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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예비군 거부자, 그 후도 오랫동안의 고통

등록 2007-04-10 00:00 수정 2020-05-03 04:24

역대 1329명… 재판 많이 받다 보니 반 변호사, 한창 나이 6~7년을 위기감에 시달리며 보내

기획연재 양심에 따른 사람들 ③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창살을 사이에 두고 부부가 마주 앉았다. 3월30일 의정부구치소의 면회실. 구속된 남편 윤장운(31)씨를 보는 김미라(28)씨의 눈가는 이미 젖어 있었다. 지난해 2월 결혼한 신혼부부의 생이별이 벌써 보름을 넘었다. 윤씨는 3월14일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서 법정 구속됐다. 부인은 남편이 구속될 줄 꿈에도 몰랐다. 재판을 받으러 갔던 남편이 시댁에 들르느라 늦는 줄 알았다. 김씨는 “남편이 구속됐다는 법원 쪽의 전화를 받고도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설마’ 하지도 않았던 이유는 남편이 ‘예비군 훈련’을 거부해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으로 구속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예비군 거부자들은 대개 벌금형을 받지만, 윤씨는 이례적으로 구속됐다. 윤씨는 “마음의 준비도 못해서 정말로 당황했다”고 돌이켰다.

김씨가 면회를 기다리는 동안에 누군가 “여기는 웬일이냐”며 다가왔다. 여호와의 증인으로 김씨와 같은 회중(집회 단위)에 나갔던 중년 여성이었다. 김씨는 그의 손을 잡으며 “남편이 예비군 때문에 구속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예비군 거부자를 남편으로 둔 부인과 병역거부자 아들을 둔 어머니가 교도소 앞에서 만났다. 워낙 병역거부자들이 많으니 교도소 앞의 해후도 적지 않다.

“적금도 벌금 내기 위해 붓는다”

이 땅에 1329명의 ‘윤장운’들이 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수형자 가족모임이 조사한 통계를 보면, 역대 1329명의 예비군 거부자들이 있었고, 그중에서 615명이 납부한 벌금만 9억8961만2508원에 이른다. 현재도 97명이 예비군 거부로 재판을 받고 있고, 이들이 납부한 금액만 1억6465만원에 이른다. 군복무를 마쳤지만,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다. 윤장운씨도 1997년에 입대해서 2000년 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는 제대 뒤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윤씨가 2002~2004년 납부한 벌금만 450만원에 이른다. 그나마 2005년부터는 벌금을 받으면 항소하고 납부하지 않아 금액이 늘지 않았다. 2박3일 일정으로 군부대에 입소해서 받는 동원훈련을 거부한 1~4년차 예비군 거부자는 병역법 90조에 의해서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에 처해진다. 예비군 5~6년차에 실시되는 향방훈련을 거부한 사람은 향토예비군설치법 제15조 8항에 따라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해진다. 동원훈련이 더 ‘센’ 훈련이지만, 최고 형량은 향방훈련이 1년으로 동원훈련의 6개월보다 더 ‘센’ 아이러니도 있다. 그만큼 법적 형평성에 맞지 않는 법률인 것이다.

예비군 거부자들은 대개 6~7년을 예비군 문제로 고생한다. 윤장운씨도 언제 재판에 불려갈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부인을 만나서 결혼을 했지만 어떠한 계획도 세우기 어려웠다. 부인 윤씨는 “적금도 벌금을 내기 위해서 든다”고 말했다. 자녀 계획도 예비군 문제가 끝날 때까지 미뤄두었다. 윤씨의 변론을 맡은 송상교 변호사는 “예비군 거부자들은 한창 안정적인 직장을 구할 나이인 20대 중·후반, 30대 초반에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아서 피해가 더욱 심각하다”고 전했다. 6~7년 동안 재판에 시달리고, 벌금을 내고, 구속될 위기감에 시달리다 보면 ‘차라리 현역복무를 거부해 감옥을 살고 나오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까지 든다는 것이다.

