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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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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때 설명하지 않았나요

등록 2007-11-30 00:00 수정 2020-05-03 04:25

소통 부재로 벌어진 의료소송 사례들…의사에게는 진단 결과를 쉬운 말로 이야기해줄 ‘설명의 의무’가

▣ 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엄마가 계속 토하시고 명치끝이 아파서 식사를 못하세요.” 민지희(37)씨는 같은 말을 간호사에게 몇 번이고 반복하며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나 간호사는 진통제와 구토방지제만 주사했다. 의사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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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을 호소하는데도 의사는 오지 않아

2005년 8월18일 당시 69살이던 민씨의 어머니 정영근씨는 담낭암 치료 과정의 일환으로 암세포를 죽이는 색전술을 받았다. 두 번째 시술인데 처음과는 너무 달랐다. “명치끝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며 식사를 전혀 못했고 먹은 건 다 토했다. 하루에 구토만 20차례 했다. 민씨가 답답하고 분통 터진 건 “환자가 계속 통증을 호소하는데, 의사가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것”이었다. 정씨가 색전술을 받고 나온 지 만 28시간이 지난 다음날 오후에야 담당 레지던트가 병실에 왔다. 곧바로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민씨는 왜 옮기는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의사와 환자의 첫 만남은 ‘진찰실’에서 일어난다. 의사는 이때 환자의 말에 귀기울여 증상을 꼼꼼하게 듣고 진단해야 한다. 진단이 끝나면, 진단 결과를 환자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설명해줘야 한다. 의사의 ‘설명의 의무’가 충실히 이행될 때 의사-환자 모두 만족하는 ‘서로 통하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민씨 어머니를 치료한 의료진들은 ‘소통’의 전제가 되는 기본적인 설명을 아무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중환자실로 옮기기 전 간호사가 와서 소변을 받아내고 담당 인턴도 와서 통증 부위를 꾹꾹 눌러댔지만, 그 과정에서도 왜 환자가 17시간 동안 소변을 보지 못했는지, 왜 28시간 동안 통증이 이어졌는지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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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민씨는 “의료진이 아무런 얘기도 없기에 어머니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 거라고 오해했다”고 말했다. 민씨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긴 지 12시간 만에 사망했다. 사망하기 1시간 전 민씨가 중환자실을 급히 나서는 레지던트를 붙잡고 “우리 엄마, 고비는 넘긴 거죠?”라고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상태가 안 좋으니 가족을 모이게 하세요.”

