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끼리 은밀한 곳에서 거래하므로 적발이 어려워… 집행유예 57% 등 선고는 솜방망이… ‘부패의 4자 연대’ 끊도록 노력해야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대선자금 수사로 ‘국민검사’라는 별명을 얻은 안대희 대법관이 1996년 서울지검 특수3부장을 맡고 있을 때 일이다.
버스회사가 구조적인 비리를 저지른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승객들한테서 받은 요금의 일부를 비자금으로 만들어 관련 공무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한다는 것이었다. 수사팀은 제보 내용을 은밀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조직부패, 죄책감은 n분의 1
몇 달 동안의 내사가 끝나고 본격 수사가 시작될 무렵 총리실 암행감찰반이 버스업자와 식사를 한 뒤 청사로 들어가는 서울시 공무원을 덮쳤다. 주머니에서 수표 20장이 나왔다. 액수는 290만원. 업자가 서둘러 수표를 세다가 100만원짜리 한 장이 실수로 섞여 들어간 것이었다. 공무원은 “억지로 줘서 할 수 없이 받았다”고 해명한 뒤 돈을 한 복지기관에 기부했다. 수사팀이 수표 추적에 들어가자 검은돈의 뿌리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평검사로 이 수사에 참여했던 국가청렴위원회 문규상 심사본부장의 회고다.
“수표 뭉치가 수사의 단서가 됐어요. 매출 규모가 가장 큰 1등 버스회사부터 10여 곳을 수사 대상으로 했는데 요금을 빼돌려 비자금을 만드는 방식이나 공무원에게 뇌물을 건네는 방식이 거의 똑같았습니다. 담당 공무원을 소환해 조사하니까 해당 부서의 최고 책임자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모두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서울시의 한 부서 전체가 구속됐습니다. 전직 간부들까지 돈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을 피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무원들이 순진해서 수표 거래를 하는 바람에 수사가 쉽게 풀렸죠.”
10년 전만 해도 공무원들의 뇌물 사건은 이렇게 ‘조직부패’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상납과 분배가 일상화돼 있었던 셈이다. 돈을 나눠가지면 죄의식도 n분의 1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상납과 분배는 ‘입막음 효과’를 넘어 구명운동과 수사 방해의 밑거름이었다. 범죄적 의리는 조직원 중 일부가 직장에서 쫓겨나는 경우 업무와 관련 있는 사기업에 취업을 알선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버스 비리 사건에서도 전직 서울시 공무원이 퇴직 뒤 버스회사에 취직해 로비스트로 활동한 사실이 드러났다.
얼마 전 아파트 재개발·재건축의 전 과정에 개입된 검은돈의 실체가 다시 한 번 드러나 여전히 조직부패가 곳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전체 규모로 볼 때 조직부패 사건은 꾸준히 줄고 있다. 대신 개인적인 뇌물 사건은 꾸준한 편이다. 물론 ‘순진한’ 공무원들이 수사기관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수표 거래를 해 수사기관의 계좌추적을 당하거나, ‘뇌물일지’를 고스란히 남겨두는 이들이다. 검찰에 구속된 서울의 한 8급 세무공무원 이아무개씨의 부인이 작성한 ‘뇌물노트’가 세상을 놀라게 한 때가 있었다. 노트에는 “금년 1월 연휴와 일요일을 제외한 20여 일 동안 거의 매일 30만~150만원씩 모두 1800만원” “9개월 만에 1억 달성” “앞으로 8년 10억 목표, 좋은 주택과 검정색 그랜저 사고…” 등의 구절이 있었다. 이씨 가족의 월평균 소비 수준은 700만원이었다. 당시 이씨 월급은 150만원 안팎이었다.
현금으로만 거래, 수사 훨씬 힘들어져
법조계 인사들은 뇌물죄와 가장 비슷한 범죄는 간통죄라고 입을 모은다. 일단 범죄행위가 은밀한 곳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목격자를 찾기 어렵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고 그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한 수면 위로 드러나는 법이 없다. 특히 요즘은 조직부패가 줄어들고 개인부패 위주여서 돈을 주고받은 두 사람만 입을 다물면 무덤까지 비밀이 지켜질 공산이 크다. 범죄가 들통나는 유일한 경우는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깨졌을 때다.
뇌물범죄가 점점 은밀해지는 바람에 수사기관이 뇌물수수 사실을 밝히는 일은 예전보다 훨신 어려워졌다. 요즘엔 뇌물로 수표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근무하는 한 검사는 “100개 계좌를 추적하면 (범죄 혐의가) 1개 나올까 말까 한다”고 말했다. 계좌추적이 더 이상 뇌물 사건 수사에 효율적인 도구가 아니라는 얘기다. 현금이 오가는 경우가 많아 직접 물증이 남지 않는다. 이 때문에 수사진이 가장 기대는 증거는 뇌물을 준 사람(공여자)의 말(진술)이다. 언제, 어디서, 얼마를 건넸다는 말이 가장 중요하고도 유력한 증거가 된다. 대가성 유무가 분명하지 않거나 돈이 오가는 현장의 목격자가 없는 경우엔 입증이 더욱 힘들어진다. “내가 수사한 뇌물 사건에서 피의자가 무죄를 선고받았던 경험이 있다”는, 수도권 지역의 한 부장검사는 법원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털어놨다.
