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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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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한국을 옭아맬 협정문이 열리다

등록 2007-06-01 00:00 수정 2020-05-03 04:24

일반에 공개된 국·영문 한-미 FTA 전체 협정문,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협상 목표로 제시됐던 ‘상호이익의 균형’은 어디로 간 것일까? 5월25일 마침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전체 협정문이 공개됐다. 국문 1300쪽, 영문 14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정부는 한-미 FTA 협정문 원문을 일부 국회의원들에게는 이미 부분적으로 공개한 바 있다. 한-미 FTA 찬성파 의원에게만 슬쩍 협정문을 보여준 게 들통난 뒤 4월20일부터 국회 한미FTA특위 소속 의원들에게 협정문 열람을 마지못해 허용했다. 하지만 협정문의 평가작업을 벌이기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영문 협정문만 공개된데다 국회 본관 236호실에서 컴퓨터 모니터로만 열람할 수 있었으며, 필사 행위조차 금지됐기 때문이다. 또 협정문의 실체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관세 양허안, 서비스·투자 유보안, 품목별 원산지 기준 등은 빠진 600쪽 안팎의 분량이었다.

투자자-국가소송제 대상에 ‘투자계약’ 포함

이번에 공개된 협정문은 전체 내용을 모두 담은 것인데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해 한글 상태로도 공개됐다. 분야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평가작업에 불이 붙을 것임을 예고한다. 협정문의 실체가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던 소모전 성격의 다툼이 본격적인 논쟁의 장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협정문의 내용이 방대한데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내용을 포괄하고 있어 일반의 관심을 끌기 어렵긴 하지만 동시에, 내용이 하나둘씩 드러날수록 논란은 증폭될 수 밖에 없다. 협정문의 구체적인 내용 하나하나가 분야별 손익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협상 타결 직후 나온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의 발표 자료와 설명에선 미처 다 드러나지 않았던 것의 한 예로, 투자자-국가소송제(ISD)와 관련된 부분을 우선 꼽을 수 있다. 협상 과정 내내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던 부분이다. 협정문 부속서(11-나)엔 “직접수용 이외에 직접수용에 동등한 효과를 지니는 경우(간접수용)도 제소 대상이 되지만, 보건·안전·환경·부동산가격 안정화 정책 등 공공복리 목적의 조처는 수용으로 보지 않는다”고 돼 있다. 이는 이미 밝혀진 대로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부동산 정책’은 ISD 대상에서 빠진다는 주장을 펴왔지만, 전제가 달려 있다. “일련의 조치가 목적 또는 효과에 비추어 극히 심하거나 불균형적인 때와 같은 ‘드문 경우’(In rare circumstances)를 제외한다”는 내용이다. 또 ‘부동산가격 안정화 정책’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부동산가격 안정화 정책 범위를 벗어나는 조치들, 예컨대 수도권 과밀 억제 등을 위한 부동산 용도지정이나 지구·구역 설정 같은 부동산 정책이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ISD 탓에 부동산 정책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란 정부의 장담은 너무 일렀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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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D 대상에 ‘투자계약’이 포함된 것도 협정문 공개로 확인됐다. 인천 제2연육교 건설사업 등 국가가 외국인 투자자와 맺은 투자계약상의 의무를 위반할 경우 국내 법정이 아닌 국제중재재판소에 회부돼 손실을 물어줘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협정상 규정된 의무를 위반한 조처로 입은 투자 손실만 ISD 대상에 포함된다는 인식을 깨뜨린 사례다.

무역구제 분야에서 관세 철폐로 상대국의 제품 수입이 급증할 경우 발동할 수 있는 양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수입 물량이 일정 기준을 초과할 경우 추가 관세를 부과)에서 ‘동일 상품 재발동 금지’ 조항도 협정문 공개를 통해 새롭게 등장했다. 김종훈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는 “우리의 대미 공산품 수출이 많기 때문에 유리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지만, 반대로 미국산 농산물의 급속한 유입을 막을 안전장치 가운데 하나가 힘을 잃었다는 점에서 논란을 낳는다. 방대한 미국 시장에서 우리 쪽의 주력 수출품 중 관세 철폐 때 세이프가드를 유발할 정도로 급속도로 침투할 공산품은 흔치 않은 반면, 미국산 농산물이 급격하게 국내로 유입할 가능성은 크기 때문이다.

농업 분야에서는 무관세 쿼터를 허용해준 품목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정부가 지난 4월 초 협상 타결 직후 계절관세 도입, 농산물 세이프가드 도입을 내세우면서 민감품목을 최대한 지켜냈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미국에 무관세 수입량 쿼터를 대거 내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무관세 쿼터는 저율관세할당(TRQ·일정 수입량에 대해 무관세 혹은 저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에 따라 미국에 제공되는 것인데, 이 쿼터가 배정된 품목이 무려 35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조).

