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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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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고 다정하고 당황스러운…

등록 2006-01-25 00:00 수정 2020-05-02 04:24

[아버지의 부재에 관한 다섯 개의 고해성사]

80년대생 소설가가 말하는 ‘우리 세대의 아버지’는 대중문화 속의 멋진 모습
각자 행복하다는 환상 속에서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실재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 김애란/ 소설가

내 몸속에는 무수한 혈관들이 나무의 잔뿌리처럼 뻗어 있다. 나의 몸은 어둡고 나보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 이따금 나는 내 몸속을 조용히 흐르는 강을 상상하며 중얼거린다. 아마도 그 물관을 따라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정보’일 거라고. DNA- 우리 몸의 도서관. 그곳에는 내 유전자의 기억과 본능 혹은 나쁜 습관들이 입력돼 있다. 설사 그것 중 대부분이 중요한 페이지가 찢겨져 있거나, 엉뚱한 일화가 끼어 있거나, 하(下)권이 사라진 이야기들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행히도 이것은 나의 몸이다.

부드럽고 반복적인 ‘부자상’

나는 가족에게서 나의 유전자를 발견할 때마다 당혹스럽다. 반갑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한 무엇. ‘남’도 아니지만 ‘나’는 더더욱 아닌 이 난처함. 같은 성을 쓰고, 같은 화장실을 쓰는 것과 달리 피를 나눴다는 것이 막연하게 느껴질 때, 그들은 내 앞을 왔다갔다 하며 아주 사소한 근거들로 우리가 ‘가족’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발가락이 닮았다고 좋아하고, 발가락이 병신같이 구부러진 것까지 똑같다고 화를 내고, 대들다 방문을 세게 닫았다는 이유로 두들겨맞고, 쟨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차고,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는 일기를 쓰고, 나의 끔찍한 부분이 형제나 아버지에게도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거짓말을 하고, 비난하고, 상처주고- 그러다가도 저녁이면 다 같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하하하 웃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똑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아버지, 어머니, 순이, 민수 따위의 이름을 가진 유전자들과 함께. 그러니 가족이란 서로의 불완전함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해 서로의 눈앞에서 끊임없이 알짱거리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지만 때론 미치겠는.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일상적 가족 앞에 펼쳐지는 TV 광고들이다. 광고는 이 평범한 가족과 동떨어져, 마치 마술 극장처럼 뻔하고도 새로운 ‘가족상’ 또는 ‘부자상’을 보여준다. ‘자상한’ 아버지와 ‘순진한’ 아이가 그것인데, 이 지겨운 행복은 너무나 부드럽고 반복적이어서 전혀 지겹지 않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이 시대의 아버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적’이라 믿고 싶어하는 것, 혹은 우리가 꿈꾸고 선이라 생각하는 상(想)들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요즘 아버지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자는 심리학자도 소설가도 아닌 ‘광고’ 그 자체다. 그것은 아버지를 분석하지 않고 제시한다. 광고는 강요를 모른다. 그것은 권유한다. 부드럽게, 반복적으로. 욕망은 아이처럼 순수하며, 좋은 아버지의 ‘좋음’을 결정하는 것은 ‘자상함’이 아니라 ‘자상한 구매력’이라는 것을. 그래서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는 부녀가 화면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우리는 먹던 귤을 마저 우물거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사실 가족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다고. 그리고 그 짜증이- 광고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뚱뚱한 휴머니즘보다 인간적이라고.

우리의 진짜 고민은 ‘개인’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아버지는 사냥을 하거나 돈을 벌어왔다. 그러나 돈 버는 아버지와 구매하는 아버지는 분명 다르다. 광고 속 아버지의 이미지 역시 예전에도 자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온화했던 적도 없으리라. 광고 속 아버지들은 더 이상 권위적이지 않다. 이상하게 늙지도 않았으며, 약하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그들은 깨끗하고, 건강하고, 세련됐으며 무엇보다 자상하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멋’있어졌다. 희생자로서, 권력자로서,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아비가 아닌 멋진 아비. 멋진 아버지란 말은 또 얼마나 감각적인가. TV 속 아버지는 윤택함을 과시하지도 않고 그 안에서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그는 항상 자연스럽다. 예전부터 줄곧 거기 있었던 것 같은 그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부채감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 나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나의 행복을 억압하는 것도 아닌- ‘아버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의 구도.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상품 혹은 소비의 문맥. 아버지들이 진짜 그런가 여부를 떠나 지금 그런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떠다니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한 기준을 만들어내는 진짜 아버지들이 누구인가를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전통적인 ‘대결 구도’를 놓고 봤을 때 우리 세대가 경험한 아비 부정은 ‘문화적’인 것들- 가요나 문학작품, 영화 등- 이 많았다. 특히 상업적인 대중가요가 그러한데 대부분 가짜인 경우가 많았다. 십대 가수들의 경우 아버지의 논리 안에서 아버지를 부정하며 아버지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인사성 바른’ 로커 혹은 래퍼들에게 우리가 적당한 위안을 받은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속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 비판이 위선적이라 해서 실망할 만큼, 우리에게 아버지가 거대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때 그리고 지금 아비 말고 우리에게 거대하게 느껴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추측건대 지금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아비’가 아니라 ‘개인’이 아닐까 싶다. ‘자유’가 아니라 ‘의무’처럼 지워진 개인을 감당하느라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애쓰는 이상한 개인들. 그래서 자꾸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긴장을 풀기 위해 움직이고 수집하고 소비하는 세대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상하다. 광고 속 아버지들처럼.

아버지는 말하셨지, 주체적으로 살라고

이상한 것은 ‘주체’에게 ‘주체적’으로 되라고 말하는 자 역시 부드럽지만 여전히 실재하는 아비이며, 아버지의 언어라는 점이다. 자식이 영리해지는 만큼 아비도 복잡해지고- 종래에는 서로가 무관한 관계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는 구도로 돌아갈 수 있으며, 각자 행복하다는 환상 속에 빠져버리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르겠다. 강박이 되지 않으려는 습관적이면서 어정쩡한 조심스러움을 갖고. 그러나 유의미하게, 당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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