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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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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이냐 선물이냐

등록 2006-09-27 00:00 수정 2020-05-02 04:24

중앙부처와 자치단체의 클린신고센터 접수 사례로 살펴본 공무원 청렴지수… 소소한 민원 부패는 많이 줄었으나 건설·세무 관련 ‘제도화한 부패’는 여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 마포구청 주택과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올 4월 모친상을 치른 뒤 부의금 명부를 확인하다 이상한 대목을 발견했다. 잘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1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의아하게 여겨 좀더 알아본 결과, 관내 재개발 지역의 주택조합 관계자들이란 걸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포도상자, 곶감, 꿀통, 현금…

거금은 아니라 해도 무심코 받았다간 뒤탈이 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업무와 관련되는 사이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현행 공무원 행동강령(제14조①)은 ‘직무 관련자로부터 금전·부동산·선물 또는 향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박씨는 구청 감사담당관실에 설치돼 있는 ‘클린신고센터’로 부의금 받은 사실을 신고했고, 감사관실은 담당 직원을 직접 보내 돈을 되돌려줬다.

중앙부처와 각급 지방자치단체의 감사담당관실에 설치한 공무원 자진신고 기구인 클린신고센터에는 공무원에게 건네진 갖가지 금품이 접수되고 있다. 많게는 수백만원, 적게는 수십만원의 현금에서부터 ‘뇌물’이라기보다 ‘선물’로나 여겨질 법한 포도상자나 곶감 같은 물품도 포함돼 있다. 금품에 담긴 뜻도 다양해 ‘잘 봐달라’는 사전적 의도가 엿보이는 예가 있는가 하면, ‘잘 처리해줘 고맙다’는 사후적 감사 표시로 비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섞여 있다.

서울지방병무청의 9급 직원인 신아무개씨가 볼리비아에 거주하는 교민 변아무개씨에게서 노란 봉투에 둘둘 말린 물건을 받은 건 지난 5월10일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길에 잠깐 들렀다”는 말만 짤막하게 남기고 총총히 사라져 미처 거절할 새도 없었다. 봉투를 펴봤더니 한글 설명서가 붙은 꿀통이었다. ‘아마존 상류지역 고목나무에서 채취한 벌꿀’이라고 적혀 있었다. 12만원어치에 이르는 1ℓ짜리 용량이었다. 신씨는 병무 상담에 대한 대가성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감사관실 클린신고센터에 신고했다.

신씨와 변씨의 인연은 그 훨씬 이전에 시작됐다. 볼리비아에 거주하는 변씨가 아들의 군 입대 문제에 대한 상담 전화를 해오면서부터였다. 국외에 머무는 변씨로선 입영을 연기해둔 아들의 군 문제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자진해서 갈 경우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등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씨는 “전화 상담으로는 한계를 느껴 이메일 주소를 알려준 뒤 질문을 주고받으며 병역의무 이행에 관한 안내를 해주었는데, (그에 대한) 성의 표시를 한 듯했다”고 말했다. 문제의 벌꿀은 클린신고센터를 통해 변씨의 국내 친척집에 우편으로 반환됐다고 서울지방병무청은 밝혔다.

뇌물인지 선물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물품을 뜻하지 않게 받았다가 돌려줄 길이 막막해지는 수도 더러 있다. 올 3월 경남지방병무청에서 벌어진 일이 그런 예다. 경남병무청의 7급 직원인 한아무개씨가 병역을 기피하는 청년을 설득해 입영을 유도한 일이 있었다. 며칠 뒤 한씨는 청년의 어머니 민아무개씨에게서 상자에 포장된 꾸러미를 받았다. 군 입대 문제로 청년과 부모 사이에 형성됐던 심각한 갈등이 해소된 데 대한 감사 표시였다고 한다. 상자 꾸러미는 홍화씨환 180g, 인진쑥환 180g 각 4통으로 12만원 상당이었다. 한씨는 클린신고센터에 신고한 뒤 이를 돌려주려 했지만, 민씨가 한사코 거절해 옥신각신하다 민씨의 동의를 얻어 경남 노인학대예방센터에 기증했다.

