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영국 개혁과 비슷… 영국보다 ‘심화’되고 ‘기초부터’ 없는 환경을 호도 말라
▣ 이병곤 런던대학교 교육연구대학원 박사과정 jazznut@dreamwiz.com
교육이라는 마당에는 신화와 개인적 체험이 교묘히 얽혀들어 있어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할 때가 많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교육 공약 역시 이런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학교 만족 두 배, 사교육 절반’ 공약에는 두 가지 통념이 내장돼 있다.
‘유사 회사’의 ‘생산품’ 관리
하나. 선택과 자유의 확대는 늘 더 좋은 것이다?
이명박 후보는 사교육 시장의 팽창을 정부의 지나친 규제에서 찾고 있다. 그가 주장한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와 ‘대입 자율화’는 학생과 학부모, 대학에 선택의 자유를 확대해주면 사교육 시장이 줄어들 것이라 가정한다. 유권자인 학부모들에게는 언뜻 상당히 매력적인 대안으로 비쳐질 수 있다.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눈을 들어 세계를 보라. 세상에는 자유로운 시장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으며, 소비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판단하여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 힘이 세상을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유독 교육 분야에서만 규제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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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 아래 1988년 ‘교육개혁’을 시작해, 지금까지 20년을 지내왔다. 모든 공립학교에 재정 운영권과 교사 선발권을 주어서 마치 한 학교가 공영회사 조직처럼 운영되도록 조처했다. 이들 ‘유사 회사’는 그러면 ‘생산품’은 어떻게 관리했을까. 우선, 학부모들에게 학교 선택권을 주었다. 그런 다음 학적부에 등록된 학생들의 수를 헤아려 재정을 차별적으로 지원해줬다. 학부모들은 어떤 근거로 학교를 선택했을까? 이명박 후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영국 교육부는 “학교별 정보를 공시”하도록 법을 만들었다. 이른바 ‘리그 테이블’(league table)로 알려진 학교 간 성적 비교표를 공표하도록 한 것이다. 학교의 ‘생산성’ 기준은 시험 결과이다. 영어, 수학, 과학에 대해 전국 차원의 국가평가고사가 11살, 14살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성적 같은 공식 통계를 보면 일견 정부 쪽에 유리해 보인다. 블레어 총리 집권 10년간 11살 학생들의 영어 성적은 57%에서 79%로, 수학은 54%에서 76%로 올랐고, 대입 시험에서 A학점을 받은 학생들도 15%에서 23.9%로 늘었다. 대신 끊임없이 ‘시험이 쉬워지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며 성적을 높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학교와 교사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 결과를 조작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업무량 폭주와 사기 저하로 과학과 수학 교사의 충원이 안 돼 법정 기준보다 25%나 교사들이 부족한 상태가 됐다. 선택의 다양성을 기대하면서 정부의 교육개혁을 지지했던 학부모들은 사실상 자신들이 첫 번째로 원하는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킬 수 있는 확률이 2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영국 중산층 학부모들은 전체 학교의 7%인 사립학교(연간 학비 2천만~4천만원)에 아이들을 보내거나 교외의 집값이 비싼 지역에 있는 공립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서 학교 선택 ‘게임’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버렸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험을 치지만…
상황을 종합하자면, 영국 정부는 유권자들에게 ‘선택과 자유’를 호소하면서 정치적 지지를 받는 동시에 학교 현장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고, 학교는 경쟁의 각축장으로 몰리면서 시험 성적 향상에만 주력하게 되었으며, 학교 선택 게임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인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거나 시험 대비 기술만 가르치는 학교, 혹은 공부 잘하는 백인 중산층 아이들이 빠져나간 삼류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길밖에 없게 됐다.
둘. 경쟁이 더 효율적이다?
학교별 학력을 공시하고 교원 평가를 단행해, 즉 경쟁을 통해 교원의 전문성과 학교의 생산성을 높이자는 이 후보의 공약은 일부 유권자들의 통념과도 상당히 부합한다. 시장에서도 여러 회사들이 경쟁을 통해 질 좋은 상품을 값싸게 만들어내니까.
하지만 경쟁은 양날의 칼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대상에게 경쟁을 시켜야 하는지 정책 입안자들은 면밀하게 판단하고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 막대한 액수의 교육비를 쏟아부었지만 수준 높은 노동력을 배출해내지 못한 영국 정부로서는 교육청 간, 학교 간 경쟁을 부추겨서라도 공공 영역의 생산성을 높여야 할 처지였다. 때마침 ‘시장의 효율성’을 공적 영역에 도입하려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보건의료, 국영산업 분야에 도입됐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 결과, 정작 경쟁을 통해 얻은 효과가 별로 의미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의 교육감사기구인 ‘일반 교수원’은 지난 6월 내놓은 연구 보고서를 통해 “잉글랜드 학생들이 세계에서 가장 시험을 많이 보는 아이들”이라고 지적하면서 16살 이전 학생들에게 시행해온 국가고사를 전면 폐지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또 학부모들은 학교별 성적 발표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학교 현장의 폐단은 구체적이다. 국가고사를 치를 때 자기 학생들의 정답 쓰기를 도와준 바네사 랜(27)이라는 교사는 얼마 전 이 혐의로 당국의 조사를 받던 중 자택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학생 선별 교육제도를 실시하는 나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하운셰크와 뵈스만·2005)를 보아도 이 제도가 학생들의 평균 성적을 끌어올려주지는 못하는 반면 학업 성적의 불평등만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교육 상황은 영국과 다르다. 영국이 안고 있는 교육 문제들은 여러 영역에서 ‘심화’돼 있지만, 영국 교육의 일부 장점들은 아예 ‘기초부터 없다’. 한국의 학부모들은 정부의 공교육비에 맞먹을 정도의 사교육비를 지출한다. 내신이나 수능도 어느 지역, 어느 학교, 어느 학생의 개인 성적에서 전국 석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경쟁에 관한 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과도하다. 하지만 한국의 공교육에는 영국처럼 학습장애나 과잉행동장애 학생을 지원하는 시스템, 학교 심리치료사, 학교 밖 아이들을 돌보는 지역센터,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학생을 위한 전담 교사나 지원금 보조 등 소외 계층을 돌보기 위한 장치가 없다.
선택과 다양성이라는 그럴듯한 미끼
이명박 후보의 교육 공약은 경쟁이 효율이며 미덕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학교끼리 경쟁을 잘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라. 나머지 문제들은 경쟁체제 아래서 저절로 잘 풀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제는 증거가 희박할 뿐 아니라 잘못된 맥락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적용된 것이다.
이런 공약을 작성한 이주호 의원을 비롯한 이명박 후보 쪽 전문가들에게 분명히 요구하고 싶다. 자신을 속이고, 국민을 속이지 말아달라고. 그들은 미국과 영국의 공교육 체제에 시장, 경쟁, 선택의 원리가 어떤 맥락에서 도입됐고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다. 이미 경쟁이 넘쳐나는 한국의 교육체제에 또 다른 경쟁을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도입하고, 답답한 교육 현실에 가슴 죄고 있는 국민에게 선택과 다양성이라는 그럴듯한 미끼를 던져 환심을 사고, 이를 통해 사교육 문제가 풀릴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면, 이는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다. 이명박 후보가 ‘정치적으로는 성공했으나 교육적으로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얻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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