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내환을 돌파하기 위한 내부 단합의 이벤트… 종단은 흔들리는 승가공동체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 문경=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영상= 은지희 피디 jheunlife@hani.co.kr
‘우르릉!’ 천둥소리가 ‘할’(고승이 위엄 있게 꾸짖는 소리)처럼 산사를 울렸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분다. 막 야단법석을 하려던 찰나다. 승려와 불자들은 절집 처마 밑으로 피했다. 그들이 중얼거렸다. “허, 이런 일이 다 있나.” “날씨까지 안 도와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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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9일 오전 경북 문경 희양산 기슭의 고찰 봉암사에서 열린 조계종 종단 대법회는 비바람 속에 치러졌다. 이 땅 승려들의 최고 수행 도량으로 꼽히는 이 천년 사찰에 이날 새벽부터 불자와 승려 5천여 명이 몰려와 참회의 법석을 차렸으나 비는 피해가지 않았다. 이날 법회는 1947년 봄 훗날 조계종을 세운 큰 선승들이 봉암사에 모여 단행한 수행공동체운동, 곧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기리며 지금 교단의 허물을 반성하는 대법회였다. 앞서 아침까지 개었던 날씨는, 오전 10시가 넘으면서 금세 흐려져 먹구름이 희양산 자락에 몰려왔고, 행사 시작 직전부터 죽비처럼 비가 흩뿌렸다.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승려들은 장삼가사 차림으로 법당 앞 마당에서 빗방울을 맞으며 법회를 치렀다.
신정아 파동, 사찰 비리, 파벌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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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전에 참회하옵니다…세상의 밝은 빛이 되지 못하였음을…편가르기와 차별에 빠져들어 ‘화합’을 지키지 못하였음을…명예와 이익을 떨쳐버리지 못하였음을…세간의 질서와 규율에 더 집착하였음을…수행자의 본분을 망각한 허물을 가슴 깊이 참회합니다.”
대웅보전 앞 법단 위에서 선원수좌회의 의장인 영진 스님이 10개 항의 구절이 주 내용인 참회문을 읽었다. 참회 대목을 한 구절씩 읽자, ‘뚝뚝’ 하는 목탁 소리가 이어지고 아래 마당의 사부대중은 고개를 숙였다. 참회 대목을 다 낭독하자 거센 빗발이 잦아들었다. 종단의 가장 큰 어른인 종정의 법어와 신앙결의인 사홍서원을 마치고 법회를 파하자 비는 뚝 그쳤다. 다시 햇살이 들었다. 봉암사의 한 수행승려는 “부처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듯하다”고 했다.
조계종 종립 선원인 봉암사는 평소 일반인은 물론 수행승을 제외한 다른 스님들의 출입도 허용치 않는 성역이다. 그런 산중 은찰에 사부대중 5천여 명이 몰리며 절집 사방이 북새통으로 변했다. 대부분의 중앙일간지와 방송사 취재기자들도 급파되는 등 언론의 관심도 사뭇 뜨거웠다. 결사 50주년 때도 기념행사가 거의 없었던 터에 종단이 60주년 행사를 크게 벌인 데는 필시 곡절이 있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봉암사 결사는 1962년 독신 승려인 비구승 중심으로 출범한 대한불교 조계종 교단의 정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 결사는 1947년 가을 봉암사에 성철과 청담 등 근대 불교의 큰스님들이 찾아와 벌인 수행 공동체 실천운동을 말한다. 고기를 먹고 부인을 두고 사는 등의 왜색 풍습에 찌든 식민지 불교 교단의 기풍을 혁파하기 위해 결사 참여 승려들은 신도들의 선심성 보시를 끊고 승려들이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수행과 노동에만 전념했다. 오직 부처의 법에만 기대어 살기를 절규했던 결사는 1950년대 중·후반 가열된 종단 정화운동의 기폭제이자 62년 조계종단 성립의 정신적 토양이 된다. 성철 스님이 기초한 결사의 공주규약(공동체 규율)에서 규정한 승려의 복식 검소화, 공양법, 승려에 대한 신도의 삼배 예절 등은 오늘날 종단의 규율에도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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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종단 기풍의 정통성을 곧추세운 봉암사 결사의 대규모 기념 법회를 현 종단이 앞장서 처음 꾸린 것은 무엇보다 불교계 내·외부가 전례 없는 위기 국면에 처했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신정아· 변양균 파동을 비롯해 지난해 불거진 마곡사 주지의 선거 부정 등 갖은 사찰 비리와 소유권 분쟁, 종회 파벌 싸움 등 잇따른 추문으로 교단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종단을 ‘동네북’으로 만든 언론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다. 는 신정아·변양균 비리의 후속 보도 과정에서 사찰 교부금 특혜 의혹을 제기해 종단이 구독거부 운동까지 선언했다. 신정아 파동의 후폭풍으로 당장 내년부터 사찰 운영의 큰 축인 교부금 지원이 크게 줄어들 처지에 놓였고, 사찰 종회 선거의 부작용과 숱한 금전 비리로 불자·승려·교단 사이의 신뢰 관계도 깨어지고 있다. 이학종 대표이사는 “현재 위기의 가장 무서운 본질은 승가 공동체의 붕괴”라고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 이날 법회는 교단이 신도·승려 스스로를 탓하는 정신적 단합의 이벤트를 통해 내부적 돌파구를 만들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지관 총무원장은 기념사에서 “내우외환을 겪으며 수행가풍을 의심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에게 곱지 않는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을 향해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때”라면서 “불교를 바로 세우는 새 결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종단 내부의 부패, 분열상이 사회 현안으로 급부상하는 위기 상황에서 내부 단속이 시급하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대선에 이용당할 수 없다는 생각도
또 다른 배경으로는 최근 신정아·변양균 파문에서 보이듯, 조계종이 정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을 들 수 있다. 교단 차원에서 신앙적 단합의 계기를 만들어 코앞에 다가온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 불교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도록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경계 심리가 발동했다는 것이다. 신정아·변양균 파문과 관련해 사찰 교부금 특혜 의혹 등의 악의적 보도를 이유로 범교단 차원에서 구독거부 운동에 들어간 것이 단적이 사례다. 교단 쪽에 대한 음해성 여론 공세에 중지를 모아 대처하지 않으면 개신교도인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주도하는 대선 정국에서 계속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교계 인사들 사이에 은연중에 깔려 있다고 한다.
