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보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가계 부채, 곧 600조원 이를수도…상환 능력에 따라 대출한도 규제하는 당연한 조처마저 왜 이제서야…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고객님의 이자 부담을 덜어드립니다. 대출한도는 높게 대출금리는 낮게! 금리 최저 연 5.6%~. 설정비 면제, 보험 가입 없음, 수수료 없음.’ 집 근방에 나돌아다니는 A4용지 절반 크기의 유인물 윗부분에는 커다랗게 ‘아파트 담보 대출’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아래쪽에는 ‘○○화재 여신영업팀 대출상담사 ○○○ 01×-×××-××××’라는 출처가 명기돼 있었다.
1월5일, 유인물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반색을 하며 얼마나 대출받기를 원하는지부터 물어온다. “5억원짜리 아파트를 매입하려고 하는데, 얼마나 빌릴 수 있나요?” “담보 가치의 60%까지 쳐주니까, 5억원짜리면 3억원 정도까지는 가능하겠네요. 원금 상환은 3년 동안 유예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만기 20년에 금리는 연 5.8%로 시작해 CD(양도성 예금증서) 금리 3개월 평균치에 따라 연동해서 바뀐다는 설명이 뒤따라 나왔다.
“언제 바뀔 지 모르니 서두르세요”
“주택담보 대출을 받을 때 총부채상환비율(DTI)이나 대출한도를 규제한다고 하던데, 이쪽은 아직 그런 건 없는가요?” “예, 아직은…. 한 달쯤 뒤면 DTI 규제를 받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대출 관련 규제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지금 빨리 하는(대출받는) 게 좋을 겁니다.”
○○화재 대출상담사의 설명처럼 2월부터 단계적으로 상환 능력에 따른 대출한도 규제가 전체 금융권에 확대 적용될 전망이다. DTI 규제는 새해 벽두 국민은행에서 불을 지폈다. 국민은행은 1월3일부터 DTI 40% 규제를 지역·집값에 상관없이 적용한다고 밝혔다. 연간 원리금 상환액이 연소득의 40% 이하에 머물도록 대출금 한도를 제한하는 내용이다. 예컨대 연 3천만원 소득자가 시가 5억원 아파트를 매입하는 경우 대출(만기 20년, 금리 6.0%, 원리금 균등상환)할 수 있는 액수는 1억3900만원으로 제한된다. 연 5천만원 소득자라면 대출 가능 금액은 2억3200만원으로 올라간다. DTI 40% 규제는 ‘3·30 부동산 대책’(2006년) 때부터 투기 지역과 수도권 투기과열 지구에 있는 6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적용돼왔다.
국민은행의 DTI 신규 규제가 적용된 날,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1월 말까지 여신 심사 ‘모범 규준’을 만들어 이르면 2월부터 은행권에 먼저 적용한 뒤 제2금융권으로 점차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은 이를 위해 각 은행에 지난해 12월18일 신규 주택담보 대출분부터 채무 상환 능력을 평가해 대출한도나 금리에 반영한 자료를 정기적으로 제출하도록 지시한 데 이어 제2금융권에도 같은 자료의 제출을 요구했다. 금감위와 금감원은 대출한도를 직접 규제하지는 않는다고 밝혔지만, 금융권 자율의 형식을 빌려 DTI 40% 규제와 함께 대출한도를 연소득의 4배로 제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새해 초 금융권을 강타하고 있는 대출한도 규제 움직임에는 부동산담보 대출에서 비롯된 가계 빚 폭증에 대한 걱정이 배어 있다. ‘(대출한도 규제는) 주택담보 대출 심사 체계를 담보 위주에서 상환 능력 위주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라는 금감원 공식 설명의 속내는 실상 이것이다. 국민은행 부설 연구소가 꼽은 ‘2007년 은행 경영 10대 이슈’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국민은행연구소는 10대 이슈 중 하나로 ‘가계신용 위험’을 들고, “가계 빚이 2002년 신용카드 사태 직전보다 40%가량 증가한 사상 최대 수준”이라며 “금리 상승기에 가계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 위험 관리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전체 금융권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가계 부채의 실상은 어떨까? 일각에서 얘기하듯 가계 부채가 금융 위기로 이어질 만큼 과다한 지경까지 와 있는 것일까?
늘어나는 빚, 갚을 능력있나
가계 빚을 총량에 가장 근접한 수준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분기별로 발표하는 한국은행의 ‘가계신용 동향’이다. 여기에는 은행을 비롯한 제도 금융권 전반의 가계 대출뿐 아니라 신용카드사·할부금융사 등 여신 전문기관과 백화점, 자동차, 가전회사 등 외상(신용) 거래까지 포괄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가계신용 동향은 지난 11월30일 발표된 2006년 3분기 자료이다. 이것을 보면, 지난해 9월 말 현재 가계신용(가계대출+판매신용) 잔액은 558조8천억원에 이른다. 가계 빚이 곧 600조원에 이를 것이란 걱정 어린 얘기는 바로 이 수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빚이 많아도 갚을 능력만 된다면 문제될 게 없다. 빚의 절대 규모보다 이를 감당할 자산이나 소득이 관건임은 상식에 해당하는데, 부채 상환 능력을 명확히 가려줄 똑 떨어지는 잣대는 없다. 다만,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지표로 두 가지가 흔히 쓰인다. 하나는 개인들의 금융자산과 금융부채의 비율을 따져보는 것과, 또 하나는 가처분소득(소득-세금)과 금융부채 비율을 살피는 방법이다.
