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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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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꿈을 포기한 건가

등록 2006-11-18 00:00 수정 2020-05-03 04:24

왜 ‘서부권 벨트의 복원’이라는 옹졸한 시야 속에 자신을 가두고 마나 …‘앙시앵 레짐’ 극복할 대안 마련하고 한나라당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

▣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최근 열린우리당 내의 정계 개편 논의를 지켜보면 그야말로 지리멸렬의 대명사를 보는 기분이다. 정계 개편과 관련해서 열린우리당의 중요 인물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마다 미리 결론부터 내려놓고 각본을 진행시키려는 의도성이 다분히 엿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쇠락한 정당이라지만 열린우리당은 명색이 집권여당이고 공당이다. 47석짜리 초미니 여당을 과반수 정당으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국민의 선택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금이라도 공적 심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열린우리당에 대한 처분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자세쯤은 기본으로 가져야 한다.

거의 식물 상태나 다름없는 정당을 폭파해 해체할 것인지, 리모델링할 것인지, 아니면 분당 이전의 상태로 원대 복귀시킬 것인지 공당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물어보았는지 묻고 싶다. 국민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국민들이 전혀 원하지도 않은 일들을 통 크게 밀어붙이고 있으니 국민으로부터 진정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하지 않아

열린우리당의 정계 개편 논의는 10·25 재보선 참패라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터져나온 것으로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다. 오히려 북한 핵실험 사태를 계기로 ‘평화 대 전쟁’의 이슈 구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정계 개편 논의 속에 실종시켰다. 또 부동산 가격이 미쳐 날뛰고 관료들이 주택정책 ‘쿠데타’를 일으켜 한나라당 코드로 변신하고 있어도 열린우리당은 정계 개편 논의에 휘말리는 바람에 최소한의 담론 투쟁도 벌이지 못했다. 이런 사태들이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이고 또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드라이브(추진)해야 하는지에 대해 별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업으로서 정치가이기를 이미 포기한 사람들 같다는 말이다.

정계 개편의 이면에 숨은 정치공학적 셈법을 들여다보아도 열린우리당은 판단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당을 버릴 수도 있을 것처럼 해오다가 이제는 열린우리당을 농성장으로 삼는 것 외에 이미 오갈 데가 없는 쪽은 그냥 논외로 치겠다. 열린우리당 내 통합신당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민주당, 고건 전 총리 등과 연대해 호남과 충청을 아우르는 ‘서부권 벨트’를 복원해야만 대등한 싸움으로 대선 구도를 짤 수 있다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지난 시기 탄핵 사태 덕분에 개혁진보 인사들과 중도보수 인사들이 졸속적인 벼락치기 결합을 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지난 3년 내내 ‘빽바지’ ‘런닝구’와 같은 천박한 용어가 난무하는 계보 투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거기에 다시 이념적 정체성과 문화적 구조가 더더욱 상이한 여러 세력들을 더한다고 했을 때 그 결과의 끝은 혼란, 분열, 자멸이 명확해 보인다. 특히 차기 대선에서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수도권의 개혁중산층이 그러한 전선 구도에 참여할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드는 의문은 통합신당론자들이 그런 셈법을 진짜로 믿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셈법은 실제로는 대선 구도가 아니라 차기 총선 구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열린우리당은 이미 정치적 꿈을 상실한 집단처럼 보인다. 적어도 꿈을 꾸는 사람들이라면 서부권 벨트의 복원이라는 옹졸한 시야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정치권 전체의 근본적 재편이라는 폭넓은 시야를 가질 것이다. 바로 2002년에도 반DJ(김대중)-반노무현이라는 안티 테제 전략을 고수한 한나라당은 실패했고, 낡은 정치질서 전체와의 싸움이라는 구도를 잡은 노무현 후보는 승리하지 않았는가.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 현재의 열린우리당 내 정계 개편 논의는 당장 중단해야 마땅하다. 열린우리당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정계 개편 논의 대신에 기득권을 버리는 ‘정치 혁신’을 전개해야 한다. 그 일차적 대상은 바로 열린우리당 자신이다. 열린우리당은 양극화와 안보 불안의 위기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을 돌보지 못한 무능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대통령의 잘못된 리더십에 안주해 매몰돼온 자신의 무기력과 직무유기에 대해 가슴을 치고 머리를 찧으며 국민에게 석고대죄해야 한다.

‘정치혁신’ 일차 대상은 그들 자신

무엇보다 역대 세 번에 걸친 민주정부들을 모두 실패로 몰아넣은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극복할 대안이 없이는 어떤 신당 논의도 무의미하다. 대중의 정치적 동원에 의한 집권 과정과 집권 이후 관료가 지배하는 국정 운영 과정, 그리고 개혁의 파행과 ‘레임덕’(권력 누수)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대안 없이 또다시 당을 깨고 신당을 만들어 정권을 잡겠다고 나서는 것은 명백한 기만에 불과하다. 정계 개편 논의는 앙시앵 레짐을 극복하지 못하고 국정 파탄을 막지 못한 열린우리당의 이념과 노선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반성이 따른 뒤라야 한다.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여당의 지위도, 다수당의 지위도 포기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 쉬운 길에 편승해 살아남으려는 구차한 시도를 일삼지 않고 위기의 바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심대한 ‘실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국민들과 소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현재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정당 구도, 후보 경쟁력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문제임을 직시해야 한다.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뚜렷한 비전과 가치의 제시만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2002년 대선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나라당은 정당 구도, 조직, 자금 모든 면에 압도적 우위를 지녔지만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에 반해 노무현 후보 진영은 비록 내우외환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정치 개혁의 비전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주력해야 할 목표는 이 시대의 ‘정의’(justice) 기준을 다시 세우고 ‘공공성’(publicness)을 복원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의가 갈수록 실종돼가고 있다. 옛날 같으면 낯 뜨거워서 못할 일도 그걸 뭐라고 탓하는 사람이 오히려 무안당할 만큼 몰염치가 판을 치고 있다. 단적으로 아파트에 미친 이 나라를 보면 이건 한마디로 ‘만인 대 만인의 약탈경제’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민주공화국”을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1조의 정신은 마치 파헤쳐진 무덤처럼 피폐함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이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극도의 절망과 분노와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댈 곳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는 이 불안한 세상이 너무 원망스럽고 싫은 것이다.

선명한 대중 노선은 어디에

열린우리당은 바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여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것은 한나라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나라당은 ‘성과’와 ‘실적’에 ‘정의’와 ‘공공성’을 대립시키는 ‘차별과 배제’의 신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재화의 크기가 경쟁의 결과를 사실상 결정해버리는 과점체제와 다름없다. 열린우리당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능력 발휘의 균등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신자유주의보다 훨씬 더 세계화되고 더 시장적인 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강력하고 새로운 전선을 창출해야 한다. 선명한 대중 노선을 창조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새롭고 광범위한 결합을 위해 나서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당 논의는 전선의 창출에 아무런 기여도 못한 채 권력정치의 드라마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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