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갈가리 찢겨나간 가족들

등록 2007-01-13 00:00 수정 2020-05-03 04:24

남편이 이라크로 추방된 무니와, 9남매가 뿔뿔이 흩어져 사는 움므 칼리드…좁고 습기 찬 달동네 생활을 견디는 난민 누구에게나 처연한 사연이 있다네

▣ 암만=글·사진 =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갈가리 찢긴 가족사만큼 아픔도, 사연도 많다. 고향을 떠났지만, 남겨진 이들에 대한 상념은 살풍경한 뉴스가 들릴 때마다 가슴을 저민다. 이국에 둥지를 튼 이라크 피난민들은 아픈 상처를 핥으며 신산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상황이 안정되면 언제고 이라크로”

지난해 12월23일 오전 암만의 ‘자발 암만’ 지역을 찾았다. 무니라(46)의 좁은 집 안에 들어서자 무슬림 집안이라면 으레 손님을 맞으러 나오는 남성들이 보이지 않았다. 두 딸 루완다(12)와 누라(7), 때마침 방문한 딸의 친구 아람(13)과 아람 엄마(49), 시리아로 가기 전 인사를 하러 온 여동생 나딜라(36) 등 모두 여성이었다. 무니라는 2003년 2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불과 며칠 전 요르단으로 나왔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고, 지금 무니라는 남편도 없이 두 딸과 함께 암만에서 지내고 있다.

그가 남편과 헤어진 건 벌써 3년 반이나 됐다. 이라크 전쟁 직후 남편 왈리드는 암만 구시가지의 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불법취업 혐의로 붙들렸고, 곧 이라크로 추방됐다. 무니라는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행복한 편이다. 법이 바뀌기 전에 이곳 국·공립학교에 입학을 했다. 재학 중인 이라크 학생들의 경우 거주 비자와 관계없이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불법체류 이라크인치고는 그나마 상황이 괜찮다는 게다.

“사실 이 얘들 말고 딸이 둘 더 있었어요. 1차 걸프전 직후 큰딸이 수영을 하다 물에 빠져 먼저 세상을 떠났지요. 둘째딸은 경제제재가 한창이던 1995년에 병사했고요.” 무니라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한다. “제3국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이라크가 좋아요. 상황이 안정되면 언제고 이라크로 돌아갈 거예요.”

나딜라는 결혼 6년차다. 아직 아이가 없다. 13년여 이어진 ‘경제제재 시대’를 살아온 이라크의 여느 청장년 세대처럼 제때 결혼을 하지 못했다. 자동차 중개상을 하는 남편 카림을 바그다드에 두고 암만에서 언니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이라크 상황이 안 좋아지자 남편은 나딜라를 암만으로 보냈다. 16개월 전의 일이다. “사실 남편도 요르단에서 살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요르단에서 제대로 일자리를 잡을 수 없어 이라크에 혼자 남기로 했죠. 이라크인들의 불법노동에 대한 단속이 만만치 않잖아요.” 카림은 나딜라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종종 요르단을 오가고 있다.

아람(13)네 가족도 이산가족 신세이기는 마찬가지다. ‘자발 루웹데’의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람의 아버지와 오빠 마크로(17)는 지금 바그다드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람의 아버지도 함께 암만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일구고 살았다. 하지만 석 달 전 아버지가 불심검문에 걸려 추방되면서 이산가족이 됐다. 오빠 마크로는 나이 때문에 요르단 입국이 쉽지 않았다.

납치범들이 퍼부은 매질에 숨진 남편

암만 시내의 또 다른 빈민 지역 ‘자발 나디프’에 살고 있는 움므 칼리드(60)는 9남매(8남1녀)의 어머니다. 움므 칼리드의 가족사는 굴곡 많은 이라크 난민 가족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지금 며느리 하난(30)과 3명의 손자·손녀와 살고 있다. 그의 집 거실 한편에는 죽은 남편 아부 칼리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남편은 2003년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그다드에서 숨졌다. 사연은 이렇다.

그해 봄 바그다드가 함락된 직후 막내아들 로니가 무장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납치범들은 몸값으로 미화 2만달러를 요구했다. 단신으로 무장괴한들을 찾아나선 아버지는 아들을 풀어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괴한들은 뭇매를 때린 뒤 돌려보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돈을 모은 아부 칼리드는 다시 괴한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들을 구해낸 그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납치범들이 퍼부은 매질의 후유증이었다.

지금 움므 칼리드의 9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큰딸 칼리다(42)는 이라크에 살고 있고, 큰아들은 독일, 둘째와 여섯째 아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셋째와 넷째·다섯째는 스웨덴, 일곱째와 막내는 시리아에 살고 있다. 일곱째 아들 와일은 요르단에 함께 살다가 5개월 전 불법체류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바그다드로 추방됐다. 그 직후 시리아로 들어가 지금 동생 로니와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다. 추방 당시 와일의 아내 하난은 막내딸 아린을 임신하고 있었다. 아린은 이제 태어난 지 한 달이 됐다. 와일은 아직 아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암만 구시가지의 대표적 달동네인 자발 나디프에는 적지 않은 이라크인들이 살고 있다. 아미라 한나(45)의 집에선 석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유일한 난방기구인 석유풍로 때문이었다. 공간이 좁다 보니 약하게 불을 피워놓았는데도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미라 한나는 바깥 활동을 거의 못한 채 그 온기에 의존해 종일 집 안에 머물고 있다.

아미라 한나와 남편 일리야는 16개월 전 악화일로로 치닫는 유혈사태를 피해 요르단으로 나왔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막내 아들만 함께 살고 있고, 둘째딸 수아드(26)는 미국 샌디에이고에, 셋째아들 아이만(24)은 이라크에 살고 있다. 큰딸 이만(30)은 결혼을 해 집 가까운 곳에서 자기 가족과 살고 있다. 일리야는 암만 구시가지의 뒷골목에서 날품을 팔아 생계를 꾸리고 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 단속이 강력해지면서 불법체류 이라크인들은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좋을 때는 암만 구시가지 곳곳에서 이집트인들과 뒤엉켜 일자리를 잡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림없다.

타향의 끝없는 산동네 계단

암만 동부 서민 지역에서 만난 이라크인들은 공통점이 있다. 처연한 사연 한 자락 없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변변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많지 않은 탓에 대부분 하루하루 이어가기도 벅차다. 그럼에도 일반 전화가 아닌 휴대전화를 주로 사용한다. 일반 전화는 신청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다, 거주 비자가 없으면 아예 설치가 불가능한 탓이다. 뜻하지 않게 이산가족이 돼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긴 기다림의 시간을 살고 있는 점도 엇비슷하다.

가족이나 친척, 가까운 이웃 중에 전쟁 발발 이후 죽거나 다친 이들이 없는 경우도 드물다. 이들 대부분은 겨울철이 되면 호흡기 질환을 자주 앓는다. 좁고 습기 차고 후미진 달동네 생활을 처음 겪는 이라크인들이 많은 탓이다. 이라크는 대부분의 도시가 평지에 형성돼 있고, 마당이 딸린 크고 널찍한 단독주택에 사는 이들이 많다.

움므 칼리드는 “이라크 피난민들은 마음의 병, 몸의 병에 모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이 겨울이 다 가면 그들은 열사의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