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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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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짜, 그때 그 사람들…

등록 2006-12-28 00:00 수정 2020-05-03 04:24

대량생산 시작된 일제 강점기 이후 변모해온 달력의 메시지…‘없애자 공비’‘국가 재건’ 구호부터 요염한 여배우까지 다양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옛날 달력을 들여다보면 묘한 기분이 느껴진다. 달력 속에는 그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의 고민과 취향이 날것 그대로 살아 숨쉰다. 다만 달력은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신문 논설이나 포스터와 달리, 날짜를 보여준다는 실용적인 목적을 앞세워 1년 내내 벽에 걸려 있을 뿐이다. 그것은 강요하는 드러냄이 아닌, 주목받지 못하는 은근한 드러냄이다.

“알맞게 자식 갖고 빈곤에서 벗어나자”

조선 시대에도 천문을 맡아보던 관상감에서 해마다 달력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지만, 달력의 대량생산이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장사치들은 물품 광고를 위해 수천 부씩 달력을 만들어 고객에게 돌렸고, 사람들은 달력을 한 부씩 얻어다 집 안방 벽에 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1930년(쇼와 5년) 가 독자들에게 나눠준 한 장짜리 대형 달력의 지도 속에는 조선 반도의 모습과 이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 철도 등의 모습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동해 푸른 물 위에는 ‘일본해’라는 지명 표기가 선명하고 ‘우리 신문, 조선일보’라는 구호와 옛 조선일보 사옥(현 농협 종로 지점)의 사진이 시선을 잡아끈다.

전쟁이 터진 해인 1950년용으로 경상북도 경찰국이 만든 달력에선 미·소 양국의 분할 점령 속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로 내리닫던 시대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커다란 호랑이가 태극 무늬 앞에서 포효하고 있는 첫 장을 넘기니 달력은 1월부터 “지키자 대한민국, 이승만 박사 만세”라는 결기 어린 구호를 토해내고 있다. 11월 달력에는 “찾아내자 폭도, 없애자 공비”라는 구호가 실려 있는데, 이때 공비는 여순 사태 이후 지리산 쪽으로 숨어든 이른바 ‘1차 빨치산’이 아닌가 싶다. 6월25일은 어린 시절 반공 교육 시간에 배운 대로 ‘일요일’이 틀림없이 맞다.

1960년의 혁명과 그 이듬해의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든 이듬해인 1962년 달력에는 ‘재건’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압박’이 느껴진다. 재건국민운동 경상남도지부가 만든 한 장짜리 대형 달력에는 “지금 재건 못하면 다시 기회가 없다”는 큰 구호 아래, “알맞게 자식 갖고 빈곤에서 벗어나자” “한 끼 분식으로 영양 돕고 국가 재건” 등의 구호가 두서없이 난무하고 있다. 한 사람이 하루 한 끼만 밀가루를 먹으면 9환이 절약되고 전 국민이 1년 동안 이를 실천하면 821억2500만환이 절약된다는 통계가 있기는 하지만, 보릿고개가 여전하던 시절 하루 세 끼 모두를 쌀밥으로 때우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진 않다.

비키니 입은 여배우들 이젠 어디로…

경제 성장과 삶의 질 향상을 반영하듯 1970년대 들어서면서 달력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진은 흑백에서 천연색으로 바뀌고, 변화하는 시대상을 드러내듯 배경 사진에는 신축 중인 건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성문사(당시 전화번호 26-3994)가 만든 1970년 달력의 1~2월 첫 장을 여는 사진이 한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삼일고가의 풍경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당시 서울시장은 ‘원조 불도저’ 김현옥이었고, 그는 세운상가, 도심 지하도, 여의도 윤중제 등의 건설 프로젝트를 쏟아내며 믿기 힘든 속도로 서울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달력에는 그 밖에도 공사 중인 서울 시청 앞 웨스틴 조선호텔(11~12월)과 깔끔하게 복원 공사가 끝난 광화문(5~6월)의 모습 등 새롭게 거듭나는 서울의 풍경이 녹아 있다. 시골에서는 지역 국회의원들이나 국회의원을 꿈꾸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대형 달력을 만들어 지역 주민의 집은 물론 사람이 자주 오가던 이발소·목욕탕·구멍가게 등에 걸어놓곤 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옮겨갔다. 70년대 들어 달력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누비던 톱스타들이었다. 60년대 후반부터 캘린더용 이미지 촬영을 해온 이용정(73) 작가는 “마땅히 배우를 홍보할 공간이 없었던 그 시절엔 캘린더 사진이 배우를 홍보하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70년대 초반 달력에는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1대 트로이카 여배우 문희·윤정희·남정임이 지금 기준으로도 아슬아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비키니를 입고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70년대 후반이 되자 사진의 주인공들은 장미희·정윤희·유지인으로 바뀌고, 이제는 시어머니 역할로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전양자·김영애·김자옥·정애리·이미숙·김영란 등의 중견 배우들이 저마다 섹시한 자세를 뽐내며 보는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신장대리 8번지에 주소를 둔 광신자전거는 ‘자전거·리아카 도산매’라는 글씨와 함께 푸른 바다에서 노란 공을 들고 물을 뿌리는 탤런트 이효춘을 1977년 5~6월 달력 모델로 사용했는데, 시골 중소 인쇄업체 쪽에서 연예인들에게 따로 사진 사용료를 지불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달력 모델의 마지막 세대는 데뷔 시기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치는 전인화·채시라·하희라 등이다. 기업들은 일반인들이 자주 접하기 힘든 명화나 예술작품, 각종 공예품과 유적지들로 관심을 옮겨갔고, 배우들은 자신들의 상품성을 팔아먹을 만한 더 나은 공간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공짜 달력’의 기대감도 언젠간 변하려나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수천만 개의 달력이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1년 인쇄 부수가 7천만~8천만 부에 이른다는 추정치도 있지만, 정확히 몇 부가 찍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한인쇄문화협회 쪽에서는 “영세 업체가 많아 정확한 통계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출용 달력(2004년 현재 수출액 1억8218만달러)은 1년 먼저 인쇄하고, 국내용 제품들은 7~8월에 원고 선정을 끝낸 뒤 이르면 9월부터 인쇄에 들어간다.

우리나라 달력 시장은 열악한 편이다. 사람들은 달력을 돈 주고 구입하는 제품이 아닌 ‘선물’로 생각한다. 달력은 일반 판매용은 거의 없고, 대부분 기업들의 대량생산 주문이다. 이를 따내려는 업체들의 수주전도 치열하다. 해방 이후 질풍 같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도 변했고 달력도 변해왔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공짜’ 달력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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