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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는 계속 버림받을 것인가

등록 2006-01-11 00:00 수정 2020-05-03 04:24

‘뜻밖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환율 급락, 세자릿수 고착화될 듯
달러 앞다퉈 팔다 패닉상태에 빠져들 수도… 투기세력 장난에 대비해야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새해 벽두부터 원-달러 환율이 급락해 외환위기 이전 수준인 세 자릿수로 돌아갔다. 이제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천원선을 밑도는 시대가 장기적으로 ‘정착’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대두되고 있다. 1월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987.30원으로 990원선마저 힘없이 깨졌다. 1997년 11월(986.30원) 이후 최저치다. 다음날 정부가 긴급 환율대책회의를 열고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당국에 부여된 권한과 역량을 최대한 동원하겠다”며 적극적인 시장개입(달러화 매수) 의사를 밝힌 뒤 환율이 다소 반등하는 듯했지만 결국 990원대 회복에 실패하고 달러당 988.10원으로 끝났다. 원-달러 환율이 적극적인 시장개입 선언에도 아랑곳없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환율 급락의 배후는 누구인가

시장에 알려진 가장 큰 요인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공개시장위원회가 12월 정례회의 의사록을 공개하면서 “향후 인플레이션 억제에 필요한 금리 인상 횟수는 많지 않을 것”이라며 금리 인상을 조기에 중단할 수 있음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국제 금리 차이에 따라 미국 채권을 사기 위한 자금이 유입돼 달러 강세가 나타난다. 반대로 금리 인상이 끝나면 달러는 약세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연구위원은 “금리 인상 횟수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메시지가 전달되자 즉각 역외시장에서 원화와 달러 간 차액거래를 위해 투기적으로 달러를 샀던 세력들이 달러를 투매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며 “모건스탠리·리먼브러더스 등 국제적인 외국 투자은행들이 달러의 추가적인 약세를 예상하고 선물시장에서도 달러를 내다팔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돌연 ‘달러 팔자’에 나선 외국계 투자은행들이 환율 급락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데, 국내적으로는 수출기업 외환담당자들 역시 달러를 대거 팔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수출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가 이미 넘쳐나 원-달러 하락 압력이 작용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수출기업들이 보유 달러화를 팔면서 원-달러 하락이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수출기업들은 달러당 1천원선 붕괴에 대한 불안감으로 투매에 가까운 달러 매도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들이 연초 들어 국내 주식시장에서 순매수로 돌아선 것도 원화가치 상승(원-달러 환율 하락)의 원인으로 꼽힌다. 연초에 국내 증시로 유입된 외국인 순매수 규모는 약 2천억원인데, 원-달러 환율 약세가 점쳐지자 주식 매수자금을 미리 원화로 바꾼 외국계 투자은행도 상당수에 이른다는 분석이다. 외국계 투자은행들이 한국 주식을 사기 위해 원화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역외시장에서 달러를 팔았을 가능성도 높다. 우리나라 주가가 오르면 환율 차익까지 포함해 이중으로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뜻밖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번 환율 하락이 단순한 ‘예외적인 변동’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세 자릿수 환율이 고착화될 것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이다. 6일 외환당국이 적극적인 개입 의지를 표명했음에도 원-달러 환율 하락세가 멈추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당국이 2억달러를 투입했다?

세 자릿수 고착화 전망은 원-달러 환율 하락(원화 평가절상)이 달러 가치의 하락 추세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욱 굳어지고 있다. 일본·중국·대만·한국 등 전세계 달러 표시 외환보유고의 60%를 차지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은 뒤부터 외환보유고가 이미 과도하게 쌓여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달러를 찍어내도 이를 받아줄 동아시아의 여력이 줄어들고 있고, 자연히 달러는 공급이 넘쳐 약세가 불가피하다.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무역 적자)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에서 달러화의 추가 하락을 예상하고 대규모 환차손을 피하기 위해 외환보유 구성을 유로화·엔화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달러가 한순간에 폭락하면 엄청난 손실을 입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환보유고 다변화로 인해 달러화는 더욱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대우증권 고유선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달러 표시 자산을 과도하게 많이 갖고 있는 상태라서 시장개입에 한계가 있다”며 “개입에 나서더라도 속도 조절에 그칠 뿐 원-달러 하락 추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과 중국 경제 쪽을 봐도 원-달러 하락 기조가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경기 회복세가 뚜렷한 일본의 경우 디플레이션 종식을 선언하고 인플레이션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고, 이에 따라 금리 인상을 앞당길 것으로 점쳐진다. 고유선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이 금리를 인상할 것이고 중국 위안화의 추가적인 평가절상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요인으로 원화를 비롯한 아시아 통화는 강세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일본이 금리를 인상하면 미-일 금리차가 축소돼 엔화는 강세를 띠고 달러 약세는 더 심화될 수 있다. 게다가 올해 미국은 금리 인상이 끝나는 반면 한국에서는 콜금리가 추가 인상된다면 원화 강세(원-달러 하락)가 더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

이처럼 달러·엔·위안화 등 ‘외부적인 요인’에 따라 원-달러 환율이 줄곧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지만, 사실 원-달러 환율의 가파른 하락 뒤편에는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이 제한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공감대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최근의 환율 쇼크는 환율방어를 위한 정부의 시장개입이 크게 약화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장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충격에 휩싸인 측면이 강하다. 그렇다면 외환당국은 어느 수준까지 시장에 개입할 수 있을까?