최홍기(35)씨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기나긴 터널을 지나왔다. 강원도 양구의 21사단에 근무했던 최씨는 1997년 군복무를 마쳤다. 당시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다. 1970년대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종교활동을 심하게 반대했다. 최씨는 “어머니의 종교 때문에 가정이 깨졌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반감을 품고 살았다”고 돌이켰다. 그는 제대 뒤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99년부터 예비군 훈련을 거부했다. 그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대한민국 국민뿐 아니라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의 병역거부는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의 양심은 바뀌었다. 최씨도 다른 예비군 거부자들처럼 “그러면 군대는 어떻게 갔다 왔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무단횡단에 비유했다.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교통법규를 알기 전에는 무단횡단이 잘못인지 모르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잘못을 깨닫게 되지 않느냐”며 “나도 성경 공부를 하면서 병역거부의 가르침을 배웠다”고 말했다.

2004년에는 60차례 출두하기도

99년부터 벌금이 쌓이고 쌓였다. 많게는 한 해에 4~5번 예비군훈련 소집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대개 예비군 거부자들이 훈련 소집에 불응하면 약식재판을 통해서 벌금형이 먼저 부과된다. 최씨도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벌금 30만원 2번, 50만원 3번, 70만원 1번을 납부했다. 한 건에 수백만원 하는 변호사 수임료를 내기가 어려워 혼자서 재판을 받았다. 처음엔 절차를 몰라서 정식재판 청구서를 접수하기 위해 법원에서 반나절을 기다린 적도 있다. 어느새 절반은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절차를 몰라서 고생할 미래의 예비군 거부자를 위해 재판 절차를 요약한 문서도 만들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도저히 재판을 혼자서 받기가 어려워 변호사를 선임했다. 2004년에는 훈련 통지서를 20차례 넘게 받았다. 한 건에 대해서 경찰서, 검찰, 법원을 거치며 최소한 세 번의 출두를 해야 했다. 2004년 한 해에 적어도 60차례 출두를 했다는 뜻이다. 한 주에 한 번꼴이 넘게 출두한 셈이다. 그는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씩 공판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예비군 거부자는 6~7년 동안 15~20회에 걸쳐 기소된다. 최씨도 17번 기소됐다.

그는 아직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조사받던 첫 날을 잊지 못한다. 쌀쌀한 봄이었는데도 검사실에서 조사받고 내려오는 그의 셔츠는 축축이 젖어 있었다. 옆구리에 식은땀이 흘렀던 것이다. 첫 번째 재판도 생생하다. 변호사 없이 직접 판사의 질문에 답하고 나오다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다. 그는 법리상 같은 죄를 거듭해서 저지르는 상습법으로 몰렸지만, 판사에게 선처를 호소할 수도 없었다. “다시 그러지 않겠다”는 말은 곧 “예비군 훈련을 받겠다”는 말과 같은 탓이다. 2004년에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형을 두 번 잇따라 받았다. 그해 말, 그는 구속을 예상해 건강검진을 받았다. ‘궤양성 대장염’ 진단이 나왔다. 스트레스 탓에 생긴 병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가족에게는 알리지도 못하고 몰래 재판을 받으니 정신적 고통이 더했다”고 말했다. 그는 재판을 받는 동안에 자다가 깨는 날이 많았다. 의사는 “병무청에 가서 다시 신체검사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궤양성 대장염이 군대와 예비군 면제 사유가 되는 병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는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

