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지법 판사의 가출 사건을 계기로 훔쳐본 법관들의 고단한 일주일… 목요일 ‘장날’의 ‘납품’ 완성을 위해 허구헌날 야근, 야근, 야근…
▣ 고나무 기자 한겨레 법조팀 dokko@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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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주인공이거나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영화·드라마다. 변호사가 주인공인 영화는 셀 수조차 없다. 검사와 비교할 때 카메라는 ‘법조삼륜’ 가운데 유독 판사만 푸대접한다. 너무 꼭꼭 숨어서일까? 민초들에게 판사는 ‘그까이꺼, 일주일에 한 번 법정에서 일하고 판결문에 결재나 하는’ 한가한 직업이거나 730번 버스의 ‘강남 최고명문 40년 전통 ㅎ결혼’ 따위 광고에서 첫손 꼽는 ‘좋은 직업’ 정도로만 비쳐지는 것 같다. 최근 수원지법 판사의 ‘가출’ 사건을 계기로 법관들의 세상을 슬몃 훔쳐봤다. 서울중앙지법의 민사단독부에서 근무하는 8년차 판사를 만나 ‘납품’(판결문 쓰는 것을 뜻하는 판사들의 은어)에 시달리는 애환을 듣고 그들의 일주일을 재구성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자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들도 ‘마감 인생’이었다.
# 월요일: 읽고 또 읽는 데 ‘깡치 사건’ 하나 더!
어제 고교 동창 녀석과 술 한잔했더니 아직도 뒷골이 당긴다. 9시 정시 출근이 힘든 하루다. 지하철로 1시간30분 거리. 그나마 카풀을 해서 좀 낫다. 어젯밤엔 “판사들 일주일에 하루 법정에서만 일하면 되는 것 아니냐.
판결문도 밑에서 다 써주고 너는 결재만 하면 되잖아”라며 2차 가자고 조르는 친구를 떼어내느라 힘들었다. 월요일엔 공식 재판이 없으니 놀아도 되지 않느냐는 친구놈, 집요했다. 목요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재판기일)이지만 이번주 ‘장날’엔 ‘납품’에 더 신경써야 한다. ‘깡치 사건’(사안이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 하나가 사람 잡을 지경이다. 건설회사와 아파트 입주민 사이의 손해배상 소송이 벌써 7개월째다. 양쪽이 낸 증거자료를 합치면 700쪽이 넘는다. 이미 변론을 종결했지만 목요일 재판을 앞두고 기록을 다시 한 번 모두 읽어야 한다. 게다가 ‘깡치 사건’이 하나 더 있다. 오늘도 11시까지 야근이다. 일의 리듬을 살리려면 20분 안으로 구내식당에서 후딱 저녁식사를 마치고 올라와야 한다. 지난해 지방에서 함께 근무했던 ㄷ판사가 올 초 인사 발령 뒤 “미제 사건 많아 고생 좀 하겠다”고 놀리던 게 떠오른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 메뉴는 제육볶음이던가.
# 화요일: 재판보다 어려운 ‘감정노동’ 준비절차
오후 5시30분 현재 준비절차를 3시간30분째 진행 중이다. 소송까지 낼 정도면 이미 당사자들 사이에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다. 1천만원을 꿔주고 돌려받지 못했다는 이 40대 아주머니는 준비절차실에서 상대방 아주머니와 멱살까지 잡을 뻔했다. 말리느라 혼났다. 준비절차는 본격적인 재판을 앞두고 쟁점을 정리하고 어떻게 진행할지 논의하는 시간이지만 정작 재판보다 어려울 때가 많다. 재판 땐 미리 양쪽 주장과 근거자료를 읽어가므로 당사자들과 질의응답이 쉽지만 준비절차 땐 그렇지 않다. 당사자들의 주장 한마디 한마디를 빼놓지 않고 죄다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쟁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난 이미 오늘 ‘감정노동’에 지칠 대로 지쳤다. 다행히 두 분도 싸울 만큼 싸웠는지 이젠 잠잠하다. 30분만 버티면 끝난다.
# 수요일: 심리가 어려우니 판결문도 만만찮구나
두 증권사 사이의 손해배상 소송이 끝까지 골머리를 쥐게 만든다. 심리도 어렵더니 판결문 쓰기도 만만찮다. 가끔 합의부 배석판사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땐 ‘납품’하면 부장판사님이 빨간 펜으로 ‘하자 보수’(배석판사가 1차로 쓴 판결문을 부장판사가 수정하는 작업)해주셨다. 지금은 아무도 내가 납품한 ‘제품’을 ‘보수’해주지 않는다. 나는 말 그대로 단독판사다. 내일 선고하는 7건 가운데 다툼이 심한 소송 2건은 써놨다. 간단한 재판 판결문도 4건 완성했다. 이제 하나 남았다. 10시30분까지 야근하면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 목요일: 오늘만은 ‘밥조’들이랑 맥주 한잔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법정에 선다. 오늘 진행할 30건 가운데 7건은 선고, 나머지는 속행재판이다. 판사들의 언행이 권위적이라는 지적이 많아 지금은 법대에 서서 방청객들에게 목례를 한 뒤 자리에 앉는다.
