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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를 바꾼 자 소송을 얻으리니?

등록 2007-12-14 00:00 수정 2020-05-03 04:25

연예인 ㅎ씨를 둘러싼 법정 싸움, 음해·소송·협박에 시달리는 스타들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9년이라는 시간도, 지난 상처를 말끔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정상급 스타 반열에 오른 한 여자 연예인이 겪은 성폭행 미수사건. 이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줄로만 알았던 그 일이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증거 조작’과 ‘위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말이다.

1998년 여름. 그때 ㅎ씨는 무명의 연예인이었다. 이제는 종영된 한 공중파 방송사의 해외 오지 체험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 그해 7월19일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으로 촬영을 떠났다. ㅎ씨보다 인지도가 높았던 배우 이아무개(31)씨가 출국 이틀 전에 ‘펑크’를 냈기 때문이다. ㅎ씨는 시쳇말로 ‘땜빵’이었다.

다시 법원으로 간 그때 그 강간미수

일주일 뒤 귀국한 ㅎ씨는 함께 촬영을 떠났던 외주 제작사 정아무개(46) PD를 ‘강간치상’ 혐의로 고소했다. ㅎ씨는 촬영 마지막 날이던 7월22일 오후 11시30분께 정 PD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성폭행을 당했을 때 입고 있던 찢어진 원피스와 파랗게 멍든 사진 등이 증거로 제시됐다. 정 PD는 ‘강간미수’죄가 인정돼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유죄’ 취지로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날은 2000년 2월11일이다.

그 사건 이후 9년이 흐르는 동안 ㅎ씨에게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무명 연기자에서 이제는 이름만 들으면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아는 정상급 연예인이 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06년 4월 무명 시절부터 함께했던 소속사를 떠나 새 소속사에 둥지를 튼 것이다. 전 소속사가 ㅎ씨가 벌어들인 돈을 똑 부러진 이유 없이 지급하지 않아서였다. 이 과정에서 ㅎ씨는 전 소속사 쪽과 법정 다툼을 벌이는 홍역을 겪은 끝에 결별할 수 있었다.

지난 9년 동안 ㅎ씨는 마음이 편했을까. 알 수 없다. 반격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들었다. 9년 전 ‘그때 그 남자’였던 정 PD가 “돈 1억원을 물어내라”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정 PD는 지난달 서울중앙지법에 낸 소장에서 “ㅎ씨가 증거를 조작해 나를 성폭행범으로 몰았다”며 “그로 인해 퇴직, 이혼, 부모님의 사망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ㅎ씨의 변호인은 “정 PD는 2000년에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며 “항소 당시 범행을 자백했다가 지금 와서 증거 조작 운운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맞서고 있다.

은 이번 사건과 관련된 공식 문서들인 정 PD의 피의자 신문조서(1998년 9월11일 작성), 1·2·3심 판결문, 정 PD가 ㅎ씨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면서 법원에 제출한 소장 등을 검토하고, ㅎ씨의 전·현직 소속사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 그 과정에서 대중은 좀처럼 알기 힘든,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대한민국 연예계의 추악한 작동 원리가 날것 그대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전소속사 관계자가 증거 조작 말해줘”