갑작스런 폭우 속에 치른 이 법회는 일종의 선언적인 자정 결의다. 교단에 실제적으로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현 종단에 밀어닥친 공동체적 위기는 사찰 운영상의 비리와 내부 권승들의 파벌 구도에서 촉발됐지만, 기본적으로는 변화하는 시대에 불교 종단의 계율과 수행법, 신도와 승려, 사찰의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성찰을 해결의 전제로 요구하는 까닭이다. 표 다툼판이 된 종회의원이나 교구 본사 사찰 주지 선출 등의 선거 개선 방안 등 제도화한 공론화 시스템부터 확립해야 한다는 내부 목소리가 높다. 세금 없이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직업형 승려들, 공공연한 재력가로 통하는 몇몇 부유 사찰 승려들의 졸부적 행태, 신도의 보시와 정부 지원금, 관광 수입에 기대어온 대형 사찰의 왜곡된 운영 구조부터 21세기 수행 방식의 재개편, 국내 현실에 맞는 불교 교학의 재정립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들까지 난제들이 첩첩산중이다. 내부 종파 분쟁으로 갈갈이 찢겨진 채 극한적 당파싸움 양상으로 치달은 종회 내의 파벌 대립을 어떻게 탕평해야할지도 지난한 과제다.
한편 법회에서는 애초 적잖은 발언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던 구독 거부와 관련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행사장 들머리에서 대한불교 청년회원들이 ‘왜곡·편향 보도 조선일보 구독 거부’라고 쓰인 스티커와 현수막을 걸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참회가 행사의 본질’이라고 종단 쪽은 설명했으나 앞으로 구독거부 운동을 어떤 전략으로 언제까지 지속할지는 관심사다. 구독 거부를 선언했지만 법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고, 도 보도 내용의 잘못을 나름대로 지면에서 시인하면서 친불교적 기사를 잇따라 내는 유화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종단 내에서는 더욱 강경한 언론 대응책을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신중론보다는 여전히 높은 상황이라고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지관 총무원장이 자신의 학위 의혹을 제기한 에 대해 지난주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한 것도 이런 강경책의 하나로 해석된다. 새로 선임된 조계종 총무원 간부들도 지난 10월1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사실을 왜곡하는 보도를 두고 보지 않겠다는 강경 대응론을 역설해 일부 기자들의 반발을 샀다.

위기 때무다 결사를 일으켜온 전통
이 땅의 불교 교단은 승풍 혹은 종풍으로 불리는 내부의 규율이나 정신적 바탕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 때마다 일종의 근본주의적 수행 공동체 운동인 결사를 일으켜 선불교 교단의 기틀을 추슬러온 나름의 전통이 있다. 고려 때 불교계가 개경의 왕실, 귀족과 결탁하자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원묘국사가 백련결사를 열어 현장수행 정신을 우뚝 세운 것이 시초다. 근래에 들어서도 근대 조계종단 성립의 기본 배경이 된 봉암사 결사를 비롯해 백용성 스님이 일제시대에 벌인 참선만일결사, 한암 스님의 건봉사 결사 등 여러 결사들이 이어져 선가의 법맥을 이었다. 그 결사 정신을 되새겨 현재 종단에 밀어닥친 정체성과 신뢰성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복안으로 마련된 것이 이번 대법회인 셈이다.
봉암결사의 주역인 성철 스님은 당시 ‘공주규약’을 제정하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사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다. 스스로 모든것을 해결하는 수행 정진 속에서 단박에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정신을 성철은 다른 수좌들과 더불어 실천하려 했다. 뒤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수좌들이 흩어지자 봉암사 결사는 미완성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정신과 수행의 기풍은 휴전 뒤인 1954년 대처승 중심이던 교단의 대개혁으로 이어져 1962년 비구 중심의 조계종단이 출범하는 교단 정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40여 년의 역사는 교단의 규모와 사회적 영향력을 공룡처럼 키웠으나, 점진적으로 배우며 깨달음의 근기를 키우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개혁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의 교단 상황에서 드러나고 있다. 종단과 교구본사와 산하기관의 운영 재원으로 가는 금전만 수천억원대인 현 상황에서 단박에 깨달음을 쟁취한다는 돈오돈수의 개혁이 가능할까. 초창기 봉암사의 수좌들처럼 부처님의 법대로만 살았던 수행 풍토의 개혁이 이뤄질 수 있을까. 빗속의 결사기념 법회가 암시하듯 지금 대한불교 조계종은 1962년 출범 이래 가장 난감한 시험의 관문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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