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민국’을 만든 것은 문화관광부의 상품권과 영등위의 졸속 심사인데…사상 최대의 압수수색 대상은 애꿎은 게임 제조업자와 상품권 발행업자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임인택, 전진식, 유신재 기자 한겨레 24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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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으로 기억된다. 그때 기자는 에 갓 입사한 2년차였다. 2003년 말, 우연한 기회에 부산의 신흥 폭력조직인 ‘신21세기파’가 부산 지역 오락실을 움켜쥐고 수억원대의 뇌물을 부산경찰과 부산지검을 통해 상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 취재진은 부산 오락실 업주들이 조폭을 통해 부산시 경찰청과 검찰청 공무원들에게 매년 수억원대의 뇌물을 상납하고 있다는 문서 자료를 확보했지만 이를 드러내놓고 보도하지 않았다.

그때 기자는 “세상의 불의는 단칼에 자를 수 없다”는 사실을 막연히 체득했던 것 같다. 2003년 10월30일, 첫 보도가 나간 뒤 2주일쯤 지나 부산 조직폭력배들은 취재 차량의 타이어를 펑크냈고, 는 부산 조폭이 취재진에게 행한 테러 위협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뜻밖의 기사에 청와대와 부산 경찰청이 들썩거렸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때 기자는 세상에 언론의 힘으로도 차마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이 있음을 막연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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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부산 조폭 오락실 사건, 그뒤…
그때까지만 해도 오락실은 부산의 신흥 폭력조직인 신21세기파(곽경택 감독의 영화 에서 장동건은 이 조직의 중간 보스 역할을 했다)의 자금줄에 불과했다. 의 보도 이후 신21세기파를 이끌던 보스 안아무개씨는 현직에서 은퇴했고, 그 뒤를 승계하려는 암투로 부산 폭력조직은 혼돈을 겪었다. 그 무렵 부산 성인오락실의 메카인 중구 남포동 일대의 상품권 할인율은 6% 정도였다. 부산 오락실 기사는 중앙 언론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로부터 3년 남짓 시간이 흐른 2006년 8월, 성인오락기 ‘바다이야기’를 둘러싼 파문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내 임기 중에 생긴 문제는 성인오락실뿐”이란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그 말 속에 억울하다는 심경이 녹아 있긴 하지만, ‘도박 공화국’이란 오명 하나로 노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은 이미 끝난 듯하다.
‘도박 공화국’의 책임은 어디 있을까.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것은 쉽지 않다. 대한민국을 도박 공화국으로 탈바꿈시킨 양 날개인 문화관광부(이하 문광부)와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책임 소재를 서로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행산업과 관련된 정책과 법규 제정은 문광부의 몫이고, 등급분류 기준을 둘러싼 세부 규정을 만드는 것은 영등위의 책임이다. 두 기관은 애매모호한 규정의 틈새 속에서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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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현재, ‘도박민국’의 혈관은 전국 1만5천 개 성인오락실과 4천여 개의 성인 PC방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 있다. ‘도박민국’에 중독된 사람들은 전체 성인의 9.3%인 320만 명이다. 이에 견줘 캐나다의 도박 중독자의 비율은 2.6%, 오스트레일리아의 비율은 2.1%에 불과하다. 성인오락실의 ‘도박권’으로 자리매김한 상품권은 자금은 26조원에 달하지만, 정확한 규모를 추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을 ‘도박민국’으로 만든 두 날개는 ‘상품권’과 ‘영등위의 졸속 심사’다. 문광부가 상품권을 오락실 경품용으로 허용한 것은 2002년 2월이었다. 불황의 늪을 헤매던 성인오락실 업계는 2002년 말 대박을 터뜨린 ‘성인 경마 게임’ 덕에 순식간에 활황세를 탔다. 그 무렵부터 오락실 업주들은 상품권을 현금과 환전이 가능한 ‘도박권’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에 기름를 부은 것은 문광부다. 문광부는 2002년 12월30일 ‘게임제공 업소의 경품 취급 기준’을 개정해 도서상품권·문화상품권·국민관광상품권·호텔시설이용권 등을 제공할 수 있게 했다. 가맹점에서 현물과 교환되지 못하는 온갖 사이비 딱지 상품권이 도박권으로 변질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 문광부 상품권 실무를 담당했던 공무원은 “상품권을 폐지한다고 업계에 공문을 보내 겁을 주면 그쪽에서 대책을 들고 올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문광부는 2005년 3월 게임산업개발원을 통해 상품권 인증제를 실시해 19곳의 상품권을 오락실 경품으로 선정했지만, 부실한 심사와 탈락업체들의 반발로 석 달도 못 돼 이를 모두 취소했다.
