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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면제, 그 씁쓸한 당근

등록 2006-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동북아 평화무드와 경제협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미국은 친미적 정책은 대한 보답으로, 일본은 관계 개선을 바라는 선물로 제공

▣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지난 2월6일 일본 정부는 단기로 입국하는 한국인들에게 영구적으로 비자 면제 조치를 실행한다고 발표했다. 얼마 전에는 비자 면제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시작해 이르면 2008년부터 실행할 수도 있다는 미국 정부의 발표도 있었다. 이런 변화는 긍정적인 것으로 일단 환영할 만하다. 단 며칠간의 여행을 위해서도 대사관 담벼락을 따라선 채로 장시간 기다려야 하거나, 영사 앞에서 범죄자처럼 조사받는 일도 더 이상 없으며, 상대국의 입국 심사장을 당당하게 통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질적인 외교 성과이며, 특히 일본에 대한 자주적이고 단호한 태도가 오히려 일본의 양보를 끌어냈다고 자찬할 수 있을 법도 하다. 더 나아가 미국이 한국을 이제야 동등한 파트너로 인식하게 된 전환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최근의 조치들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국제정치적 맥락들과 연결돼 있어 앞으로 주어질 편리함만 가지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안보 딜레마는 여전한데…

비자는 국제정치적으로 중요한 함의가 있다. 여권은 자국에서 발행해 그것을 소지한 사람의 신분을 증명해주는 서류인 데 반해, 비자는 방문하려는 국가에서 입국을 허용한다는 서류이다. 다시 말해 여권은 자국의 외교적 주권 행사이고, 비자는 상대국의 외교적 주권 행사이다. 비자에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조약 이후 성립된 근대국가 체제의 중요한 특징이 반영돼 있다. 즉, 자기 영토와 국민에 대한 절대주권의 성립은 국가 간의 확실한 분리를 초래했고, 더 이상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민족국가 체제가 만들어내는 국제정치 영역은 국가 위에 더 강한 권력이 없는 현실주의 이론가들이 말하는 무정부 상태가 되고, 국가의 선택은 적자생존의 권력투쟁을 벌이거나, 조약을 체결해 협력관계를 모색하게 된다. 외교관계 없이 적대적인 경우가 전자라면,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사이에서 비자 발급을 통해 출입국을 허용하는 것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비자는 국가 중심의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산물이며,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주의의 절정이었던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국가주권은 어느 때보다 약화돼 민족국가의 후퇴나 소멸마저 예측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비록 그만큼은 아니어도 국가 간의 구별과 국경의 배타성이 오늘날 대폭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국가 간에 비자 면제 협약의 사례들이 증가하고, 면제 조치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발급 자체가 과거에 비해 훨씬 용이해진 것은 안보 중심의 국제정치가 경제나 문화 등 다른 분야로 이동함으로써 국가주권 행사의 강도가 약해졌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경우도 일견 이런 국제정치적 대세 변화의 결과처럼 보인다. 즉, 자유무역협상의 활성화나 비자 면제 조치의 시행 등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안보 및 군사적 긴장 구도를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깊이, 더 오래 지니고 있었던 동북아에서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반 동맹의 수준을 넘어 혈맹이라고까지 말하는 한-미 관계를 감안하면, 진작 비자 면제 대상국이 되지 못한 것은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일방적인 안보 의존을 해온 비대칭 동맹이라는 점과 더불어, 우리도 현재 사회문제로 겪고 있는 국가 간의 경제적 차이로 인한 불법 체류를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때늦은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기비자 면제로 대표되는 한-미·한-일 관계에서 불고 있는 새로운 변화들은 앞에서 지적한 국제정치적 대세 변화와는 여러 면에서 상치된다. 특히 동북아에서 9·11 이후에 오히려 현실주의적 안보 딜레마의 구조가 재현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북한과 미국의 대결 구조는 물론이고 중국 위협론을 기반으로 미-일 동맹의 강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주변국들의 신민족주의적 경쟁 구도 역시 예사롭지 않다. 따라서 최근의 비자 면제 조치들을 현실주의적 국제정치 구조가 약화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미국과 일본의 대외정책적 필요에 의한 측면이 크다. 일각에서는 세계적 추세와 반대로 9·11 이후 미국이 비자 발행과 입국 심사를 전례 없이 강화함으로써 발생한 심각한 부작용들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한다. 9·11 이후 3~4년간 1천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감소했고, 유학생 수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으며, 비이민 비자 신청이 35%나 급감했다는 통계들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대미 자주외교 쇠퇴로 인한 결과

하지만 이런 대내적 필요가 한국과의 비자 면제 협정을 추진하는 주목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는 수년간 갈등을 빚어오다가 최근 상당히 관계가 개선된 한-미 동맹의 맥락에서 판단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반미 성향의 자주외교와 북한에 대한 위협 인식의 차이로 대표되는 초기의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전환점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친미적 성향을 보이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최근에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가입에 대한 긍정적인 검토 의사를 밝힌 것 외에도, 쇠고기 수입 재개와 스크린쿼터 축소와 함께 나온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에 대한 전격적인 발표 등으로 숨가쁘게 이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자 면제에 대한 미국의 전향적인 고려는 관계 개선을 위한 한국의 노력에 대한 당근의 성격이 강하다. 일본의 경우는 반대로 한-일 관계의 악화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가 대미 협력 노력에 대한 당근이고 일본의 조치는 관계 개선을 바라고 제공하는 선물 공세라는 점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아무튼 분명한 것은 비자와 관련된 미국과 일본이 보인 일련의 변화들이 동북아 국제정치 구조에서 평화 무드와 경제협력이 증진된 결과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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