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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사무총장, 오버하면 안 된다

등록 2006-02-22 00:00 수정 2020-05-03 04:24

출사표 던진 반기문 장관, 지지보다는 반대를 사지 않는 것이 중요
국민운동·법안 상정 등 소란 떨면 상임이사국들의 거부감 살 수도

▣ 이신화/ 고려대학교 교수·정치외교학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우리나라 사상 처음으로 유엔 사무총장 후보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지난해 일본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와 함께 한국인들이 유엔을 좀더 가깝게 느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규모(191개 회원국)의 국제기구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많은 역할을 수행해온 유엔에 대한 관심 증대는 환영할 만한 현상이다.

상임이사국 모두의 찬성 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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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장관은 유엔 총회의장 비서실장직을 포함한 36년에 걸친 외교관 경력, 국내외 외교가에서 능력 있는 행정가로서의 평판, 국내 정계에서 여야를 넘어선 지지 등을 고려해볼 때, 훌륭한 후보로서의 자질을 확인할 수 있고 이는 최초의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선출에 대한 희망을 높여주고 있다. 물론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직책은 선출시 반기문 장관 개인이 수행할 역할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유엔 결의안을 통한 국민투표로 건국되었고 한국전쟁시 사상 최초로 집단안보 원칙에 기반을 둔 국제사회의 개입이 이루어진 곳이라는 점에서 볼 때 ‘유엔의 자식’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나라다. 이렇듯 건국부터 유엔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성장해온 나라가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배출할 만큼 발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부할 만한 일인 동시에 국제사회 전체로 볼 때도 매우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3천여 명에 달하는 직원이 근무하는 유엔사무국의 ‘수석행정관’이다. 그러나 외교적·정치적 역할 또한 커서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등의 모든 회의에 참석해 국제사회의 현안에 대해 협의와 권고를 한다. 뿐만 아니라 분쟁 예방을 위한 조정과 중재 역할을 한다. 특히 탈냉전기 세계적으로 정치, 인종, 종교 등으로 인한 분쟁(내전)이 확대되면서, 분쟁의 관리자와 국제사회의 최고경영자(CEO)로서 역할은 더욱 확대됐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가 그 권위를 인정하는 사무총장에게는 ‘외교가의 교황’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무총장이 지구상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는 지적은 사무총장을 뜻하는 ‘SG’(Secretary General)가 실제로는 ‘희생양’(Scape Goat)의 약어라고 비관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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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사무총장의 선출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추천을 거쳐 총회가 승인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안보리의 예비 투표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15개 이사국(5개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 가운데 9개국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한다. 상임이사국들은 후보를 배출하지 못하지만, 이들 가운데 한 국가라도 반대할 경우 최종 후보가 될 수 없다. 일례로 제6대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총장의 경우 미국의 반대로 14개 상임이사국의 찬성에도 연임에 실패했다. 안보리가 여러 후보들 가운데 최종 후보를 선발해 총회에 건의하게 되면 총회의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획득할 경우에 사무총장으로 선출된다.

이렇듯 유엔 사무총장의 선출에서 5개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입장은 결정적 역할을 한다. 현재 중국은 대륙별 순환 원칙과 아시아의 인구 규모를 볼 때 차기 사무총장은 아시아에서 배출돼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프랑스는 불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무총장의 자격이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근래에 자국이 대륙 순환 원칙에 동의한 바 없다는 점을 밝혔다. 특히 존 볼턴 주유엔 미국 대사는 동유럽의 차례도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아시아 순서’에 대한 유보적 입장을 시사하기도 했다. 영국은 세계 각국의 상황과 이슈들을 포괄해낼 수 있는 사무총장이 선출돼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비치고 있지만, 한 번도 사무총장을 배출하지 못한 동유럽 출신 후보를 지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과거 자신의 권역이었다가 탈냉전기 점차 서구 유럽으로 다가가고 있는 동유럽 출신의 후보를 지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일은 어떤 태도 보일까

반기문 장관은 5개 상임이사국들에게 어떠한 평가를 얻을 수 있을까? 반 장관은 외교통상부 미주국장직을 거치는 등 미국통으로 대내외적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불어 실력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출신 후보라는 요소도 충족시킬 수 있고 수라끼앗 타이 부총리나 스리랑카 출신 다나팔라 전 유엔 군축담당 사무차장과 같은 다른 아시아 출신 후보들보다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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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정적인 부분들도 있다. 먼저, 그동안 유엔 사무총장은 긴박한 갈등 요인이 있는 국가에서는 배출되지 않았다. 비록 남북한이 화해 무드에 들어섰고 북한이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남북한이 분단돼 있고 대규모의 군사력 집중이 유지되는 상황이 반 장관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미국 또한 반기문이라는 개인은 선호할지 몰라도 현 한국 정부와의 마찰을 고려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한-미 동맹의 약화나 대북정책 등에서 관찰되는 견해차들은 미국이 한국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도록 만든다.

한편, 한국인 출신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일본이 ‘외교적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일본의 지지 유보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비록 일본이 반 장관의 사무총장 선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일본은 안보리의 비상임이사국이며 다른 국가들이 일본의 입장을 고려할 것임은 확실하다.

한국의 유엔 분담금 체납액 또한 문제가 된다. 현재 한국은 유엔에 1억3천만달러를 체납하고 있다. 정부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체납금을 모두 지불하고 더 많은 금전적 기여를 할 계획을 밝혔지만, 만약 한국 출신 사무총장이 배출된다면 자금 지원뿐만 아니라 인권, 환경, 빈곤, 분쟁, 개발 등 국제사회의 현안들에서 좀더 적극적인 역할이 한국에게 요구될 것이다. 이를 준비하는 것은 반 장관의 사무총장 진출을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 장관의 선출을 위해 우리나라는 어떠한 전략을 택해야 할 것인가? 현재 우리 정부는 ‘저자세’로 조용히 반 장관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는 데 있어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것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미국이 공개적·적극적으로 지지할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로서는 모든 상임이사국들에게 최선의 후보가 되는 것보다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후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현실성 있다.

현재까지 상임이사국 가운데 반 장관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나라는 없지만 그를 지원한다고 너무 소란을 떨면 다른 후보들이나 상임이사국들의 거부감을 살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국민적 운동이나 법안 상정을 통한 사무총장 진출 지원은 그다지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반 장관이 ‘국제사회의 공복’이 아니라 한국만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열린 세계주의’의 기회를

한국 내에서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진출 노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무총장을 배출하기 위해 한국이 외교력을 기울여야 하는가는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또 한국인이 사무총장이 된다고 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인 한반도의 갈등 조정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 진출 시도는 선출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사무총장이 지니는 커다란 상징성과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은 차치하더라도, 사무총장 당선을 위한 노력은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국한된 ‘닫힌 민족주의’에서 ‘열린 세계주의’로 나가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이는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반대라는 부정적 접근에서 시작된 유엔에 대한 관심이 국제사회에서의 새롭고 적극적인 역할이라는 긍정적 접근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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