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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불신!

등록 2007-12-28 00:00 수정 2020-05-03 04:25

BBK와 삼성 동시 특검… 검찰은 어떻게 권력 ‘시녀’에서 독자 ‘공룡’ 권력이 되었나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12월20일 임명된 조준웅 특별검사의 ‘삼성 특검팀’은 새해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활동하게 된다. ‘이명박 특검팀’의 활동 기간은 1월 중순부터 이명박 당선자의 대통령 취임 직전인 2월 중순까지로 예상된다. 두 특검팀의 활동 기간이 30~40일 정도 겹치는 이례적인 ‘쌍특검’이다.

참여정부 들어 상당한 자율권 행사

두 특검이 동시에 진행된 적이 예전에 한 번 있긴 했다. 1999년의 ‘옷로비 의혹 사건’(최병모 특검)과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강원일 특검)에 대한 특검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르다. 쌍특검의 조사 대상이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이라는 점에서다.

쌍특검 조사 대상의 중량감으로 보아 ‘특검이’로 시작하는 뉴스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쏟아내는 다음 정부의 정책 얼개 못지않게 세간의 눈과 귀를 잡아끌 듯하다. 검찰 불신 시대에 빠진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자화상이다.

법무법인 남산의 정미화 대표 변호사는 “특검법 발의는 중요한 공직자, 정치적 사건에 대해 검찰이 소신을 갖고 전문가로서 공정한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의구심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검찰이 의구심을 받고 있는 정치적 사건에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행동을 한” 꼴이 됐다고도 했다.

대통령 선거 전인 12월8일 의뢰로 실시된 ‘리서치플러스’의 여론조사 결과는 검찰에 대한 깊은 불신의 골을 그대로 드러냈다. ‘검찰의 BBK 수사 결과 발표(12월5일)가 이명박 후보와 관련된 의혹을 제대로 밝혔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55.2%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렇다’는 답변은 32.8%였다. ‘이명박 특검법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찬성’이 49.2%로, ‘반대’ 41.4%보다 많았다. 이 후보 지지율이 수사 결과 발표 뒤 5.0%포인트 오른 45.2%였다는 사실과 극명히 대비되는 수치였다.

검찰에 대한 깊은 불신은 BBK 수사에만 그치지 않는다.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 폭로 뒤에도 검찰은 수사 의지를 보여주지 못해 특검 추진을 자초했다. 삼성 특검법안의 ‘제정 이유’에 이런 문제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삼성그룹이 비자금으로 검찰 수뇌부와 수십 명의 검사에게 명절이나 휴가철에 뇌물을 정기적으로 제공하면서 관리해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는 상황에서 검찰에서 철저하게 관련 의혹을 수사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 국민의 신뢰를 얻기는 어려울 것임.’ 에서 “검사가 활동하기 때문에 시민은 평온을 누린다”고 했던 몽테스키외의 말이 무색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검찰에 대한 불신은 주로 검찰이 정치권력의 도구로 활용된 데서 비롯됐다. 검찰에 붙어 있는 ‘권력의 시녀’라는 비아냥 섞인 딱지는 그 상징이다. 검찰은 참여정부 들어 정치권력으로부터는 상당한 자율성을 획득해 오명의 딱지를 뗀 것으로 평가된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초반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대화’ 자리에서 대통령의 말을 서슴없이 맞받아친 검찰의 모습은 이를 반영하는 일례다. 이제 검찰 수사에 대한 청와대의 개입은 거의 사라졌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도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이 높아졌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왜일까?

건국 6년, 경찰 불신이 검찰권 강화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위정희 시민입법국장은 “검찰이 누구 눈치를 본다기보다 미리 나서서 자신들의 직분에 안 맞게 행동하고, 나름의 권력 구조를 갖추는 형태로 나아가는 것으로 비친다”고 말했다. “BBK 사건이나 삼성 비자금 사건의 중간 수사 발표는 의혹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과연 수사 과정에서 충실했는지 의문을 갖게 한 행태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잇따라 특검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위 국장은 “피의자 인권을 배려하는 제도적 변화를 꾀하는 모습도 일부 있었지만, 실제적인 ‘국민과의 관계’에선 변화가 없고 자기 권력을 만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의심을 사게 한다”고 덧붙였다. 정치권력의 눈치를 안 보게 된 대신 국민의 눈치를 보도록 하는 장치가 없다 보니 검찰 스스로 권력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선 직전인 12월16일 이명박 후보의 광운대 특강을 담은 동영상 폭로 직후 검찰이 보인 태도는 그들이 일반인의 법감정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BBK 사건 수사를 맡았다가 부실 수사 논란에 휩싸인 김홍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는 브리핑에서 “수사팀은 (이명박 후보의) 언론 인터뷰, 특강 동영상, (이 후보) 명함과 무관하게 객관적인 증거자료에 의해 BBK가 김경준씨 소유라는 것을 확인했다”며 동영상 공개로 수사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일찌감치 못박았다. 더 재미있는 발언도 있었다.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우리는 객관적 물증으로 결론을 내렸다.” 동영상에서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고 한 이명박 후보의 명백한 발언을 ‘믿을 수 없다’고 강변하는 듯한 검찰의 태도는 헛웃음을 자아냈다.

