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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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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운동의 싸움꾼들, 돌아오다

등록 2007-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1987년 월스트리트 시위 조직한 ‘액트업 뉴욕’ 20주년…의료보험 개혁 운동으로 새로운 도약 준비

▣ 뉴욕=서보경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회원

지난 2월 뉴욕은 강추위로 꽁꽁 얼어 있었다. 얼굴이 깨질 듯이 추운 날, 목도리를 코끝까지 칭칭 감싸고 그리니치빌리지의 엘지비티(LGBT) 커뮤니티센터를 찾았다. 에이즈 운동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액트업(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뉴욕사무소 활동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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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 위기가 아니라 정치적 위기”

2007년은 미국의 가장 대표적 에이즈 운동 단체인 액트업 뉴욕이 창립한지 20년인 해다. 스무 살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대대적인 집회가 3월29일 세계 금융의 심장부로 통하는 맨해튼의 월스트리트에서 열렸다. 이 집회를 성사시키고자 미국 에이즈 운동의 소문난 싸움꾼들은 두 달 가까이 준비를 했다. 필자는 지난 2월 내내 액트업 뉴욕의 에이즈 활동가들과 함께 지내며 이들의 ‘월스트리트 점령 작전’을 넘겨다봤다.

1987년 3월, 에이즈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에 맞서 액트업 뉴욕이 처음 결성됐다. 당시 미국을 덮친 에이즈 위기에 레이건 행정부는 철저한 침묵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87년 한 해 동안 무려 6만 명의 사람들이 에이즈로 인해 세상을 등졌으나, 연방정부 차원에서 아무런 대책도 나오지 않았다.

“80년대 이 지역은 걸어다니는 주검들로 가득했어. 한 달 동안 무려 10번이 넘는 장례를 치르기도 했으니까. 아무도 게이들이 에이즈로 죽어나가는 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 그리니치빌리지의 40년 토박이인 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 역시 자신의 ‘동반자’를 80년대에 잃었다. 가족, 애인, 친구들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던 기억을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레이건 행정부에 대한 분노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음의 경험 속에서 에이즈 확산의 원인은 HIV라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정부의 수수방관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절감했기 때문이다. ‘에이즈는 의학적 위기가 아니라 정치적 위기다’라는 것이 바로 액트업 뉴욕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3월24일, 액트업 뉴욕의 첫 번째 시위가 월스트리트에서 열렸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300명이 넘는 시위대로 둘러싸였으며, 증권거래소 객장까지 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 증권거래소의 개장을 알리는 시작종은 제 시간에 울릴 수 없었다. 당시 유일한 에이즈 치료제이던 AZT의 엄청난 가격에 항의하며 성난 에이즈 감염인들과 비감염인들이 증권거래소의 개장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게 우리의 메시지였어. 증권 거래를 중단시키는 일이야말로 돈으로 굴러가는 정부와 제약회사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지.” 당시 증권거래소에 직접 진입했던 콜허가 말했다. ‘우리는 다시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현수막 아래 미국 에이즈 인권운동이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월스트리트는 액트업 뉴욕의 단골 집회 장소가 됐다. 에이즈 인권운동가들은 증권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점거하고, 가짜 돈과 피를 뿌리며, 이윤 추구에만 골몰하는 거대 제약회사의 부당성에 거세게 대항했다. 닭장차가 꽉 차도록 체포 행렬이 이어졌지만, 당시 액트업 뉴욕의 시위대는 그 세가 줄어들 줄 몰랐다. 또한 액트업 뉴욕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은 물론 전세계에 액트업 지부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시드니, 파리, 아테네 등에서 액트업 지부들이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액트업 뉴욕은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에이즈와 관련해서는 그 누구와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약회사는 물론 질병통제센터, 식약청, 국립보건원을 향한 습격과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정부를 향한 압박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뉴욕시의 에이즈 관련 예산 삭감에 반대하기 위해 맨해튼으로 향하는 모든 다리와 터널을 봉쇄했다. 또한 에이즈로 사망한 활동가의 주검을 들고 백악관 앞에서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제1차 걸프전 당시, 액트업 뉴욕의 활동가들은 〈CBS〉 뉴스를 중단시키며, “아랍이 아니라 에이즈와 싸우자”라고 외쳤다. 에이즈 공포증을 조장하는 가톨릭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가 도로를 막고 미사를 방해하면서 집회를 할 때마다, 뉴욕 사람들은 모두 액트업에 넌더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 사무실에 협박 전화도 끊이지 않았어. 그럼에도 중요한 건 그 다음 집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하려고 모였다는 거야.” 성 패트릭 성당에서 경찰에게 사지를 붙들려 끌려가던 금발의 앤은 2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은발이 다 됐다.

90년대 후반부터 지지부진 면치 못해

이 기간 동안 액트업은 거칠게 싸우고 폼나게 이겼다. 이들은 4년의 투쟁 끝에 미국 질병통제센터의 에이즈에 대한 정의를 바꿔냈다. 여성 감염인과 마약 사용자의 증상을 에이즈 진단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의 치료 접근권이 공식적으로 보장됐다. 또한 의약품 허가 과정을 효율적으로 바꾸고, 치료제 개발과 수급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함으로써 감염인의 치료권을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환자 권리 운동은 물론 여성 건강 운동,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동반 성장했다.