100만원짜리 기프트카드 사건

병무청의 송두표 감사팀장은 “클린신고센터에 들어오는 것들은 대가성, 청탁성으로 보기 어렵고 서비스에 대한 사후적인 감사 표시가 대부분”이라며 “그런 경우에라도 반드시 돌려주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 팀장은 “병무청에 대해선 아직도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걸 알지만, 1999년 1월 이후 지금까지 병무청 직원이 연루된 비리 사건은 1건도 없을 정도로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클린신고센터를 통한 자정 노력도 한몫하고 있다”고 말했다. 병무청은 클린신고센터에 신고된 실적을 심사해 일정한 금액을 포상금으로 돌려주는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도 있다. 올 들어 6월까지 각 지방병무청을 포함해 병무청 전체적으로 클린신고센터에 신고된 금품 수수는 19건, 172만7천원이었다. 건당 9만1천원 수준이다.

클린신고센터에 접수되는 금품은 이렇게 소소한 것들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울 지역 한 구청 세무과에서 일하는 직원은 올해 5월 화들짝 놀랄 일을 겪었다. 법인 부동산의 세금 문제로 들른 한 민원인이 관련 서류를 담은 봉투에 100만원을 집어넣어 책상 위에 던지다시피 두고 간 걸 뒤늦게 알아챘다. 대가를 노린 전형적인 뇌물 공세로밖에 볼 수 없었다. 질겁한 직원은 곧바로 클린신고센터에 신고해 돈을 돌려주었다. 이 구청이 올 들어 6월까지 반환 처리한 금품 4건, 180만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안상수 인천시장이 연루됐던 ‘현금 2억원 굴비상자 사건’도 안 시장 본인이 시 클린신고센터에 신고하면서 불거진 일이었다. 올 8월에는 서울시 권영진 정무부시장실에서 ‘진주목걸이 세트’(65만원 상당)가 발견된 적도 있다. 진주목걸이 사건은 당사자인 부시장이 시 감사관실 산하 클린신고센터에 자진 신고함으로써 세간에 알려지며 화제를 뿌렸다.

올 3월2일 건설교통부 감사관실에는 발신자 표시가 없는 등기우편이 접수됐다. 봉투 안에는 100만원을 충전한 ‘기프트카드’(일종의 크레디트카드)가 들어 있었다. 감사관실 관계자는 “직원이 민원인한테서 받은 걸 익명으로 신고한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금품 받은 걸 신고하면 포상을 하고 인사 때 혜택을 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익명’으로 신고할 정도로 (제도 운영이) 잘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직하게 반환했다 하더라도 금품을 받는 일에 얽혀 있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 자체를 꺼린다는 설명이다. 100만원짜리 기프트카드 사건은 지금까지 건교부 클린신고센터에 신고된 유일한 사례로 기록돼 있다.

기초자치단체 평균, 중앙부처의 3배

다른 부처의 사정은 어떨까? 또 공공부문 클린신고센터의 모습은 한국 공직사회의 청렴도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일까?

2005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클린신고센터를 통한 금지금품 반환 처리 실적을 보면, 중앙부처 60개 기관이 1729건, 3억1577만8천원에 이른다. 광역자치단체 36개 기관은 4307만원(1018건), 교육자치단체 13개 기관은 1049만5천원(56건)이었다. 기초자치단체 105개 기관은 7537만2천원(158건)을 반환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건당 금품액을 산출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드러난다. 전체 평균은 건당 15만원 수준인 데 견줘 기초자치단체는 47만7천원, 중앙부처는 18만3천원이다. 기초자치단체가 중앙부처의 약 3배에 이르는 셈이다. 광역자치단체와 교육자치단체의 건당 금액은 각각 4만2천원, 18만7천원이었다. 적어도 클린신고센터에 접수된 사례들로만 볼 때 시·군·구 등 민원인들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기초자치단체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규모의 금품 제공이 시도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를 기초자치단체가 더 부패했고, 중앙부처는 비교적 깨끗하다는 해석으로 곧바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클린신고센터에 접수됐다가 반환된 금품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은밀하게 받아 신고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수가 있을 수 있고, 이 경우 ‘덩어리’가 더 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고 있는 재정경제부 전직 관료들의 금품 수수 의혹, 올 7월 청장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국세청 직원들이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보좌진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사실 등은 행정부 클린신고센터에서 전혀 감지되지 않는 사안들이다. 중앙부처의 상대적 청렴성을 장담할 수 없는 이유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공무원들의 생활 개선과 의식 변화로 조그맣고 소소한 민원에서 생겨나는 부패는 많이 줄었지만, 건설·조달 부문 등 큰 힘이 작용하는 ‘제도화한 부패’는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형 법무법인과 관료사회가 큰 거래를 둘러싸고 결탁하는 양상, 게임산업(바다이야기)과 얽힌 비리 같은 부정부패는 고위직의 재량에 따른 것이 많아 잡아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방 병무청, 일선 구청, 지방의 경찰조직 등 국가기관의 실핏줄에서 오가는 뇌물보다 대규모 기업의 손익에 영향을 끼치는 제도를 주무르는 건설, 세무 부문의 비리가 드러나기도 어려울뿐더러 규모도 크다는 설명이다.