참여정부 들어 사법 개혁 실무작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법무법인 시민의 김선수 대표 변호사는 “정치권력이 원하는 대로 하는 도구 역할을 하다가 이젠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가 없어지니 검찰이 독자적인 권력으로 발전해 조직 논리로 움직이고 있다”며 “어떻게 보면 옛날보다 더 통제하기 어려운 권력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외국 검찰과 달리 한국의 검찰은 수사, 기소, 공소 유지, 형 집행권 등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수사는 기본적으로 경찰이 하고 검찰은 공소 유지를 맡는 준사법기관 역할을 한다. 우린 검찰에서 수사까지 독점하고 있다. 견제할 데가 없다.” 이런 구조에선 납득할 수 없는 쪽으로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 책임이 모두 검찰로 넘어가고, 신뢰 상실로 이어진다는 게 김 변호사의 진단이다.

한국의 검찰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갖게 된 배경에는 해방 뒤 사법 분야의 일제 식민지 잔재를 털어내는 과정이 얽혀 있다. 한국 검찰의 독특한 입지를 결정지은 것은, 건국 6년 만인 1954년에 발효된 ‘제정 형사소송법’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의 ‘조선형사령’을 대체한 형소법의 제정 과정에서 최대 쟁점은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관계를 ‘미국식의 상호 협조 관계로 할 것이냐’, ‘일제식의 상명하복 관계를 유지시킬 것이냐’였다. 결론은 상명하복 관계의 법제화였다. 한인섭 서울대 교수(법학)는 (1998)에서 “한국 경찰이 중앙집권화돼 있는 터에 경찰에 수사권까지 전적으로 맡기면 ‘경찰 파쇼’ 경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어 수사의 주도권을 검찰에 맡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수사=경찰’ ‘기소=검찰’의 미국식 제도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경찰에서 진술은 ‘칠판 글이다’

결국 경찰에 대한 깊은 불신이 검찰권의 강화로 이어졌던 셈이다. 형소법 제정 당시 경찰에 대한 불신은 경찰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 제한으로 나타났다. 고문 등 강제적·유도적 자백에 대해선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경찰에서 작성한 신문조서의 경우 공판 준비 또는 공판 기일에 그 내용을 인정할 때에 한해 증거로 삼을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초대 대법원장을 맡았던 김병로 선생과 함께 형법전 제정 작업을 이끈 법제편찬위원회의 엄상섭 위원은 이를 두고 “경찰에서 한 진술은 마치 칠판에 써둔 글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언제든지 지울 수 있도록 해 고문의 실효성을 없애려 했던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제하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경찰기관의 고문을 받아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던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고문을 근절하려면 검사가 작성한 조서에 대해서도 같은 조건을 부과해야 했지만, 제정 형소법에서는 검찰 기관의 조서는 ‘그 성립의 진정함이 인정된 때’에는 증거능력이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검찰 조서에까지 증빙력을 주지 않을 경우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는 좋지만, 소송 지연 등 여러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란 판단에서였다고 한인섭 교수는 전한다. 경찰보다는 검찰의 인적 요소가 우월하다는 점도 이런 판단의 한 근거였다. 김선수 변호사는 “당시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 인정은 10년 정도 한시적 조처로 여겨졌지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 들어 검찰권은 더 강해져 ‘검찰 파쇼 체제’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1973년 1월 비상입법 기구인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개악된 형소법이 그 실마리였다. 당시 개정법에 따라 기소편의주의 아래에서 검찰권 행사에 대한 중요한 견제 수단인 재정신청은 사문화되고 구속적부심 제도는 전면 폐지됐다. 이에 따른 검찰권 강화는 곧 인권보장의 후퇴인 동시에 법원과 변호인 권한의 약화를 뜻했다.

사개추위 개혁에 조직적으로 저항

유신 시절의 형소법 개악은 1988년 탄생한 헌법재판소가 형소법상의 문제에 대한 일련의 구제장치를 만들어내면서 다소 개선되지만, 무소불위의 검찰권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에 이를 때까지 정치권력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2002년 11월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 조아무개씨가 물고문 등 가혹행위로 사망한 사건 직후 들끓었던 형소법 개정 논란 또한 별다른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났다.

