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너무나 많은 권리들, 체벌 안 받을 교육권·가족 결합권, 단결권, 파업권…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며칠 전에 국방부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병역거부권이 인정된 적이 없어 건군 이래 1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살인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옥고를 치러야 했던 한국 땅에서 드디어 평화 정신을 지키면서 살 권리가 공인됐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36개월, ‘징벌’ 성격의 장기간 복무
그런데 기쁨 속에서도 걱정과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다. 종교가 아닌 정치·사회적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권이 똑같은 인정을 받을 것인지, 한나라당이 병역거부권을 아직도 ‘인권’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련 법안의 내년 국회 통과가 가능할지 걱정이 태산과 같다. “대체복무 기간이 현역 복무보다 2배이어야 한다”는 정부의 원칙도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군 복무 기간이 12개월인 그리스에서 대체복무 기간이 23개월로 책정되고,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등 일부 국가들도 대체복무를 군 복무의 2배로 만들어놓긴 했지만, 세계적 대세는 대체복무 기간을 현역 복무의 약 1.5배로 정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국내에서 현역 복무 기간이 세계적으로 매우 긴 편에 속해, 36개월 동안 복무해야 할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은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가장 장기간의 대체복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려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 섭섭한 느낌 또한 떨쳐버릴 수 없다. 병역거부권은 드디어 인정돼가지만, 우리가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인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최근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에서 체벌 금지 등이 명기돼 있지만, 이 법안이 그대로 통과될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당수의 학교에서 체벌 관행이 지속된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체벌까지 고려하면 대한민국의 상당수 아동들이 맞으면서 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국제인권법의 심한 위반에 해당된다. 1989년 유엔 아동보호권리협약 제19조에서 아동에 대한 일체 심신상의 폭력행위가 금지됐다. 협약의 텍스트에서 ‘교육적 체벌 금지’라는 문구를 그대로 쓰지는 않지만 지난 18년 동안의 유엔 산하 여러 위원회와 유럽 인권재판소의 판례·의견 등을 참고해보면 체벌도 ‘아동에 대한 일체 폭력’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예컨대 유엔의 경제·사회·문화 권리위원회의 제13호 일반 논평(‘교육권에 대해서’, 1999)은 체벌뿐만 아니라 피교육자로 하여금 공석에서 심한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비신체적 처벌(폭언 등)까지도 ‘반인권적’이라고 못박았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는 물론 일본과 인도에서도 법적으로 금지된 학교 체벌을 우리가 지금까지도 금지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부끄러운 ‘인권 후진국’으로 만든다. 그중에서 가장 부끄럽고 슬픈 부분은, 체벌을 ‘사랑의 매’로 계속 여기는 상당수 교사와 학부모들의 인식이다. 체벌에 대한 법적 금지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어도, 체벌의 현실적 근절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요할 것으로 보인다. 맞으면서 자란 세대가 다음 세대를 매로 훈육하는 악순환을 끊어버리기란 쉽지 않는 일이다.
체벌은 그나마 금지법 채택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갈 수 있는 문제다. 그것보다 해결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은 남북한 간의 가족 결합권이다.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간의 상호 방문 등의 자유 왕래와 궁극적 동거 등 가족 결합권은 특히 난민 권리 해석에서 현재 인권법의 핵심적 부분을 이룬다.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1966)의 제23조에 의하면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의 가족의 권리’가 전반적인 보호를 받아야 하며,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 집행위원회의 제9호 논의 결론(‘가족 결합권’, 1977)은 명시적으로 흩어진 가족 구성원들의 재결합을 ‘기본 인권 원칙’으로 명기한다. 현재 구미권 국가들이 대부분은 자국 국민 내지 영주권자의 가족이 외국에서 거주하는 경우에는 그 입국과 궁극적 정주를 허용한다.
이산가족이 법적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서울에 사는 노년의 아들이 평양에 사는 노모를 서울로 모셔 함께 산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고, 평생 한 번 상봉해 며칠 같이 보내고 울면서 헤어지는 것도 양쪽 국가의 특별한 ‘시혜’로 얻어낼 수 있을 뿐이다. 가족 결합권이 세계적 인권 표준으로 돼 있는데도, 우리는 결합권은 고사하고 자유 통신, 자유 상봉 권리도 없다. 이것은 ‘인권의 위반’이라기보다는 인권의 전반적 부정에 해당되는 양쪽 국가의 반인륜적 행위이며, 이 행위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이 남북한 정부에 대해 국제적인 법적 행동을 취하는 게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양쪽 분단 정부의 자유 왕래 봉쇄가 반인권적 행동임에도 이에 대한 피해자들의 법적 도전이 여태까지 없었던 것은, 분단과 양쪽 국가주의 논리가 민중에게 거의 내면화된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분단으로 인한 가족 결합권의 침해는 그런대로 ‘불가피한 정치적 상황의 탓’으로 돌려 ‘북한 정부의 경직된 태도’를 탓할 수 있을지 몰라도, 외국인 미등록(불법) 노동자들의 가족 결합권 침해는 과연 누구의 탓으로 할 것인가? 당국의 가혹한 단속에 걸릴 경우에는, 비록 국내에서 실질적 배우자와 친자식이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적 추방(본국 송환)을 당해 가족을 오랫동안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 허다했다. 가족의 품을 언제 강제로 떠나게 될지 모르면서 사는 미등록 노동자들의 참담한 삶을 ‘법적 신분’이 결여된 그들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국내에서 시행 중인 외국인 근로자들의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3년간 국내에서 일하는 ‘합법적인’ 근로자까지도 원칙상 그동안 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 즉, 가족과 같이 살 인간의 본래적 권리를 대한민국 당국은 대상자 신분의 ‘불법성’과 ‘합법성’을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짓밟고 만다. 늘 ‘선진화’를 들먹이는 그들은, 도대체 인권의 상식 정도를 익혔을까?
지배자들의 공범이 될 것인가
군대에서 살인교육을 받지 않을 권리가 드디어 공인된 것은 일대 경사지만, 아직도 우리는 인권이 제도적, 구조적으로 침해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국내의 한 신문사 사이트에서 북한 관련 자료 몇 건을 퍼가거나 단순히 평화, 미군 주둔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느닷없이 국가보안법에 걸려 감옥으로 가고, 노동자의 당연한 단결권과 파업권을 실천하는 노동운동가들이 ‘업무 방해’ 등으로 구속돼 역시 감옥을 메우고 있고, 시위자에 대한 경찰의 폭력과 특히 비정규직 노동운동가에 대한 구사대의 폭력은 다반사로 돼 있고…. 지배자들의 통치 행위에서 폭압이 주종을 이루었던 시절은 간 듯하지만 ‘철권’은 지금까지도 통치의 보조 수단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인권이 구조적으로 부정되는 상황을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 남북한 간 자유 왕래 및 이주노동자들의 정주권 쟁취, 아동에 대한 일체 폭력 금지,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위한 투쟁에 미력이라도 보태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도 반인권적 지배자들의 공범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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