처음 단독판사가 됐을 땐 법정 경위가 “일어서십시오!”라고 외칠 때마다 얼굴이 빨개졌다. 이젠 법률용어를 모르는 피고들에게 되도록 주문의 뜻을 두세 번 거듭 설명하는 여유도 생겼다. 하긴 ‘피고들은 각자 500만원을 원고에게 지급하라’는 주문에서 ‘각자’가 ‘연대해’라는 뜻임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각자’는 ‘연대해’ 또는 ‘공동으로’ 책임을 지라는 뜻이고 ‘각’은 모두 따로 또는 별도로 책임을 지라는 것임을 누가 알겠나!
“판결문 밑에서 써주는 것 아니냐”고 묻는 고등학교 동창들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일주일 중에 오늘이 가장 마음 편하다. 6시가 지나 판사실에서 법복을 벗어던지고 ‘이렇게 일주일을 무사히 보냈구나’ 하는 안도감에 담배를 피워문다. 판사는 주간지 기자 같은 ‘일주일 인생’이다. 오늘은 우리 ‘밥조’(같은 방을 쓰는 판사들끼리 한 달에 일정 금액을 거둬 함께 점심을 먹는다. 같이 밥을 먹는 판사들이 ‘밥조’다)들 꼬셔서 맥주나 한잔할까?
# 금요일: 휴~ 오늘도 신건이 9건
오늘 아침에도 ‘신건’(새로운 사건)이 9건 올라왔다. 소장과 답변서를 읽고 서면공방을 벌일지 법정에서 변론을 들을지 사건별로 결정해 분류했다. 사안이 너무 복잡하면 법정에서 일일이 주장을 듣기 어렵다. 건물명도 등 크게 다툼이 없는 사건들은 바로 변론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되도록 법정에서 말로 듣고 판단하라’는 게 대법원 구두변론 지침이지만 한 달에 90건 넘게 처리하려면 모든 사건을 구술변론으로 처리할 수 없다.
소장과 답변서를 보고 ‘재판 진행에 필수적인 요건 사실이 빠져 있다’고 판단될 땐 당사자들에게 ‘보정명령’도 보내야 한다. 대충 이 작업을 끝내니 벌써 오후 4시다.
다음주 목요일에도 6개의 사건을 선고해야 한다. 어려운 사건에 집중하려면 불출석 사건 등 쉬운 사건 판결문을 오늘 적어도 2개는 써놔야 한다. 내가 맡은 미제 사건이 400건 넘고 한 달에 최소 90건의 사건을 처리해야 재판이 쌓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다. 아내가 싫어하지만 재판 기록을 보자기에 싸들고 퇴근하는 수밖에. 7살, 5살 난 아들·딸과 두 시간 놀아주고 11시부터 야근이다. “우리에겐 토요일 휴무가 의미가 없다”고 옆자리 ㄴ판사가 자조할 때마다 법원은 종이에 파묻힌 ‘절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너희 판사들, 일주일에 하루밖에 일 안 하잖아”라고 묻는 친구 녀석은 그걸 알까. 그나저나 지난주에 썼던 보자기를 내가 어디다 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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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법 민사합의부에서 배석으로 근무하는 ㄱ판사가 이달 ‘실종’됐던 사건이 있었다. 그는 6월13일 아침 “출근한다”는 한마디만 아내에게 남기고 사라졌다 5일 만에 돌아왔다. ㄱ판사는 팔을 다쳤다며 23일까지 병가를 내 입원 중이다. 수원지법은 26일 ㄱ판사가 출근하는 대로 결근 사유를 조사한 뒤 징계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를 아는 판사들은 “ㄱ판사는 연수원 시절부터 성격도 쾌활하고 합의부 부장판사·동료와도 무난히 지내온 것으로 안다. 개인적 문제로 가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의 한 판사는 “안양 등 신도시가 몰린 수원지법은 부산지법보다 규모가 크다”며 “과다한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 탓도 클 것”이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2005년〈사법연감〉을 보면 지방법원 법관 1명에게 접수되는 사건(본안사건과 즉결심판 등 본안 외 사건 총합)은 연 평균 4295.1건이지만, 의정부지법·수원지법·인천지법 등 수도권 지역 법원들의 평균은 이를 크게 웃돌았다. 인천지법 판사는 5363.4건으로 ‘1등’을 차지했고 의정부지법과 수원지법이 각각 5303건과 4742.5건으로 뒤를 이었다. 수도권 지원 가운데 법관 한 사람이 6264.2건을 맡은 의정부지법 고양지원과 6857.4건의 인천지법 부천지원, 6242.5건의 성남지원 등은 ‘초상위 그룹’을 형성했다. 춘천지법·대전지법 등 대도시의 지방법원도 전국 평균을 웃돌았다.
변현철 대법원 공보관은 “단순 건수만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수도권 지역 법원들이 사건 수도 많고 난도도 높다”고 밝혔다. 변 공보관은 “자존심이 강해 판사들 대부분은 공무 염증 등 스트레스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며 “상담 프로그램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예산 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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