노무현 정부 들어 검찰 수사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검찰 견제장치를 마련하려던 시도는 제한적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한 참여정부의 검찰 개혁 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수사권 일부를 경찰로 넘겨 검·경 관계의 균형을 꾀하고 검찰권을 견제하자는 목적이었다. 둘째는 공직부패수사처 설립 방안이다. 이는 판검사를 비롯한 고위 공직자의 부패를 맡는 별도 수사기관을 만들자는 것으로 이 역시 검찰권 견제 목적을 띠고 있었다. 마지막 셋째는 배심원제 도입 등 공판중심주의 확립이었다. 세 가지 방안 중 일부나마 성과를 본 것은 공판중심주의뿐이었다. 앞의 두 과제는 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공약사항이었음에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경찰인력의 자질에 대한 불신, 검찰 쪽의 전방위 로비, 정치권의 관련 법안 처리 비협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요인은 검찰의 조직적인 저항이었다.

정미화 변호사는 “검찰이 ‘할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손에 쥐고 있다 보니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히곤 한다”며 “할 수 있는 일만 쥐고 이걸 제대로 하는” 게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라고 밝혔다. “법원도 마찬가지지만, 검찰은 국민을 위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지위에서 권력 행사를 하지 못했다. 현장에서 민원인과 섞이면서 불신을 더 많이 받게 된다.” 정 변호사는 “사소한 사건 처리는 경찰에 넘겨주고 인력과 자원을 중요한 사건에 집중해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바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검·경 수사권 조정 같은 개혁 조처를 통해 검찰의 신뢰 문제가 풀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신뢰 회복’보다 ‘권력 향유’를 더 선호한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법무부를 탈검찰화해라”

사법개혁 작업 이끌었던 법무법인 시민의 김선수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시민의 김선수(47) 대표 변호사는 과 만난 자리에서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가 없어지니 독자 권력이 돼 조직 논리로 움직인다”며 검찰의 권력화를 경계했다. 이는 검찰의 수사 결과에 대한 불신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김 변호사는 진단한다. 김 변호사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 기획추진단장, 청와대 사법개혁 비서관으로 활동하며 참여정부 사법 개혁의 실무작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인터뷰는 12월18일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시민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대선 전날로, BBK 사건을 둘러싼 공방이 절정으로 치달아 있던 때였다.

BBK 수사 결과 발표 때 들었던 생각은?
=허허. 뭐, 그냥…. 검찰 내부에선 특검 해도 결과가 바뀔 여지가 없다고 자신하는 모양이던데. 글쎄,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하나(결론을 내리나)?
BBK를 자신이 설립했다는 이명박 후보(12월19일 대통령 당선자)의 광운대 특강 내용을 담은 동영상 공개 뒤 검찰은 사람의 말보다 객관적인 증거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본인이 얘기한 건데 그 이상 확실한 증거가 어딨나? 그럼 이명박 후보가 그때 사기치고 다녔다는 것인가?
삼성 비자금이나 BBK 사건에 대해 특검을 지지하는 여론이 절반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검찰의) 자화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을 개혁하려고 했다가 결국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나 공직자부패수사처(공수처) 설립은 대통령 공약사항임에도 무산됐다.
검찰 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이유는?
=검찰의 힘이 막강한 것 같다. 국회 법사위를 봐라. 검사 출신들이 핵심 위치에 있다. 법무부도 ‘탈검찰화’해야 하는데, 검찰국과 법무실을 검찰들이 장악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돼 정치적 책임을 지는 자리다. 검찰총장은 정치적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지 않다. 따라서 법무부를 탈검찰화해 검찰이 ‘문민 통제’를 받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대통령의 의지가 약했던 것 아닌가?
=(의지가 있어도) 만만치 않은 것 같더라. 법무부 인권국장, 출입국관리국장 등을 개방직화했지만 핵심인 검찰국이나 법무실은 여전히 검사들로 채워져 있다.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공수처를 도입하려고 했다. 삼성 특검과 연계해서라도 처리하려 하지 않았나. 역부족이었다. 열린우리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할 때 추진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텐데…. 법사위원장을 한나라당에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한국 검찰은 일본 제도를 복사했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일본의 경우도 도쿄지검 특수부 때문에 ‘검찰 파쇼’ 얘기까지 나온다. 그런데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 때 경찰 쪽에선 일본의 경찰만큼이라도 (권한을) 달라고 했다. 한국 검찰은 수사기관을 겸하면서 조서의 증거능력을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보니 비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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