어요. 미꾸라지 방사 운동과 황소개구리 잡기 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이 아주 즐거워했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2천 명이 넘는 주민들이 모인 건 그때 처음 봤어요.

주민들은 제 몸에 미꾸라지 200kg을 풀어놨어요. 미꾸라지는 모기유충을 잡아먹어요. 황소개구리 잡기 운동을 할 때는 제 속이 다 시원했어요. 주민들은 낚싯대로 그놈들을 낚았어요. 낚싯대를 준비하지 않은 주민들은 막대기를 동원했죠. 행사가 끝나고 보니 양파를 담는 붉은 망 300개가 황소개구리로 가득 찼어요. 그 뒤로 해마다 가을 문화제가 열리지만 더는 황소개구리를 잡지 않아요. 한 번의 행사로 씨가 말랐기 때문이죠.

우미아파트 주민들이 시작한 저를 살리자는 운동은 인근 아파트로도 번져 “매립해 없애자”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되살려 활용하자”는 목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전주시는 2006년부터 9억원의 예산을 들여 저를 수술하고 있답니다. 생태공원으로 만들겠대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요.

가을에는 감 따서 양로원·노인정에

우미아파트 주민들은 지시제 살리기 운동뿐만 아니라 나눔의 정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어요. 매년 정월 대보름에 ‘풍물굿 잔치’를 열어 아파트 단지는 물론 인근 상가도 돌며 무병·무탈을 기원해줘요. 2003년에만 해도 처음이라 어색해하던 상가 주민들이 이제는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기까지 하죠. 또 가을이면 아파트를 풍성하게 수놓는 감을 함께 따 지역 양로원과 노인정에 보내요. 죽어가는 저를 살린 주민들이 사라지는 마을을 살리고 있어요. 저는 이런 이웃들이 있어 살맛 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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