당국의 시장개입은 개입을 시사하는 메시지를 시장에 던지는 ‘구두개입’과 실제로 달러화를 매입하는 ‘물량개입’이 있다. 정부가 6일 “모든 권한과 역량을 최대한 동원하겠다”는 시그널을 보내면서 구두개입에 나섰지만, 시장은 “불안심리를 단기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그칠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 실제로 실탄(달러 매수자금)을 동원해 물량개입에 나서더라도 제한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A은행 외환딜러는 “최근 며칠간 환율 쇼크에도 불구하고 외환당국의 개입이 미세조정에 그쳤거나 거의 관망하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B은행 외환운용팀 관계자도 “원-달러 환율이 980원대까지 떨어지는 과정에서 5일 하루 동안 당국이 약 2억달러를 투입했다는 루머가 돌고 있다”며 “이 정도 규모는 변동폭을 약간 줄이는 정도에 불과할 뿐 환율 하락 추세를 막을 수는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내수가 살아나는 측면은 있어

정부의 시장개입은 왜 약화되고 있는 것일까? 외환당국은 그동안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해 사실상 특정 수준의 원-달러 환율을 타깃으로 정해놓고 이를 방어하는 수준의 ‘깊숙한’ 시장개입을 해왔다. 그런데 2004년 말 이후로는 개입이 눈에 띄게 약화됐다. 재정경제부가 국회로부터 “환율 안정을 위한 달러화 매입자금으로 외국환평형기금채권(약 50조원)과 통화안정채권(약 160조원)을 과도하게 발행해 이자 비용(연간 7조원대)으로 엄청난 돈을 날렸다”는 비판을 받은 뒤부터다. 우리나라 외환보유고는 2005년 말 현재 2103억달러인데, 2002∼2004년까지 증가액이 해마다 185억∼437억달러였으나 지난해에는 대폭 둔화돼 113억달러에 그쳤다. 이는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이 훨씬 줄어들었음을 시사한다.

올해는 내수가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당국의 시장개입이 크게 약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뒷받침한다. 고유선 이코노미스트는 “2004, 2005년에는 성장동력이 수출밖에 없어서 당국이 수출기업을 위해 시장에 개입했지만 지금은 내수가 회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개입하더라도 강도가 예전처럼 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윤덕룡 연구위원도 “내수는 안 살아나는데 수출까지 죽으면 성장 자체에 큰 타격이 발생하기 때문에 당국이 그동안 적극 개입했지만, 이제 내수가 살아나고 있으므로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사실 그동안 수출기업의 수익성 보장을 위한 정부의 시장개입은 원-달러 환율 하락을 막아 내수를 위축시켰다.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면 원화 표시 수입품의 가격이 떨어져 국내 물가 수준이 낮아지고, 물가가 낮아져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확대되면 소비가 증가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시장개입을 줄이면 수출기업이 다소 타격을 입더라도 내수가 살아나는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최근 원-달러 환율 하락이 수출기업에 미치는 충격은 어느 정도일까? 삼성전자는 올해 경영계획을 짤 때 환율을 달러당 950∼1천원대로 잡았고 현대·기아자동차도 기준환율을 지난해 1050원에서 올해 950원으로 크게 낮췄다. 자동차업체는 원화가 5% 절상되면 달러 표시 수출상품 단가를 2∼3% 정도 인상해 세계 시장에서 상품을 팔 여력이 있다고 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윤덕룡 연구위원은 “환율 하락에 대응해 수출 대기업은 마진을 조금 줄이면서 큰 타격 없이 버텨낼 수 있는데, 문제는 원래 마진 폭 자체가 좁고 환율방어력이 취약한 수출 중소기업들”이라고 말했다. 인력감축과 비정규직 고용을 통해 비용 우위를 확보한 대기업들은 원-달러 환율이 급락해도 가격경쟁력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단지 이윤 폭만 조금 줄이면 된다. 수출 대기업은 또 환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미국·유럽·일본 시장이 살아나면 수출 물량을 늘려서 예전의 이윤을 그대로 보전할 수도 있다.

수출 중소기업들 큰 타격

글로벌 달러화 약세 속에서 원-달러 환율 하락은 이미 예상됐던 것이다. 문제는 환율 하락의 속도와 폭이다. 전문가들은 애초 올 하반기부터 원화 강세가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만큼 시장은 원-달러 환율 하락이 예상보다 깊고 빠르게 나타나 크게 당황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환율이 더 떨어지기 전에 손실을 줄이려고 달러를 앞다퉈 팔면서 누적효과가 발생해 패닉 상태로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외환시장 규모가 작은 개방경제에서는 환율 하락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때 환투기 세력이 대규모로 들어올 수 있고, 충분히 환율이 떨어졌을 때 환투기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가면 금융시장이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윤덕룡 연구위원은 “환율 하락 기조에서는 이 틈을 타 돈을 벌려는 세력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라며 “환율을 갖고 투기세력이 장난치지 못하도록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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