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열기로 뜨겁던 날 프랑크푸르트 곳곳에 진을 친 붉은악마들과의 만남… 어학연수생은 주력부대, 배낭족은 지원부대… 풍물과 강강술래에 태권도 시범까지
▣ 프랑크푸르트=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뢰머 광장을 서울 광장 혹은 붉은 광장으로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국과 토고의 경기가 열리던 즈음, 독일 프랑크푸르트 뢰머 광장의 주인은 단연 붉은 악마들이었다. 토고전의 열기가 뜨거웠던 6월12~13일, 프랑크푸르트 리포트다.
인터넷에는 월드컵 노숙인 카페도
토고전 전날부터 프랑크푸르트는 이미 붉은 악마의 도시였다.
독일 시각 12일 오전 10시 중앙역 광장, 누군가 “두둥둥둥둥~” 북을 치자 여기저기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50여 명이 모이자 외국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북을 치는 조맹섭(28)씨와 구호를 외치는 김도형(29)씨가 응원을 주도한다. 인터넷 방송국을 운영하는 이들은 5월25일 서울을 출발해 대표팀의 베이스캠프가 있던 영국을 거쳐 독일에 도착했다. 이들은 거리를 지나다가 “헬로”, 이미 안면을 익힌 외국 응원단과 인사도 나눈다. 벌써 17개국 응원구호를 배웠다. 오직 “이란! 이란!”만 외치는 이란 응원이 가장 인상적이었단다. 남들은 이란 응원을 단순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란 사람들은 “박자를 맞추기 어렵다”고 주장한다고 전한다.
조맹섭씨 일행을 따라 응원단의 집결지 뢰머 광장을 지나 ‘마인 아레나’에 들어섰다.
프랑크푸르트를 관통하는 마인강 가운데 대형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양쪽의 강변에 응원석을 마련해두었다. 독일판 야외 응원광장이다. 이날은 ‘한국의 첫 경기’인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경기가 열린 날. 마인 아레나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다음으로 한국 응원단이 많았다. 얼굴에 태극기를 그린 이영섭(28)씨는 “어젯밤 런던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왔다”면서 “숙소를 찾지 못해 노숙을 했다”고 말했다. 소문만 들었던 한국인 월드컵 노숙자를 실제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새벽 4시30분이 되니까 전철이 다녀서 소음 때문에 잠을 못 자겠던데요”라고 생생한 경험을 전했다. 이씨와 친구들처럼 프랑크푸르트에는 역 광장과 공항에서 노숙을 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 이들처럼 영국 등 유럽 각지에서 날아온 한국인 어학연수생들이 한국 응원단의 주력 부대를 이루었다. 인터넷에는 월드컵 노숙인 카페까지 생겼을 정도다.
유학생 부대에 배낭여행객도 가세했다.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오스트레일리아가 일본에 0 대 1로 뒤지자 오스트레일리아인보다 열심히 오스트레일리아를 응원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신은주(22)씨는 태극기를 두르고 “한 골만!”을 외쳤다. 신씨 등 다섯 명의 여대생은 유럽 배낭여행을 하다가 마지막 여행지로 독일에 들렀다. 이렇게 어학연수생이 주력부대라면, 배낭여행족은 지원부대다. 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가 만회골을 넣자 “한 골 더!”를 외쳤고, 역전골까지 성공하자 강강술래 춤까지 췄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승리로, 한국도 벌써 1승!
“월드컵 보려고 미국 대신 영국행 어학연수”
어느새 오후 5시. 마인 아레나 옆 뢰머 광장으로 돌아오자 오전보다 훨씬 많은 붉은 악마들이 보인다.
아예 풍물패가 풍악을 울리고, 율동패가 흥을 돋우는 공연도 벌어졌다. 수백 명의 한국인들도 공연단을 둘러싸고 함께 응원을 했다. 심심한 독일인들 목을 빼고 구경하고, 아이를 목마 태워서 구경시키고 난리가 났다. 응원단은 내친김에 꼭짓점 댄스까지 ‘땡긴다’.

