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양심선언자의 ‘흔들림’ 앞에서 절망하는 의문사 유가족 박희순씨…가해자로 하여금 고백 결단케 하는 양심선언 보호프로그램 도입을</font>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3월14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 건물 앞. 1·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서 풀 수 없었던 의문사 사건의 유가족들은 32건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손에 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의문사위에서 조사가 이뤄졌지만, 공안기관 가해자들의 침묵, 관계기관의 비협조와 조사 권한의 미비로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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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이 읽어내려간 기자회견문은 도스토프예스키의 소설 <죄와 벌>로 시작됐다.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전당포의 노파를 도끼로 살해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자기 죄를 고백했을 때, 쏘냐는 그를 사랑으로 감싸주며 시베리아 수용소로 동행길에 올랐다. 유가족들은 확언은 안 했지만, 독재정권의 말단 가해자들을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4년전 실종의 진실과 기무사
1992년 8월 젊은 나이의 동생을 떠나보낸 박희순(46)씨도 그곳에 있었다. 박씨는 동생 태순(당시 27살)이의 의문사 진실규명 신청서를 가지고 나왔다.
박태순씨 실종 사건. 처음엔 그렇게 ‘실종’인 줄 알았다. 설마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9년이 지나고서야, 가족들은 셋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동생의 죽음을 알려준 건 의문사위였다. 혹시 몰라 제1기 의문사위가 출범하고 나서 사건 접수를 시킨 지 10달 만이었다. 의문사위는 박씨가 실종됐던 1992년 8월29일 전후의 서울시 행려 사망자 212명에 대한 변사 자료를 검색한 끝에, 그가 8월29일 밤 9시55분께 시흥역 구내에서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실을 발견했다.
박태순씨는 한신대를 다니다 현장에 투신한 노동운동가였다. 수원 등지에서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다가, 아버지가 설득 끝에 소개해준 부천의 수영기계에서 선반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입사 2주 만에 직원들과 회식을 한 뒤 연락이 끊긴 것이다.
사망 사실을 확인한 의문사위는 전방위적으로 조사를 확대했다. 단순 열차사고로 보기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의 평소 귀가 경로였던 석수역이 아닌 그 다음 역인 시흥역에서 사망한 점 △주검 발견 때 주민등록증이 든 지갑 등 신원 확인 자료가 없어진 점이 걸렸다. 의문사위는 당시 전철 기관사, 검안의, 변사사건 처리 경찰관 등을 만나며 처음부터 사건을 되짚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기무사가 군내 좌경 세력의 동향을 관찰하는 일명 ‘마파람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고, 동향 관찰자 가운데 한 명이 박씨의 운동권 동료인 이창수(가명·단기사병)씨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씨는 민간인이었지만, 이씨와 연계해 동향 관찰 대상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의문사위는 당시 박씨와 이씨를 내사하던 기무사 소속 군무원 이철수(가명)씨로부터 중요한 진술을 들었다. 같은 팀에서 근무하던 추신수(가명)씨가 1992년 9월 초 “전에 우리가 내사했던 박태순이 전철역에서 죽었다. 오늘 기차를 타고 올라오다가 수원에서 내려 경찰들을 만나고 올라왔는데, 경찰들 이야기가 박태순이 죽었다고 하더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경찰과 기무사는 박씨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공안기관의 누군가 박씨를 미행했고, 미행 사실을 알아차린 박씨가 도망가는 과정에서 열차 사고가 났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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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는 탄력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의문사위에 출석한 추신수씨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의문사위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까지 추씨와 이씨를 데려가 거짓말 탐지 조사를 시도했으나, 추씨는 조사를 거부했다. 양심선언으로 조사의 물꼬를 텄던 이씨마저 “(조사에 응한다면) 전 동료인 추씨와 평생 원한 관계로 지내야 합니다. 국가와 민족, 유가족을 위해 진상규명은 해야 되지만, 개인의 권익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끝내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진실은 손에 잡힐 듯 바로 앞에 있었지만, 조사관들은 만져볼 수 없었다. 의문사위는 추씨 입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기 의문사위에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이민우 전 조사관의 말이다. “의문사위의 조사권이 제한돼 있어서 검찰처럼 강제동행도 할 수 없고, 밤샘 조사도 할 수 없어요. 추씨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진실은 진척될 수 없었습니다.”
유가족들은 이미 ‘쏘냐’가 되었다
압수수색도 불가능했다. 기무사 문서고에 들어가기만 해도 결정적 증거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무사 쪽은 마파람 사업 자료를 폐기했다고 답했고, 이에 의문사위가 직접 현장 조사를 시도했지만 거부당했다. 경기경찰청도 당시 자료인 ‘공작색인부’를 폐기했다고 답해왔다.
현재 의문사에 대한 조사권은 지난해 말 신설된 과거사위로 이관됐다. 그러나 조사관들의 협소한 조사 권한은 그대로다. 의문사 유가족들이 △압수수색권 △통화내역 조회권 △강제소환권 △청문회 실시권 등을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2005년 6월 이원영 의원(열린우리당) 발의로 조사 권한이 일부 강화된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지만, 여야 이견으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과거사위의 유한범 대외협력처장은 “가해자가 진실을 고백했을 때 사회적 보호를 해주는 양심선언 보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처럼 일정 기간 안에 과거를 고백하는 가해자를 사면해주는 제도와 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과거사법을 보면, 가해자가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을 경우, 과거사위가 사면을 건의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지만, 다분히 선언적인 내용이어서 가해자들의 고백을 이끌어낼지는 의문이다.
“밉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우리가 그 사람한테 원수진 것도 아니고… 그 사람도 권위주의 정권의 사회 구조 속에서 그런 일을 한 것이잖아요.”
박태순의 누이인 희순씨는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게 가해자를 벌주자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에서 자유로워졌다. 유가족들은 이미 쏘냐가 되어 있는데,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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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에서 박태순까지</font>
장준하, 박창수, 김창수, 이재호, 이덕인, 박태순….
이들의 죽음은 아직 의문에 휩싸여 있다. 유가족들은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피해를 당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떨치지 못한다.
박정희의 유신 통치에 항거한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다. 그러나 유족들은 주검 상태가 깨끗하고, 추락사를 목격했다는 동행자 김아무개씨의 증언이 모호한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했다. 의문사위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추락사일 가능성이 적고 △사망 뒤 중앙정보부 요원이 현장을 방문했으며 △사건 발생 당일까지 중앙정보부가 장준하의 자택에 대해 감청·미행 등을 수행해 매일 수건씩 보고가 이뤄졌으나 유독 약사봉 산행에 관한 보고가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단순 사고사로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추가 자료 제출과 현장 조사를 거부함에 따라 실체 파악은 이 지점에서 멈췄다.
1990년 서울구치소 수감 중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사건, 1971년 총선 당시 투표용지 분실사건 참고인으로 조사받던 기간에 사망한 김창수 사건 등도 미제로 남아 있다.
2000년 10월 출범한 의문사위는 1·2기를 거쳐 2년 동안 활동했다. 진상의 일부는 밝혀졌으나 전모가 드러난 사건은 드물다. 의문사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과거사위는 4년의 조사기간을 받았으며, 2년을 연장할 수 있다. 권위주의 통치 시기의 의문사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항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국가 적대세력에 대한 테러·폭력·학살 사건 등도 조사 대상에 포함된다. 과거사위는 “3월15일까지 모두 2160건의 사건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의문사위의 재조사 요구 사건은 장준하 사건 등 모두 30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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