에이즈 감염인들과 비감염인들이 거리에 함께 나와 드러눕고, 잡혀가고, 항의하고, 지지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동안 에이즈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다. “액트업 뉴욕의 활동은 에이즈로 인해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감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에이즈 치료제로 제 욕심 차리기에 급급한 제약회사와, 감염인에 대한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감염 사실은 더 이상 수치스러운 것이 될 수 없었다.” 15년 가까이 액트업 뉴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제임스 웬지가 말했다.

지난 3월13일 액트업 20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래리 크레이머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액트업 덕분이다.” 에이즈의 위험에서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것은 의사도 제약회사도 아니고, 감염인과 에이즈 인권활동가들 자신이었다는 확신에 찬 발언이었다. 20년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이 말은 분명 옳다.

이처럼 액트업 뉴욕의 활동가들은 ‘과거의 영광’을 한참이고 얘기해줬다. 그러나 급박했던 싸움들이 과거형이 된 까닭은 90년대 후반부터 액트업 뉴욕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치료법의 발전은 에이즈 감염인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지만, 직접 행동의 다급함은 크게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짧게는 서너 해에서 길게는 십수 년을 에이즈 활동가로 살아온 이들은 이제 더 넓은 범위의 싸움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미 국민 모두의 건강권을

2월 내내 논쟁을 거듭한 끝에 ‘전 국민 의료보험 도입’을 액트업 결성 20주년 집회의 핵심 요구사항으로 정했다. 현재의 사보험 중심 체계에서는 에이즈 감염인은 물론 미 국민 모두의 건강권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08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이 의료보험 개혁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보험회사 중심의 사보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데 수천억달러를 쓰는 나라가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되나? 단일지불자(single payer) 방식만이 현 사보험 체계의 불평등과 비효율을 뜯어고칠 수 있다.” 회의 진행을 맡았던 존 라일리가 20주년 집회를 기점으로 시작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 캠페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3월29일, 에이즈 위기를 스스로 끝장내겠다며 처음 길을 나섰던 액트업 뉴욕은 전 국민을 위한 공평한 의료보험을 요구하며 월스트리트로 돌아왔다. 물론 9·11 이후 엄중해진 경계 아래 증권거래소 점거는 이제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러나 ‘이윤이 아닌 생명을’이라는 구호는 20년 전 그때보다 더욱 무르익었다. 에이즈 감염인의 치료 접근권을 위해 싸우던 스무 해의 성과와 역량이 더 많은 이들의 건강권을 위한 싸움으로 커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껏 에이즈와 싸운 이유는 이 싸움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진짜 삶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동성애자이든, 여성이든, 감염인이든, 비감염인이든 그 누구든 간에 말이다.” 액트업 뉴욕의 여성위원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해온 맥신 울프가 오랜 소회를 밝혔다. 한국 감염인 인권운동의 발목을 지겹게 잡고 있는 ‘소수자 인권 대 국민 건강’이란 해묵은 대립은 에이즈 문제의 본질이 아님을 액트업은 입증해 보였다. ‘그들’의 권리와 생명을 지키는 힘이 곧 ‘우리’의 권리와 생명을 지켜낸다. 쪼갤 수 없는 모두의 힘으로.



[인터뷰_액트업 뉴욕 활동가 맥신 울프]


백인 남성 게이의 운동이라고?

수많은 여성들이 엑트업과 함께 하며 진단·치료 과정의 성차별적 요소들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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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립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맥신 울프는 액트업 창립 초기부터 정열적으로 활동해온 인물이다. 특히 그는 여성위원회를 결성해 여성과 에이즈, 레즈비언의 건강권 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왔다.

심리학 교수가 에이즈 인권활동가가 된 사연이 궁금하다.
=교수는 직업에 불과하다. 물론 월급 받고 일하는 직업으로서 교수는 좋은 직업이었다. 더욱이 복사기도 맘대로 쓸 수 있어서 인권운동에도 유용했다. (웃음) 활동가로 살고자 했고, 정치는 대학 안에서가 아니라 대학 밖으로 나와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에 대한 연구활동을 하긴 했지만, 진짜 힘을 발휘하는 건 직접 행동이다.
대표도 없는 액트업의 운영방식이 독특한데.
=위계 구조 없이 운동을 해왔다는 게 우리의 자랑이다. 매주 월요일 회의에는 누구나 참석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여성위원회처럼 특정 주제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전체 회의에서 제안을 할 수도 있다. 한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해 토론하고 결정하는 일이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액트업 뉴욕은 소수 지도부가 아니라 수많은 참여자들이 운영하고 있고, 그러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
액트업 활동에 대한 비판은 없나?

=가장 흔한 비판은 우리가 ‘백인 중산층 남성 동성애자들’만의 조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액트업과 함께해왔으며, 에이즈 진단·검사·치료 과정에서 성차별적 요소들을 지적해왔다. 이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여성들 역시 액트업 뉴욕과 함께해왔다. 물론 백인 남성 동성애자들의 참여가 가장 컸다. 과연 이들을 다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에게 에이즈 운동은 반전 운동과 다름이 없다. 한 사건에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뒤엉켜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만 살려달라는 운동이 아닌 게다.
미국의 에이즈 위기는 이제 끝났는가?
=액트업 뉴욕이 80년대 처음 에이즈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에이즈를 사회적 위기로 생각하지 않았다. 유병률이나 발병률과 같은 통계 수치들로 한 사회의 에이즈 문제를 단순 평가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에이즈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한국에서 에이즈 감염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온전한 권리를 누릴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회적 위기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여전히 문제가 많다. 빈민층 의료지원(메디케이드)과 에이즈 치료제 보조 프로그램과 같은 기본적 안전망들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 에이즈 위기의 끝을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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