상품권 폐지하면 대책 들고 올 줄 알았다?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번져 있었다. 그해 8월 7개 업체가 오락실에서 통용될 수 있는 상품권으로 지정됐고, 탈락한 업체들은 게임산업개발원의 지정을 받기 위해 정·관계에 무차별적인 로비를 벌였다. 상품권 업체들이 “국회의원실, 게임산업개발원에 수백여 통의 전화를 걸어 은근히 압력을 행사했다”는 등의 로비 의혹이 7월의 장맛비보다 지루하게 이어졌다. 상품권은 이미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돌변해 있었고, 영등위는 업계의 로비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뒤였다.
‘도박민국’을 완성한 다른 한 축은 영등위였다. 그들은 사행성 오락기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다. 문제는 업체의 뇌물이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영등위 아케이드게임물 등급분류 소위 위원과 의장으로 활동했던 조아무개(53)씨는 2003년 스크린경마 게임기 제조업자 박아무개씨에게 심의 통과를 대가로 일곱 차례에 걸쳐 고문료 2100만원, 여행 경비 120만원, 주식 투자금 1억원을 받은 혐의로 2005년 11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과 추징금 1억2220만원을 선고받았다. 영등위 사무국의 홍아무개(58) 영화부장도 2005년 4월 브로커를 통해 게임제조업자한테 1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최근 불구속 기소됐지만 지난달 영등위의 자체 인사위에서는 고작 정직 3개월의 처분을 받았을 뿐이다. 드러난 비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업계 관계자들은 “검찰 수사가 끝나면 영등위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3년 동안 영등위가 심의 통과시킨 성인오락기(18살 이용가)는 3천 개가 넘는다. 오락기 제조업자들 사이에서는 “로비 없이 심의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돈다. 8월25일 오전 9시, 서울 장충동 영상물등급위원회에는 7명의 전직 심의위원들이 둘러앉았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허심탄회한 반성을 하는 대신 파렴치한 변명을 늘어놓기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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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가량 이어진 기자회견 내내 누구도 도박공화국을 가져온 책임을 ‘구체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사법기관, 정치인들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박찬 위원은 회견 머리에 “지금 사태의 근본적 문제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등급심의를 내준 게임을 악용한 업자들에게 있다”고 쏘아붙였다. 그의 지적이 틀렸다고 할 순 없겠지만, ‘도박민국’의 고통을 떠안은 국민들을 납득시켰다고 보기는 힘들다.
‘도박민국’의 가장 큰 책임은 문광부와 영등위에 있다. 오락실 업주들의 이익단체인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 관계자는 “오락기 사행화에 큰 영향을 준 연타·예시도 문광부와 영등위가 입을 맞춘 듯 공문 형식 등을 빌려 표면상으로만 불법으로 규정했을 뿐 실제 통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사행성 오락기들은 영등위의 심의에서 여과되지 않았고, 문광부의 추가 조처도 없었다. ‘1기기당 1시간 투입액 9만원 제한’이란 규정을 무력화한 ‘자동게임 기능’도 게임물 등급분류 기준에서는 불법이었지만 문광부와 영등위는 사실상 이를 모두 허용했다.
연타·예시 등 사행화 통제 전무
지난 한 주 동안 신문과 방송에서는 ‘대통령’ ‘조카’ ‘바다이야기’ 등의 단어가 넘쳐났다. 2005년 3월 상품권 발행업체 지정과 관련해 정치인들의 압력이 있었고, 10여 명의 여야 국회의원이 이들 업체로부터 100만~500만원가량의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 측근의 동생이 지방에서 성인오락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등의 보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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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보도한 방송사는 관련 인사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당했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실이 나오지 않으면서 슬그머니 언론 보도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검찰은 상품권 발행업체를 상대로 사상 최대의 압수 수색을 벌이고 있다. 상품권 지정을 둘러싼 정관계 로비 의혹까지 밝히겠다는 기세다. 바다이야기, 황금성 등 성인오락기들도 곳곳에서 검찰 수사를 받거나 경찰 단속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 공은 서서히 사법당국으로 넘어간 형국이다. 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 소재는 잊혀진 채 애꿎은 오락기 제조업자와 상품권 발행업자만 중형을 선고받는 것이다.
문광부와 영등위가 조령모개식으로 강행한 사행산업 정책의 법적 근거가 불완전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관련 소송도 불사할 방침이다. 바다이야기를 둘러싼 소동은 누구의 책임일까. 종을 울렸지만 종을 쳤다는 이는 없다. 온 나라가 오락기에 매달린 채 2006년 8월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 8월13일 손아무개(38)씨는 성인오락에 중독돼 1억여원의 빚을 지고 고민하다 자살했다. 그의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모두의 침묵 속에서 바다이야기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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