개인 부문의 금융부채/금융자산의 비율은 한은의 ‘자금순환 동향’에서 산출된다. 가장 최근 자료인 2006년 3분기 자료를 보면, 개인 부문의 금융부채는 689조2937억원, 금융자산은 1473조9109억원으로 집계돼 있다(‘자금순환 동향’의 개인 부문에는 순수 가계 외에 소규모 개인 기업과 민간 비영리단체가 포함돼 있어 ‘가계신용 동향’의 가계 빚과는 달리 나타난다). 따라서 지난해 9월 말 현재 개인 부문 금융자산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46.8%이다. 개인 금융자산에 견준 금융부채 비율은 1996년 41.1%에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34.7%까지 떨어졌다가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해 2002년 47.8%, 2005년 말에는 52.9%까지 오른 바 있다. 지난해 들어 9월까지는 금융부채 비율이 낮아진 셈이니 위험 수준은 벗어난 것일까?
금융연구원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개인들의 금융부채 비율은 미국보다 약 20%포인트 정도 높고 일본(2006년 6월 말 현재 26%), 영국(2003년 말 35%), 대만(2003년 말 17%)보다 훨씬 높다. 금융연구원의 이병윤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가계의 경우 금융자산보다 실물자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이 비율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금융자산으로 금융부채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은 주요국보다 상당히 뒤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통계에 잡히지 않은 9월 말 이후에도 부동산값 폭등에 따른 가계 부채가 상당히 많이 늘어난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한은의 ‘2006년 11월 중 금융시장 동향’을 보면, 은행권 가계 대출이 지난해 10월에는 직전 달보다 4조원(주택담보 대출 2조8천억원), 11월에도 역시 전달보다 5조6천억원(주택담보 대출 4조2천억원)이나 늘었다.
1년새 경제는 5%, 부채 11.6% 상승
빚 갚을 능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잣대인 개인 금융부채/가처분소득 비율은 어떨까? 2005년 말 현재 개인 가처분소득에 견준 금융부채 비율은 139.6%이다(가처분소득을 담고 있는 한은의 ‘국민소득 통계’는 분기별로 잠정치가 발표되지만, 부문별 가처분소득은 연간 단위로 산출된다).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1998년 말 71.9%에 지나지 않았다가 2000년(86.9%)부터 빠르게 늘기 시작해 2001년 100%, 2002년 말 108.9%로 높아진 뒤 2005년 말까지 오름세를 이어왔다. 지난해 9월 말 개인 부문의 금융부채가 2005년 말(617조7465억원)보다 11.6%나 높아진 반면, 지난해 경제 성장률은 그 절반인 5% 안팎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 또한 더 높아졌을 게 분명해 보인다.
이병윤 위원은 “자산이나 소득과 비교한 부채 비율만으로 금융 위기를 일으킬 만큼 위험한 수준인지, 어떤지는 알기 어렵다”고 말한다. 소득이나 자산 수준별로 부채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예컨대 자산 또는 소득 수준별로 1등부터 10등까지 줄을 세웠을 때 평균치는 같아도 빚이 어느 쪽에 몰려 있는지에 따라 위험도는 크게 다르다는 얘기다. 상층부에서 빚을 많이 지고 있다면 별 문제 될 게 없는 반면, 하층부에서 과다한 빚을 지고 있는 경우라면 파산 위험에 몰릴 수 있다. 통계청에서 계층별 소득 수준을 보여주는 소득 5분위 배율을 산출하고 있지만, 이에 상응하는 계층 수준별 부채 통계는 없다. 이 위원은 다만, “금융 위기의 위험을 단정할 수는 없어도 부채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흐름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가계 부채가 소득보다 빠르게 늘고 있고 빚이 이미 과다한 수준”이라고 진단한다. 송 위원은 “계속 부동산값이 안정되면 괜찮을 텐데 자산 디플레(부동산값 급속 하락) 현상이 나타날 경우 서로 빨리 (집을) 팔려고 하는 과정에서 가계발 금융 위기가 터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가계발 금융 위기는 1997년의 ‘기업발 금융 위기’보다 훨씬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란 걱정을 낳는다. “기업에선 부도 뒤에도 건질 게 있다. 내다 팔 재고 상품이나 설비가 있고, 이걸 통해 소득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계 파산의 경우는 다르다. 부동산 거품 붕괴 뒤에 남아 있는 게 뭐가 있겠나?”(이병윤 위원)
DTI 규제를 비롯한 금융권의 대출 규제는 가계 부실에 따른 이같은 금융 위기를 미리 막기 위한 조처인데, 문제는 이게 신규 대출에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이미 나가 있는 막대한 가계 부채를 줄일 방법은 딱히 없다. 금리를 올리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이는 자칫 중간 아래층 가계의 즉각적인 상환 능력 하락으로 이어져 금융 위기를 조장할 수 있다. 부동산값을 잡는다고 섣불리 금리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게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집값 연착륙으로 시간 벌 수밖에…
정책 당국으로선 집값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는 과정에서 시간을 벌어 그동안 소득이 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분자(부채)를 줄일 묘책이 없으니 오직 분모(소득)가 커지기를 기다릴 뿐인 ‘천수답 처지’다. 이 천수답을 한 방에 망가뜨릴 수 있는 게 부동산값이다. 부동산 문제는 이제 무주택 계층에 절망감을 안겨주는 데서 나아가 나라 경제의 운명과 직결되는 ‘금융 시스템’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떠오른 셈이다. 돈 꾸는 쪽의 ‘상환 능력’을 따지는 그 당연한 조처를 지금껏 미룬 금융감독 당국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DTI 규제를 비롯해 대출 심사 때 빚 갚을 능력을 따지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은 금융연구원을 중심으로 몇 년 전부터 이미 수차례 제기돼온 터였다. 금융감독 당국의 무지 탓이었을까, 알고도 내버려둔 직무유기였을까? 그도저도 아닌 또 다른 속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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