“돈이 오고 간 장소가 식당이고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에서 수백만원의 현금 뭉치를 테이블 위로 전달했다는 게 수사 결과였어요. 그런데 판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데 옆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느냐는 거지요. 상식에 반한다는 겁니다. 고매하신 판사님의 도덕 수준으로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돈 주고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는 게 보통입니다. 옆에서 밥 먹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지요. 다른 사람들이 뭘 주고받는지 누가 신경씁니까. 이런 식으로 재판이 이뤄진다면 앞으로 뇌물사건 수사는 하지 말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최근 뇌물사건 재판에서는 ‘양복 윗도리에 만원짜리로 300만원이 들어가면 어색해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해외여행용 가방에 만원짜리를 넣으면 2억원까지 들어가나, 3억원까지 들어가나’ 등이 핵심 쟁점이 되곤 한다. 게다가 최근엔 법원이 뇌물수수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뇌물 공여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일 때는 유죄를 인정받기 더 힘들어진 것이다. 대법원 판례를 보자.
“뇌물죄에서 뇌물을 받은 것으로 지목된 피고인이 뇌물 받은 사실을 시종일관 부인하고 이를 뒷받침할 금융자료 등 물증이 없는 경우에 뇌물을 건넨 사람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려면 △그 진술이 증거능력을 갖는 동시에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만한 신빙성을 확보해야 하고 △신빙성 여부를 판단할 때는 진술 내용 자체의 합리성, 객관적 상당성, 전후의 일관성 등 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됨, 그 진술로 얻게 되는 이해관계 유무를 봐야 하며 △특히 그에게 어떤 범죄 혐의가 있고 그 혐의에 대해 수사가 개시될 가능성이 있거나 수사가 진행 중인 때는 이를 이용한 협박이나 회유 등의 의심이 있어 그 진술의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정도에까지 이르지 않는 경우에도 그로 인한 궁박한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진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등도 살펴보아야 한다.”
기소된 878명 중 실형 선고는 99명
이런 판례 경향은 검찰 수사의 치밀함과 완성도를 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법원이 최근 몇 년 동안 뇌물죄를 비롯한 공직자 비리 사건에서 법정형에 크게 못 미치는 ‘솜방망이’ 선고를 내려 엄정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입법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형법과 특별형법이 공무원 범죄를 다루는 기본적인 입장은 “매우 가중된 처벌을 통한 범죄의 억제”다. 뇌물죄에 대한 법정형의 경우 뇌물 가액이 1억원 이상인 때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이, 5천만원 이상인 때는 7년 이상 징역이 가능할 정도로 높다. 이렇게 엄한 처벌 기준을 둔 것은 예방효과도 노린 것이었다.
그런데 대법원 자료를 보면 지난해 1월~8월까지 공무원 직무에 관한 죄(뇌물, 직무유기, 직권남용 등)로 기소돼 1심 재판을 받은 873명 가운데 집행유예를 받은 이가 501명이나 된다. 집행유예 선고율이 57.3%였다. 실형 선고를 받은 이는 99명으로 11.3%에 불과했다. 최근에도 서울남부지법은 납품계약 업체한테서 1억5천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국민건강보험공단 전 지사장 정아무개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판사들이 형을 줄여주는 이유로 자주 거론하는 것이 ‘공직자로서 장기간 성실히 근무했다는 점’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점’ ‘이미 사회적 명예가 실추된 점’ 등이다. 말장난 같은 구실이다.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에 예외 없이 부정부패를 뿌리뽑겠다는 식의 표현이 포함돼 있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상자기사 참조). 그만큼 뿌리뽑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다. 공무원 범죄로 처벌하는 받은 사람 수 역시 들쭉날쭉하다. 처벌의지가 문제였던 셈이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받는 뇌물은 전체 부패구조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또 이를 공무원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만 돌리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 부패는 압축성장을 위해 과도하게 집중된 정치권력과 권한이 비대화한 행정관료체제, 덩달아 독점화한 재벌기업 체제 등이 맞물리면서 비롯했다. 정부 주도적 자원배분 정책과정에서 형성된 복잡한 규제나 특례가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구조와 맞물리면서 부패 고리를 형성한 것이다. 여기에 지연·혈연·학연을 지나치게 따지는 온정적 연고주의와 접대문화 등 부패친화적인 관행과 의식이 부패의 온상 구실을 하면서 사회 전반의 부패구조를 확대재생산해왔다.
공적·민간 부패 다룰 시스템도 시급
전문가들은 공무원의 뇌물 관행을 없애려면 정치권, 관료권, 기업, 금융권 등 이른바 ‘부패의 4자 연대’를 근본적으로 끊는 사회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적 영역의 부패와 민간 부패를 총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단일한 국가적 시스템의 구축 등도 시급하다. 불법 정치자금·급행료·떡값·촌지 등의 낱말이 일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공무원들의 뇌물에만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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