문규상 국가청렴위 심사본부장도 “(클린신고센터) 나름의 긍정적인 면은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면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클린신고센터에서 나타나는 일부 긍정적인 모습은 주로 하위직 공무원들과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다. 문 본부장은 이와 함께 “(클린신고센터에는) 돈 안 되는 것 위주로 모여, 작은 것으로 큰 것이 감춰질 수 있다는 구조”라며 “부패 관련 사안이 생겼을 때 부처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조직 보호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청렴위는 이에 따라 클린신고센터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 중이라고 문 본부장은 밝혔다.

국세청 금품 제공 등은 전혀 감지할 수 없어

각국 공공부문의 ‘부패지수’를 산출해 해마다 발표하고 있는 국제투명성기구(TI)는 지난해 10월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를 10.0 만점에 5.0으로 평가했다. 조사 대상 159개 나라 가운데 40위였다. 이는 전년 조사에서 146개 나라 중 47위(4.5점)를 기록한 것에 견줘 투명성이 약간 높아진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30개국 가운데 22위로 전년보다 2단계 올랐다는 대목도 긍정적인 신호다. 그렇지만 TI의 조사는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한 설문조사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일정한 한계를 띤다. 더욱이 비슷한 소득 수준의 나라들에 견줘 한국은 순위가 한참 떨어진다. 남궁근 서울산업대 교수가 2004년 TI의 부패지수를 분석한 결과, 47위의 한국과 비슷한 등급의 국가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절반 수준인) 5천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발전의 덩치에 걸맞은 의식의 옷을 아직 갖춰입지 못한 셈이다.



14만6천원짜리 잔챙이들?

클린신고센터 접수 물품은 성의 표시 수준, 윗선 부패 가리기엔 한계


공무원이 직무 수행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받은 금품을 미처 돌려주지 못했을 때 자진 신고해 반환할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하는 클린신고센터는 공무원행동강령(대통령령)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패방지법 제8조 규정에 따른 공무원행동강령은 2003년 국가청렴위원회(옛 부패방지위원회)에서 제정했으며, 그 이듬해부터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감사관실 안에 클린신고센터가 잇따라 설치됐다. 국가청렴위원회 집계 결과를 보면, 올 6월 말 현재 공공부문에 설치된 클린센터는 중앙부처(산하 가지 조직 포함) 316개, 광역자치단체 16개, 교육자치단체 16개, 기초자치단체 232개 등 모두 316개에 이른다. 클린센터 설치 대상 가운데 중앙부처에 해당하는 몇몇 위원회 등 11개와 규모가 작은 지방자치단체 2개를 빼고는 모두 클린신고센터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일선 공직 사회의 뇌물(또는 선물) 수수를 자진 신고하는 제도적인 틀은 일단 갖춰진 셈이다.
올 1월부터 6월까지 전체 클린신고센터에 접수된 금품 반환 처리 실적은 1081건, 1억5747만5천원이었다. 건당 14만6천원 수준이다. 지난해(1880건, 2억8724만원)엔 건당 15만3천원 수준이었다. 액수가 건당 10만~20만원인 것으로 미뤄 적어도 클린신고센터에 접수된 금품들은 대가성의 사전적 뇌물보다는 민원처리 뒤의 성의 표시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여겨진다. 클린신고센터는 일선 하위직 공무원 조직의 부패를 자체 정화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띠지만,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는 윗선의 큰 부패를 가려내는 구실을 하기엔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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