민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의료소송을 제기했다. 그가 의료소송을 결심한 것도 담당 레지던트의 한마디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병원에 가서 “왜 한 번도 오지 않았냐”고 따지자, 담당 레지던트에게서 돌아온 말은 “그때 더 중요한 환자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민씨는 “나쁜 맘이지만, 순간 ‘내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민씨는 “의사에게는 환자들이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에 불과하겠지만, 환자 개개인은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라며 “그걸 모르는 의사는 결국 또 우리 엄마 같은 피해자를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소송 결과 진료 과정에서 의사의 과실로 패혈증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의사들이 시술 뒤 바로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패혈증을 발견해 치료를 했다면 어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중환자실에 온 뒤에라도 시술 과정에서의 실수를 점검하고 환자의 상태를 솔직하게 보호자와 얘기했다면 아무 준비 없이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일만은 없지 않았을까. 민지희씨는 말했다. “소송에 이겨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한 템포 쉬어가는 게 필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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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모(46)씨도 병원 쪽의 무사안일한 대처로 삶의 날개가 꺾였다. 그는 현대자동차에서 VIP 의전 업무를 담당하는 헬기정비과장이었다. 권씨는 2003년 목 뒤가 갑자기 너무 아파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권씨에게 진통제를 놓았다. 그러나 진통제를 놓은 뒤 목이 낫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왼쪽 다리에 이어 오른쪽 다리까지 마비 증상이 왔다. 나중에 보니 권씨가 맞은 진통제는 혈액 응고를 막는 항응고제인 헤파린과 유로키나제였다. 의학 서적에는 “헤파린과 유로키나제는 투여 전 반드시 핵자기공명장치(MRI)나 컴퓨터단층촬영(CT)을 통해 내부 출혈이 있는지를 확인한 뒤 투여해야 한다”고 돼 있다. 부작용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권씨의 병명은 ‘급성척수경막하출혈(이하 경막하출혈)이었다. 권씨는 “무슨 진통제를 놓는다, 왜 마비가 왔다 등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이 그저 진통제만 주사했다”고 말했다. 권씨는 “그때 의사들이 내 증상을 제대로 듣고, 원칙대로 MRI를 찍어 출혈 여부를 확인했다면 지금과 같은 영구마비 상태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사례연구에 따르면, 권씨의 병인 경막하출혈은 완치율이 30%, 부분치료율이 40~50%다. 투약 전에 의사들이 환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신이 있다면 ‘환자의 삶’을 좌우하는 의료 사고도 훨씬 줄어들거나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진료할 때 의사들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진행 과정을 파헤친 책 (해냄 펴냄)의 지은이 제롬 그루프먼은 “‘속도전’이 중요한 응급실일수록 생각의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루에 2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 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소개했다. 의사들의 3분의 2가 신약을 처방할 때 복용 기간과 발생 가능한 부작용을 환자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절반은 정확한 복용량과 복용 횟수를 설명하지 않았다. 제롬 그루프먼은 “정신없는 속도가 의사들을 집어삼킨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는 종합병원 응급실이 아닌 1차 동네병원도 언제나 시간 싸움이다. 환자가 많을수록 수입이 증가하는 행위별 수가제이기 때문이다. 제롬 그루프먼은 환자들이 몰아닥치는 동네 소아과 의사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쌩쌩 달리는 기차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라. (바깥에선)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구별해낼 수가 없다. 매일같이 들이닥치는 환자들 대부분은 바이러스성 또는 만성 인후염인데, 그중에서 가끔 있는 수막염을 찾아내기란 짚더미에서 움직이는 바늘 찾기다.”

홍석우(48)씨는 그렇게 ‘달리는 기차’ 같은 1차 진료기관에서 의사에게 제때 진단을 받지 못해 ‘목소리’를 잃었다. 그는 30년간 밤무대에 서며 ‘홍길표’라는 이름으로 음반도 낸 가수였다. 홍씨는 수많은 만성인후염 환자 중 드문 ‘성문암’ 환자였다. 지난해 6월 성문암 4기 판정을 받았다. 홍씨가 억울한 건 2001년부터 2006년까지 6년 동안이나 성대가 좁아지는 느낌, 목소리가 변하는 증상을 가지고 똑같은 동네병원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쉰 목소리가 한 달 이상 지속되는 증상’은 성문암을 의심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증상이라고 이비인후과 전문의들은 입을 모은다. 홍씨가 다녔던 경기 의정부에 있는 병원의 윤아무개 의사는 그가 처음 갔던 2001년 내시경을 한 번 해본 뒤 줄곧 감기약 처방만 했다. 윤 의사는 “환자가 구역질이 심해 간접 후두경 검사를 하기 힘들었고, 약 처방을 하면 증상이 나아져 다른 의심을 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가수

홍씨는 “마지막에 다른 병원에 가보지 않았다면, 나는 감기인 줄로만 알다가 갑자기 호흡곤란으로 죽었을지 모른다”며 “의사가 내 상태에 대해 한 번만 더 생각해줬더라면, 내가 내 상태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이 있게 물어볼 수 있었더라면…”이라며 말을 흐렸다. 그는 목소리가 잘 안 나와 입 모양으로만 대화를 한다. 그는 지금 암세포가 식도로 전이돼 식도암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소통’이 없는 진료실에서, 늦게 발견된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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