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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2년, ‘지도국방’ 56년

등록 2006-08-24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미 군사동맹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온 작통권 변화의 역사… 1950년 맥아더에게 넘겨준 뒤 1994년 12월 평시 작통권 회복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주한미군의 역할이 주도적 역할에서 지원적 역할로 변경돼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역할을 담당할 체제를 갖추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40여 년간 소수의 미군에게 60만 이상의 한국군의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맡겨왔으며, 주한미군의 감축·역할 변경과 함께 주권국가로서의 작전권 문제를 논의할 때가 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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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해·공군의 모든 지휘권을 이양…”

1990년 3월8일 제148회 국회 국방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 ‘국군조직법 개정안’을 회기 안에 통과시켜야 할 사유를 묻는 질문에 이상훈 당시 국방장관이 답변한 내용 가운데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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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다. 이랬던 이 전 장관이 16년여 뒤 어떤 이유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최근 동료 전직 국방장관들과 군 원로를 두루 모아 전시 작전통제권(이하 작통권) ‘단독행사’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작통권의 역사는 한-미 군사동맹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미 군정을 거쳐 군 조직을 정비한 우리 정부는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앞두고 미 군정 총사령관인 하지 중장에게서 한국군 지휘권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한국군의 독자적 작통권 행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창설된 지 2년도 채 안 된 가난한 나라의 군대는 스스로 작통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귀하가 유엔군 사령부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돼 있음에 비춰 본인은 현 적대행위의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육·해·공군의 모든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공한을 보내 한국군 지휘권을 이양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군은 작통권을 환수하지 못했다. 1953년 8월3일 이승만-덜레스(당시 미 국무장관) 공동성명으로 유엔사의 작전권이 계속 인정했고, 1954년 11월 한-미 상호방위조약 부속 합의서에서 이를 ‘재확인’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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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쿠데타 가담을 위해 한국군 일부 부대가 멋대로 이동한 것을 두고 유엔사와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유엔사령관의 작통권 행사 범위를 “공산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도 했다. 이어 1965년 6월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면서 파월 한국군의 지휘권을 우리 정부에서 임명한 한국군 사령관이 행사하기도 했다.

1968년 1·21 사태와 미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은 또 한 차례 작통권 변화를 불러왔다. 두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는 독자적인 대(간첩)침투 작전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됐고, 1968년 4월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침투작전에 대해선 작통권을 한국이 행사하게 됐다.

1970년대 들어 ‘닉슨 독트린’에 따른 미군 철수계획이 발표되면서 이듬해 3월까지 주한미군 7사단 병력 2만 명이 이에 따라 철수하기도 했지만 한-미 두 나라는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한국군 현대화 지원과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개최에 합의했다. 또 ‘데탕트’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1977년엔 카터 행정부가 다시 철군 계획을 들고 나왔지만, 미 의회와 군부가 남북한 군사력 재평가 작업을 벌이면서 철군 계획은 수정을 거쳐 중단됐다.

냉전 종식의 충격이 준 극적 변화

한편 현행 한-미 연합방위 체제의 주체인 한-미 연합군사령부는 1977년 7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SCM에서 한-미 군사위원회(MC) 설치에 합의한 데서 유래한다. 이듬해 7월 말 열린 1차 한-미 군사위원회의 ‘전략지시’ 1호에 따라 같은 해 11월 한미연합사가 창설된 것이다. 이로써 한미연합사령관에게 한국 방어 책임이 맡겨졌고, 유엔사가 행사하던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은 연합사가 승계하게 됐다.

80년대 말부터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재차 거론되면서 ‘한국 방위의 한국화’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1987년 대선에선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용산기지 이전과 작통권 환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어 1991년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했고, 1992년엔 미군 장성이 맡아오던 지상 구성군 사령관직도 한국군에 이관됐다. 냉전 종식의 충격이 한-미 관계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같은 시기 냉전 종식에 따른 해외 주둔 미군 규모의 축소 요구가 들끊으면서 1989년 7월 민주당 샘 넌 의원과 공화당 존 워너 의원이 공동으로 제출한 ‘넌-워너 법안’이 제출됐다. 법안에 따라 미 국방부는 미국의 동아태 전략과 주한미군의 역할·임무·성격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작업에 들어갔고, 그 결과로 1990년 4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전략구상’(EASI)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3단계로 주한미군 재조정안을 제시했는데, 연합사 지상구성군사령관 한국군 장성 임명과 작통권 환수 문제도 여기에 포함됐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군의 지역적 역할’(전략적 유연성)도 이때 이미 제기된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1992년 10월 열린 한-미 SCM에선 연합사에 위임돼 있는 국군의 작통권 중 평시 작통권을 오는 94년 말까지 한국에 둘려준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공동 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나 넌-워너 계획은 1993년 북한의 핵 개발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빚어진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중단됐다.

1994년 12월1일 한국은 한-미 군사위원회 전략지침 2호에 따라 해방 이후 처음으로 자국군에 대한 (평시) 작통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경계임무 및 해·공군의 초계활동 등 일상적인 작전활동과 부대 이동, 군사대비 태세, 3군 합동 전술훈련 등 작전적 조치들도 연합사와 협조 절차 없이 독자적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연합권한위임사항’(CODA) 6개항을 포함한 평시 작통권 환수의 한계는 명확했다.

애초 90년대 말로 예정됐던 전시 작통권 환수 논의가 급물살을 탄 것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다. 9·11 동시테러 이후 미군의 ‘신속기동군화’를 기치로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PR)을 추진하던 미국은 노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미군의 ‘지역적 역할’을 거론하면서 주한미군 재편에 시동을 걸었다. 이어 용산기지 이전과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잇따라 협상 의제로 제시하는 등 한-미 군사동맹 재편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북핵 문제로 갈 길이 바쁜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주한미군 없는 미래, 얼마나 준비돼 있나

2003년 초반 시작된 미래 한-미 동맹 정책구상회의(FOTA)에선 일찌감치 작통권 환수 문제가 제기됐지만, 12차례나 회의가 열리는 동안 심도 있는 논의를 벌이지 못했다. 결국 2005년 9월 한-미 안보정책구상(SPI) 회의에서 논의가 본격 시작됐고, 같은 해 10월 열린 제37차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한-미 양쪽은 작통권에 관한 논의를 ‘적절히 가속화’하자는 데 합의하면서 작통권 환수 논의가 시작됐다.

한-미 군사동맹의 지난 역사는 주한미군 지위·역할 변경이 철저히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헌법 제5조 2항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국군의 사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군은 태생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반세기 이상 이어져온 동맹질서의 근본적 재편이 시작되고 있는 지금, 주한미군이라는 ‘상수’가 없는 미래에 대해 얼마나 준비돼 있는가? 작통권 환수로 헌법이 부여한 자주국방의 의무에 한발 다가선 군이 가져야 할 ‘존재론적’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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