세이프가드 ‘동일 상품 재발동 금지’

협정문에 따르면, 식용 대두의 경우 현행 관세(487%) 유지를 조건으로 협정 발효 첫해에 2만5천t의 무관세 쿼터를 제공하고, 보리는 15년간 관세 철폐 및 세이프가드 도입을 조건으로 14년 뒤 관세가 완전히 철폐될 때까지 해마다 미국에 일정한 물량(1년차 2500t∼15년차 3299t)의 무관세 쿼터를 주기로 했다. 옥수수도 관세 7년 철폐와 세이프가드 적용에 대한 대가로 무관세 쿼터(1년차 9만3774t∼7년차 41만2603t)를 미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정부가 △현행 관세 유지 △7·10·15년 관세 철폐 △농산물 세이프가드 도입 조건으로 30여 개 농산물 민감품목에 대해 무관세 쿼터를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무관세로 들어오는 대다수 미국산 농산물 쿼터의 경우 해마다 복리 계산 방식으로 3%씩 물량이 증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치즈류(관세 철폐 기간 15년)는 협정 발효 첫해는 무관세 쿼터가 7천t인데 2차연도에는 7210t으로 증가하고, 14년째에는 1만280t으로 증가한다. 해마다 복리 3%씩 물량을 늘리면 15년 관세 철폐 품목의 경우 14년차에는 무관세 쿼터가 1차연도에 비해 1.5배 정도로 증가하게 된다.

이에 대해 정현출 농림부 자유무역협정2과장은 “이미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전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우리가 일정한 저율관세 물량을 주고 있는데, 이를 초과하는 국내 수요분을 미국에 무관세 쿼터로 주기로 한 것”이라며 “미국은 협상에서 무관세 쿼터 증량을 계속 요구했고, 우리 정부는 국내 수급을 고려하고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무관세 쿼터 물량을 조정했다”고 말했다. 물론 무관세 쿼터량은 품목별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무관세로 들어오는 미국 농산물 쿼터가 국내 농산물 가격에 미치는 영향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윤석원 중앙대 교수(산업경제학)는 “치즈, 오렌지, 탈지·전지분유 등은 무관세 쿼터 허용이 국내 시장에 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무관세 물량은 통계 등의 문제 때문에 실제로는 정부가 허용해준 물량을 초과해 국내 시장에 들어올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무관세 쿼터 물량 ‘국가주권’못 지켜

게다가 무관세 쿼터 물량의 운영·관리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국가주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협정문의 ‘부록 2-나-1 주해’ 항목은 △배분된 관세율 할당(무관세) 쿼터 물량이 3년 연속 기간 중 2년 동안 95% 미만이 사용된 경우 미국은 쿼터 내 물량의 불완전한 사용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한국 정부의) 공매제도의 운영에 대한 협의를 요청할 수 있고 △양국은 쿼터 물량 사용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에 합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저율관세 할당 물량에 대한 관리·운영의 주체는 한국 정부다. 또 무관세 쿼터 물량은 의무수입물량(MMA·최소시장접근·국내 수요와 무관하게 무조건 수입해야 하는 물량)과는 성격이 다르다. 즉, 무관세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수입업자가 정작 들여오지 않으면 할당 물량의 일부 혹은 전부가 국내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협정문에 따르면 무관세 쿼터의 관리·운영에까지 미국이 개입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의무수입물량’처럼 간주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나아가 무관세 쿼터를 배분하는 방식 중에서 국영무역 형태는 미국의 반대로 배제됐다. 국영무역은 정부가 우리 농산물과 수입 농산물의 가격 차이를 고려해 수입 원가에 ‘수입 부과금’을 얹혀 파는 것으로 국내 농산물의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제도이다. 협정문에 따르면, 미국에 제공해준 무관세 쿼터는 대부분 수입업자들에게 ‘선착순’ 방식으로 배분된다.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 등 지적 재산권을 강화한 분야는 협정문 공개로 실생활에서 느껴질 체감도가 훨씬 높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상표권 침해행위에 대해서만 인정되던 범죄수익 몰수제를 저작권 침해에도 적용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화관에서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해 영화를 촬영하는 것은 물론, 촬영을 하려고 시도하는 ‘미수범’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된다. 여기에 우리 쪽은 대학가의 서적 복제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공공부문의 인식 제고를 위한 공공교육 캠페인을 시행하기로 했다. 합의문 부속서에는 또 한-미 양국은 저작물의 무단 복제, 배포 또는 전송을 허용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폐쇄 조처(shutting down)하도록 돼 있다. 그간 협상 과정에서 전혀 노출되지 않았던 사항이다.

재협상 두고도 말 엇갈리는 한-미

이번에 공개된 협정문은 두 나라 사이의 법률 검토와 법제처의 검토를 거치면서 최종 협정문으로 다듬어진 뒤 6월 말 두 나라 대표의 본서명이 이뤄진다. 이어 8월 말께 한-미 FTA 협정문의 비준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6월 말 최종 협정문에 대한 본서명을 앞뒤로 국회에선 상임위 회의와 공청회를 통해 한-미 FTA를 주요 이슈로 다루게 된다. 협정문 공개 직후 열린우리당 소속 김원웅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한-미 FTA 협정문 서명이 마무리된 7~8월께 상임위 차원의 청문회 개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청문회를 실시하면 이면합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자료제출권을 행사할 수 있고 정부의 책임 있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미 두 나라 사이의 재협상 논란도 여전히 미결로 남아 있다. 수전 슈워브 미국 통상대표부(USTR) 대표는 한국과 동시에 협정문안을 홈페이지(www.ustr.gov)에 공개하면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번에 공개된 협정문안에는 노동권 및 환경 세이프가드 등에 관해 의회와 행정부가 합의한 조항들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행정부와 의회 간의 합의를 공식 문서화하는 작업이 완료되면 이를 반영하기 위해 한국과 협력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재협상은 없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대목이다. 국내 일정을 보거나, 미국의 태도에 비춰 보더라도 한-미 FTA가 법적으로 탄생(협정문 발효)하려면 고갯길을 많이 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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