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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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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아내는 철거정책, 상상할 수 없는 일

등록 2006-01-19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각종 국제회의와 규약들은 강제퇴거조차도 인권침해 행위로 규정하고 금지
집 비울 때까지 기다려주고 주거대책 배려하는 영국·필리핀·타이에서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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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

강제 퇴거는 정당한 절차와 주거 대책 없이 사람을 그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강제로 쫓아내는(퇴거) 행위를 뜻한다. 각종 국제회의와 규약들은 이를 인권 침해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금지할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선언해왔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는 여기서 한술 더 뜬다. 우리는 사람을 집에서 그냥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부수면서 쫓아낸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는다. 강제 철거는 국제사회가 금지하도록 주장하는 강제 퇴거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다.

일본의 ‘응능응익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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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에서는 더 이상 강제 철거나 퇴거가 사회적인 이슈가 아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강제 철거’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고, 강제 퇴거라는 용어가 있긴 하지만 이는 가옥주와 세입자 사이에 (민사적인) 다툼이 있을 때뿐이다.

영국의 경우, 주거환경 정비사업의 방식이 오랜 기간 동안 변화돼왔다. 우리나라처럼 건물을 전부 부숴버린 뒤 아파트를 새로 짓는 식의 개발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예전부터 있던 건물을 조금씩 개조해 다시 사용하고, 꼭 필요한 기반시설을 새로 설치할 뿐이다. 따라서 현지 거주민이 개발사업으로 강제로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영국에서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공공임대주택(council housing) 등이 낡아 철거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강제 철거는 이뤄지지 않는다. 몇 년 전 영국의 도시계획 관련 회의에 참석하러 버밍엄을 방문했던 동료는 “영국의 철거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지자체는 철거가 예정된 공공임대주택 세입자들의 임대 기간이 끝날 때까지 철거를 유보하고 있었다. 아직도 이주를 하지 않은 주택이 많았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모두가 이사 나갈 때까지 사업은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철거 시점만 늦춰주는 게 아니다. 거주자 모두에게 적절한 주거 대책이 마련된다. 그렇지 않고 진행되는 개발사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주거지 정비사업은 주로 공공에 의해 이뤄진다. 애초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원거주민의 재정착률을 높이기 위해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는다. 여기에는 대체주택 제공, 임대료 보조 등이 포함된다. 일본에서는 저소득 주민이 주로 재정착하는 공영주택의 임대료 체계에서 소득과 누리는 편익에 따라 차등적으로 임대료를 부과하는 ‘응능응익제도’를 택하고 있다. 격변완화조치라 하여 개발사업으로 새로 입주한 주택의 임대료가 기존보다 많은 경우 5년에 걸쳐 그 임대료를 6분의 1씩 인상하는 조치를 통해 급격한 주거비 부담을 피하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처럼 임대 보증금이 부담스러워 임대아파트 입주를 포기하는 사람도 없고, 임대료가 밀려 살고 있던 임대주택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없다. 민간 개발사업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는 주택을 강제로 철거하는 등의 사례는 한동안 보고된 바 없다.

타이, 가난한 아시아의 모범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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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우에도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물리적인 주택의 개량만을 위한 개발사업보다는 커뮤니티의 재생과 활성화를 주요한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각종 개발사업으로 거주할 곳을 잃은 원거주민을 위해 대체주택을 마련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주택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또한 강제 퇴거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은 강제 퇴거를 진행할 때 필요한 절차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필리핀의 도시 및 주택법(Urban Development & Housing Act) 제28조는 사회 취약계층이나 집이 없는 시민들이 포함된 퇴거와 철거를 진행할 때 △주민과의 적절한 상담 △퇴거·철거 과정에 지방정부 공무원(또는 그 대리인)의 입회 △철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적절한 신원증명 △정규 근무시간과 날씨가 좋을 때만 퇴거·철거 △(콘크리트 구조물일 경우를 제외하면) 철거에 중장비 사용 금지 △경찰의 정복 착용 입회 △임시적·영구적 재정착 방안 마련 등을 규정하고 있다.

또 재정착 방안의 일환으로 커뮤니티 모기지 사업(Community Mortgage Program)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 사업은 슬럼 지역 주민들의 불안정한 점유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이들에게 돈을 빌려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또는 재정착할 토지를 구입하도록 하고, 주민들이 직접 자신의 집을 건설하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최근 가난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많이 거론되는 것은 타이의 CODI(Community Organizations Development Institute) 활동이다. 이 기관은 타이의 주택청이 기금을 제공해 만들었다. 이 기구는 철거 위협에 직면해 있는 슬럼 지역 주민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자신이 살고 있는 거주지 또는 재정착지를 구입해 스스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는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한데, 주민들은 융자된 돈을 갚기 위한 자체 금융조직을 만들어 일정 기간 동안 실적을 쌓아야 한다. 이를 마이크로 금융(micro credit)이라 한다. 주민들이 정해진 조건을 갖춰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신청하면, CODI에서는 주민 개개인이 아니라 그 주민 조직에 돈을 빌려주고 지역사회 전문가와 행정지원 그룹을 결합시킨다. 주민 입장에서는 시중보다 약간 높은 금리를 감수해야 하나, 담보가 필요하지 않고 이자의 1%는 주민조직의 운영과 자체 활동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2004년 말 현재 300개 도시의 주민 825만 명이 CODI 지원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한국과 남아공이 뒤집어쓴 오명

국제 사회에서는 강제 퇴거와 철거를 금지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돼왔다. 우리나라는 한때 유엔 회의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가장 잔인하게 강제 철거가 진행되는 나라로 거론되는 수모를 겪었고, 1995년에도 유엔의 사회권규약위원회로부터 대책 없는 강제 퇴거를 중단할 것을 권고받기도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10주년이 되는 이 시점까지 폭력적 강제 철거에 눈감고 있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매우 수치스럽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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