시계추를 9년 전으로 돌려보자. 정 PD와 ㅎ씨, 카메라 감독 안아무개씨는 1998년 7월19일 말레이시아로 출국했다. 정 PD는 “ㅎ씨는 연기자로서의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좋은 화면이 나올 리 없었다. 화가 난 정 PD는 ‘○년’ ‘○ 같은 년’ ‘○할 년’ 등의 욕을 써가며 ㅎ씨를 압박했다. ㅎ씨는 “공중파 드라마에 조연급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ㅎ씨는 연예계에서도 ‘성공 욕구’가 강한 여자 연예인으로 꼽힌다. 경력을 속이고, 견디기 힘든 모욕을 참는 것은 연예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마지막 날이었다. 정 PD와 ㅎ씨는 뒤풀이를 겸해 술을 마셨다. 카메라 감독은 피곤하다며 먼저 숙소로 향했다. 자리를 끝낸 둘은 (방으로 들어가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다르지만 어쨌든) ㅎ씨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진술이 엇갈린다. ㅎ씨는 “정 PD가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주장했고, 정 PD는 “그런 일은 없다”고 맞섰다. 둘 사이의 몸싸움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실제 성폭행은 이뤄지지 않았다(그래서 법원이 인정한 정 PD의 죄목은 ‘강간미수’다). 다음날 셋은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정 PD는 귀국 후 ㅎ씨의 소속사에 전화를 걸어 “ㅎ씨의 자질 부족으로 제대로 된 촬영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방송사 쪽에서 불방 결정을 내리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겠다”고 말했다.

ㅎ씨가 속해 있던 ㄷ사의 간부급 직원인 ㅈ아무개(36)씨는 과의 인터뷰에서 “촬영에서 돌아온 ㅎ씨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ㅎ씨에게 “증거가 있냐”고 물었다. ㅈ씨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보면 ㅎ씨가 “만들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증거 조작이 이뤄진 곳은 경기도 성남시 정자동에 있던 ㅎ씨 전 소속사 사장의 집으로 모든 증거 조작 과정을 ㅎ씨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정 PD와의 몸싸움 흔적이라며 멍 자국을 화장품으로 그린 것도 ㅎ씨고, 원피스에 가위 자국을 낸 뒤 손으로 찢은 것도 ㅎ씨이며, 검찰에 제출할 멍 자국을 찍기 위해 1회용 카메라를 사온 것도 ㅎ양이라고, ㅈ씨는 주장하고 있다. ㅈ씨는 “그때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며 “늦게나마 정의가 바로 서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 판결에서 ㅎ씨가 제출한 멍든 사진 등의 증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 PD는 “9년 전에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하지 않기 위해 ㅎ씨 소속사 쪽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ㅈ씨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들은 것은 지난해 12월입니다. 몇 달간 고심한 끝에 소송 준비에 나서게 됐습니다.” ㅎ씨의 현 소속사 쪽에서는 “20대 초반인 여성이 증거 조작을 주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본인도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한 ㅎ씨 소속사 관계자는 “ㅈ씨는 어불성설인 얘기를 지어내 ㅎ씨를 흠집내려는 시도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정 PD 변호사비도 전 소속사가 부담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연예계에서 소속사 분쟁은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무명 연예인의 경우 애초에 계약서 자체를 작성하지 않거나, 계약을 맺었다 해도 매우 불공정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무명 연예인과 소속사가 맺는 계약은 대부분 10년으로, 이익금을 나누는 조항도 모호한 경우가 많다. ㅎ씨도 처음 ㄷ사와 일하게 됐을 때 계약서조차 쓰지 않았다.

연예인의 전속계약은 근로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믿기지 않겠지만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연예인들이 부지기수다. 배우 권상우씨 사례에서 보듯, 소속사를 옮기려는 남자 연예인은 조직 폭력배에게 협박을 당하고, 여자 연예인의 경우 ‘×양 비디오 괴담’에 시달려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ㅎ씨의 전 소속사 쪽의 의도를 짐작해볼 만한 진술이 있다. 정 PD는 “이번 소송의 변호사비는 ㅎ씨의 전 소속사 쪽에서 부담했다”고 말했다.

ㅎ씨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증거 조작을 판단하는 것은 법원의 몫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은 남는다. 언어 폭력이 난무하고, 여자 연예인의 경우 일상적인 성폭행 위험에 노출돼 있으며,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다는 증언이 소속사를 바꾸고 떠난 뒤 쏟아져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의 연예계는 평범한 사람들이 좀체 살아내기 어려운 공간같이 느껴진다. 무간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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