구경을 하던 우종강(26)씨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다가 독일로 날아왔다. 그처럼 머나먼 ‘아메리카’에서 ‘도이칠란트’까지 응원 온 사람도 적지 않다.
그녀의 이름은 이마이 리에코(34). 일본 여성이 한국 유니폼을 입고 “오늘 일본이 이겼죠?”라고 묻는다.
“졌는데요”라고 대답하자 얼굴에 아쉬움이 스친다. 하지만 그의 손을 잡고 있던 남자는 은근히 주먹에 힘을 준다. 알고 보니 이들은 한국, 일본 국제결혼 커플. 이마이는 남편 김서민(28)씨와 함께 신혼여행을 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일본인은 한국인과 대비됐다. 한국인들이 목청껏 “대~한민국”을 외치고 다니는 반면, 일본인은 삼삼오오 조용히 다니며 카메라 셔터만 눌러댔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중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중국인, 한국 응원단에 인사를 건네는 중국인들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지구촌 5명 중 1명은 중국인, 또 1명은 인도인. 월드컵이 진정한 인류의 축제가 되려면 국제축구연맹은 중국과 인도를 하나의 대륙으로 인정해 자동 본선진출권을 주어야 한다. 한편 잉글랜드 응원단은 언제나 술병을 들고 다니는 위압적인 자세로 ‘훌리건의 원조’임을 커밍아웃했다.
저녁 10시가 돼서야 어스름이 깔리는 뢰머 광장, 여전히 곳곳에서 붉은 악마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응원을 한바탕 ‘때리고’ 오던 청년이 “오늘 한국이 이긴 것 같애!”라고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뱉는다. 밤늦게 프랑크푸르트역으로 가는 길, 어스름한 골목에조차 붉은 악마들이 암약하고 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13일 오전 10시, 프랑크푸르트역 광장에서 만난 한호동(25)씨는 ‘어젯밤에 생긴 일’을 전했다.
역시나 역에서 노숙을 했다는 그는 “새벽 4시까지 역 광장 앞의 카페에는 한국인이 가득했다”고 전했다. 먼저 카페에 자리잡은 붉은 악마들이 지나가는 붉은 악마들을 볼 때마다 “이리 와! 이리 와!”를 외쳐서 결국에는 카페가 한국인으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한씨는 “옆에 토고인들도 한 테이블 있었는데 그 사람들도 나중에는 한국인이 지나가면 ‘이리 와’를 따라했다”며 웃었다. 충남대 응용소재공학과 축구동아리 ‘흑상어’ 회원인 한씨와 친구들은 “월드컵을 보려고 일부러 미국이 아니라 영국으로 영어 어학연수를 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다섯 달 전에 입장권을 예매한 덕에 무작정 월드컵족의 부러움을 사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토고인들도 한국말로 “이리 와”
경기장 매표소에 이르자 축복받은 소수의 이야기가 들렸다.
며칠째 매표소 앞에서 숙박을 하던 19명이 현장 판매의 ‘은혜’를 입었다는 이야기였다. 경기 당일 아침 잠깐 표를 팔았다고 한다. 한국과 토고 경기를 보러온 스웨덴 사람들은 한국 응원단을 보면서 “방금 공항에서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배낭을 멘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아무리 축구를 좋아해도 월드컵 기간 동안 휴가를 얻기 어려운 현실 탓에 한국 응원단은 대학생 위주로 구성된 ‘젊은’ 응원단이었다. 한국의 중년 응원단 중 상당수는 기업의 후원을 얻어서 온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의 이름은 주로 “현대!” “태광산업!” 같은 기업명으로 불렸다. 한국의 월드컵 응원 열기가 어떻게 ‘조직’되는지를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경기장 주변에 50여 대의 관광버스가 늘어서 있었다.
독일 교민과 한국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버스들이다. 이렇게 버스를 대절해 ‘단체응원’을 오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었다.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체코, 어느 나라 응원단도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다닐 뿐 수백 명씩 단체로 몰려드는 경우는 없었다. 늘어선 버스는 동원에 익숙한 동아시아적인 풍경이었다.
오후 6시 다시 뢰머 광장, 풍물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광장은 온통 붉은 물결로 일렁이고 있었다. 광장 옆의 도로에도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자동차가 보였다. 광장 옆의 마인 아레나에는 전날의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응원단을 모두 합친 수보다 많은 한국 응원단이 모였다고 한다. 이제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 응원구호를 모르면 프랑크푸르트 사람이 아니다. 독일인도, 외국인도 붉은 악마를 보면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지나간다. 마인 아레나로 향하는데 광장 한켠에서 기합 소리가 들렸다. 외국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보니 ‘할렐루야 태권도 시범단’이 격파 기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기독교와 태권도, 한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과 한국의 현대화를 상징하는 두 개의 코드가 묘하게 어울린 장면이었다. 이윽고 광장을 빠져나가려는데 사람들 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송인 박경림이었다. 월드컵 기간 동안 한국보다 독일 거리에서 연예인을 보기가 더 쉬웠다.
한국에서보다 보기 쉬운 연예인
숙소인 쾰른으로 돌아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역으로 향했다.
역 광장을 서성이는 붉은 악마, 역사의 바닥에 주저앉은 붉은 티셔츠들이 보였다. 국가대표 응원동아리 ‘붉은 악마’ 회원이라는 장강호(25)씨는 아예 바닥에 뻗어버렸고, 김현호씨(24)씨는 “응원을 하다가 코피를 흘렸다”고 했다. 이들의 뒤로 배낭을 메고 다음 도시로 향하는 붉은 악마들도 보였다. 그렇게 프랑크푸르트의 축제는 끝났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통일교 의혹’ 전재수 장관 사의…“직 내려놓고 허위사실 밝히겠다” [속보] ‘통일교 의혹’ 전재수 장관 사의…“직 내려놓고 허위사실 밝히겠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1/53_17654061311697_20251211500221.jpg)
[속보] ‘통일교 의혹’ 전재수 장관 사의…“직 내려놓고 허위사실 밝히겠다”
![그래, 다 까자! [그림판] 그래, 다 까자! [그림판]](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5/1210/20251210503747.jpg)
그래, 다 까자! [그림판]