할 수 없는 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재판에 불려다니고, ‘향군법’ 위반자로 전과자의 ‘딱지’까지 붙어서 예비군 거부자들은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는커녕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경사인 최씨가 일하는 안경점 직원들과 사장의 호의로 어렵지만 직장생활이 가능했다. 그는 “동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직장을 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돌이켰다. 그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긴 지인은 주소를 특정한 동네로 옮기면 예비군 훈련을 알아서 처리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편법을 써서라도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의 양심과 충돌하는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2006년 ‘감격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판사는 그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사회봉사 명령 120시간을 선고했다. 이로써 기나긴 예비군 문제가 끝났다. 최씨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480만원의 벌금을 물었고, 990만원의 변호사 수임료를 지불했다. 두 번의 집행유예 선고가 있었던 터라 구속을 각오했던 최씨는 마지막 재판에서 사회봉사 명령이 떨어지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먼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은 서로 말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법원 안을 서너 번 돈 뒤에야 거리로 나섰다. 오히려 12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은 즐거웠다. 그는 2006년 가을, 관악구의 독거 노인에게 도시락을 배달했다. 아침에 복지단체로 출근해서 점심 시간 혹은 저녁까지 일했다. 봉사를 마치면 회사로 가서 근무를 하는 고단한 일과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그는 “사회봉사를 병역거부자들이 한다면 정말로 내 일처럼 잘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회봉사 명령을 이행하면서 대체복무를 미리 체험한 것이다.



“헌법적 권리는 법적 의무에 앞선다”

윤장운씨의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대리하는 송상교 변호사



윤장운씨는 4월3일 의정부지방법원에 예비군 거부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향토예비군설치법 제15조 8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냈다. 윤씨의 변호인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상교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다. 송 변호사는 이돈명, 이석태, 김형태, 윤영환, 탁경국 변호사 등과 함께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의 대리인을 맡았다. 예비군 거부에도 현역복무 거부와 마찬가지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핵심적인 헌법 조항이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의 근거로 언급됐다.
여기에 예비군 거부의 특수성이 덧붙여진다. 송 변호사는 “예비군 훈련은 헌법적 의무가 아니라 법률적 의무”라고 지적했다. 법률적 의무인 예비군 훈련이 헌법적 권리인 양심의 자유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예비군이 헌법적 제도라면 헌법 제정과 함께 생겼어야 한다”며 “예비군 제도는 김신조 사건이 터지고 1968년부터 생겼다”고 지적했다. 2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은 예비군 제도 없이 유지돼왔으므로 예비군 제도는 법률적 필요에 따라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적 의무도 아닌 예비군 제도에 의해 헌법적 권리인 예비군 거부자의 양심의 자유가 제약당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는 또 “예비군 훈련 시간이 계속해서 줄어왔고, 예비군 훈련이 눈 가리고 아웅인 것은 그만큼 예비군 훈련이 국방에 필수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예비군 거부자들에게 포괄일죄도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괄일죄는 같은 죄에 대해서 중복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불법 복제 음반을 여러 차례 판매해도 1개의 불법 복제 음반 판매죄가 성립되는 논리와 같다. 현재 예비군 거부자들은 같은 죄로 반복 처벌당하고 있다. 이러한 처벌은 유엔 인권이사회 등이 금지한 병역거부자에 대한 반복적 처벌 금지에도 어긋난다. 한편으로 예비군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은 현역복무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 도입보다 부담도 적다. 예비군 거부자를 처벌하는 대신에 사회봉사를 시켜서 대체복무의 모델로 시험해볼 여지가 있다. 예비군 훈련에 대한 대체복무를 도입한다고 징병제의 근간이 무너질 위험은 없기 때문이다.
예비군 거부자들은 현역복무 거부자들에 견줘도 심한 의혹의 눈초리를 받는다. 판사들조차도 “그러면 군대는 왜 갔다 왔느냐” “없는 양심이 어디서 생겼냐” 같은 질문을 던진다. 송 변호사는 “이러한 주변의 눈초리 때문에 예비군 거부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결정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며 “그래도 계속해서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결심이 그만큼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반복 처벌로 무려 전과 15~20범이 된다. 게다가 향군법을 위반한 ‘잡범’으로 인식돼 취업 등에서 더욱 심각한 불이익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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