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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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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뚫으려는 것은?

등록 2006-05-19 00:00 수정 2020-05-03 04:24

“북한에 많은 양보” 발언, 네오콘의 대북 압박 분위기에 도전한 것인가… 평택 사태 패착 뒤 지방선거에서 정책 차별성 보이려는 국내용 계산인가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액면 그대로 봐달라.”

노무현 대통령이 5월9일 재몽골 동포 간담회에서 북한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하려고 한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한 청와대 관계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언론에서 “정상회담을 구걸하는 발언으로 선거 등을 염두에 둔 정략이 담겨 있다”며, 새로운 ‘퍼주기론’으로 공격하고 나선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있는 그대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예기치 않은 시점에 다소 ‘뜬금없이’ 터져나온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는 남북 관계 전문가들의 평가도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긴밀한 논의 아닌 개인적 고민의 산물”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1997년부터 몽골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기업인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날치 ‘청와대 브리핑’을 보면, 대통령의 인사말이 끝난 뒤 이 기업인은 “한국에서 기차에다 자동차를 실으면 울란바토르로 바로 오고, 시베리아 벌판을 유럽에 나가는 물류기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잘 설득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저는 북에 대해 완전히 열어놓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내용을 얘기해도 좋으니 만나서 얘기해보자, 우리 국민들은 북한 체제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 어떻든 함께 안정된 토대 위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길 바란다고 수십 번 얘기했습니다. …많은 양보를 하려고 합니다. 양보를 원칙 없이, 국민 보기에 따라 자존심 상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적인 정당성의 문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것을 양보하는 것이 아닌 다른 제도적·물질적 지원 이런 것은 조건 없이 하려고 합니다….”

동포 ‘간담회’에서 나온 얘기라고 해도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쉽게 듣고 넘기기 어렵다. 한반도 안팎을 둘러싼 최근 국제 정세의 엄중함 때문이다.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6자회담은 지난해 9·19 공동성명 이후 8개월째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위폐와 인권 문제를 앞세워 대북 협상파를 제치고 주도권을 탈환한 미 강경파는 북한을 겨냥한 공세의 수위를 차츰 높여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 제재 철회 등 제반 여건이 바뀌지 않고는 북한의 조기 회담 복귀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 3년 반의 임기를 북핵 해결에 ‘올인’해온 노 대통령으로선 참을 수 없으리만치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날 발언을 두고 “외교·안보 라인과 긴밀한 논의 끝에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노 대통령 개인의 고민과 결단의 산물일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더 이상 우리 정부가 가만히 있으면 네오콘과 의회 강경파가 주도하는 대북 ‘정권 교체’ 분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다급한 상황 인식에서 나온 발언으로 본다”며 “우리 문제를 더 이상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자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대통령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종합하면, 정부 정책의 강조점이 ‘한-미 공조’에서 ‘남북 공조’로 옮겨갈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북핵 문제가 해결 국면에 접어든 뒤 사태에 종지부를 찍는 ‘출구’로서 정상회담을 하는 기존 구도도 바뀌어야 한다. 대통령의 발언을 실타래처럼 꼬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이자 ‘입구’로서 정상회담을 활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노 대통령은 “다음달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다”며 “미국과 주변 국가들과 여러 가지 관계가 있어 정부가 선뜻 할 수 없는 일도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길을 잘 열어주면 저도 슬그머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에서 지난 2004년 11월 방미 당시 내놓은 ‘LA 발언’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당시 그는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며, 군사적 수단이나 경제 제재를 포함해 북한에 대한 압박이나 강압을 담는 어떤 전략적 선택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외교안보팀과 사전에 치밀하게 논의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점과 조지 부시 대통령 재선 이후 미국의 대북 압박 기조를 겨냥했다는 점에서 LA 발언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진정성’위해선 후속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LA 발언 이후 노무현 정부가 보여온 정책 행보에 비춰, 이번에도 ‘구두선’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이라크 파병과 용산기지 이전 협상에서 최근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한-미 공조’를 통한 북핵 해결을 위해 미국에 일방적으로 양보를 해왔다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몽골 발언을)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평택 사태나 한-미 FTA 추진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북정책에서 차별성을 보이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는 일부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날 발언이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대미·대북 설득외교 등 활발한 후속 조처가 필요하다. ‘민족 공조’의 핵심도 결국 우리 정부의 적극적 역할로 모아진다. 상황은 썩 좋지 않다. 대북 협상을 주도했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이미 “손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라는 게 중론인 반면, 이른바 ‘가치’에 입각한 네오콘의 압박 전술은 갈수록 정도를 더하고 있다. 게다가 시간이 없다. 이제 1년 반가량의 임기가 남았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노 대통령의 ‘많은 양보’가 북한 지도부에 얼마나 큰 울림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래저래 대통령의 ‘조바심’은 깊어만 간다.



“북한 고위층을 꼬드겨라”

탈북자 인권 공세 수위 높이는 미국이 노리는 것

“북한을 탈출해 동남아에 머물러왔던 탈북자 6명이 미국에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 4명은 성노예로 팔려갔거나, 강제결혼을 당했다가 도망친 사람들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신이 보낸 상원의원’으로 불리는 미 공화당 샘 브라운백 의원은 지난 5월5일 밤(현지 시각)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밝혔다. 그는 “(이들의 망명은) 탈북자 인권 문제를 미국 대북정책의 일부분으로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04년 10월 북한인권법이 미 의회를 통과한 이래 예견돼온 상황이 마침내 현실화한 것이다.
정치적 수사가 ‘현실태’로 바뀌면서 당장 그 파장이 만만찮다.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가 핵문제를 이용해 북한을 녹여내려는 계획이 승산을 보이지 않자, 인권 공세의 일환으로 ‘북한 난민’이란 말을 새롭게 조작해냈다”며 “우리는 ‘북한 난민’이란 말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브라운백 의원 등의 말대로 탈북자의 대규모 망명 행렬이 이어지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9·11 테러 이후 이민자 규모까지 줄이고 있는 미 국내 현실을 감안할 때, 탈북자의 망명이 집단적으로 이뤄지기보다는 ‘상징적 수준’에 그칠 것이란 게 대체적인 전망이기 때문이다.
다만 남한행을 택하는 데 부담을 느꼈을 북한 고위층의 미국행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지적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대북정책 방향을 ‘정권 교체’에 맞춘 부시 행정부의 노림수도 실상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만들어준 것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피해 망명했던 이라크 고위급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내놓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관련 정보는 대부분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진군의 북소리’를 울리는 데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최악의 지지율에 허덕이는 부시 행정부로선 중간선거를 앞두고 탈북자의 망명 행렬이 이어지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 인권 공세로 대북 압박 수위를 높임과 동시에 클린턴 행정부 시절 대북협상을 추진했던 민주당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에 북한인권법은 ‘양날의 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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