쿠팡 새벽배송 직접 뛴 기자…300층 오르내리기, 머리 찧는 통증이 왔다
![[단독] “하이브 소유 피알회사가 민희진 ‘역바이럴’했다”…미국서 피소 [단독] “하이브 소유 피알회사가 민희진 ‘역바이럴’했다”…미국서 피소](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0/53_17653630444751_20251210503717.jpg)
[단독] “하이브 소유 피알회사가 민희진 ‘역바이럴’했다”…미국서 피소
![[단독] 윤영호 “전재수, ‘복돈’이라 하니 받아가더라…통일교 현안 청탁 목적” [단독] 윤영호 “전재수, ‘복돈’이라 하니 받아가더라…통일교 현안 청탁 목적”](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0/53_17653564336892_20251210503477.jpg)
[단독] 윤영호 “전재수, ‘복돈’이라 하니 받아가더라…통일교 현안 청탁 목적”

미국 연준, 기준금리 0.25%p 인하…추가 인하 속도조절 예고

성시경 기획사 10여년 미등록 ‘불법 운영’…대표인 친누나 검찰 송치

서울교육청 “2033학년도 내신·수능 절대평가…2040 수능 폐지”

“민주당도 똑같다고 생각할 것”…통일교 의혹 번져오자 뒤숭숭

코스트코 ‘조립 PC’ 완판…배경엔 가성비 더해 AI 있었네
![[단독] ‘세운4구역 설계 수의계약’ 희림 “시간 아끼려고”… 법 절차 생략 시인 [단독] ‘세운4구역 설계 수의계약’ 희림 “시간 아끼려고”… 법 절차 생략 시인](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5/1202/20251202503678.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