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보물선이 떠오르면서 도굴꾼과 단속반의 치열한 숨박꼭질
순찰 강화하고 ‘사적’가지정 검토하지만 머구리들은 목숨 걸고 바다로
▣ 야미도=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바닥에 파편이 지천으로 깔렸네요.”
유병노 서울 남대문경찰서 강력5팀장은 바다 밑 수색을 마치고 올라온 잠수부의 증언에 옅은 탄식을 흘렸다. 전북 군산과 부안을 잇는 새만금 방조제(길이 33km)가 지나는 야미도 앞바다는 말 그대로 고려청자가 널린 ‘보물 어장’이었다.
광고
△ 만경강과 동진강 물은 새만금 방조제 안에서 서해와 몸을 섞었다. 11월8일 찾은 전북 군산시 야미도 앞바다는 물살이 거의 없었다. 국립해양박물관과 경찰은 문화재 도굴범 이아무개(45)씨와 현장 점검에 나섰고, 군산해양경찰서는 추가 도굴을 막기 위해 바다 앞 순찰을 강화했다.
10월8일 오전 10시부터 이어진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현장 조사에서 잠수부 1명이 1시간이 채 못 돼 건져올린 청자는 모양이 제대로 갖춰진 것만 헤아려도 25점이나 됐다. 발굴 유물들은 바닷물에 누렇게 변색되기는 했지만, 고려청자 특유의 맵시 있는 자태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철한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사는 “뻘을 헤치지 않고 바다 밑에 돌아다니는 물건만 해도 이 정도”라며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뤄지면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해경은 서둘러 “도자기 도굴 예방을 위해 경비와 순찰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깊은 어둠 속에서 이뤄지는 ‘머구리’(해남·남자 잠수부)들의 필사적인 자맥질을 막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2002년 ‘그날’ 이후!
광고
2002년 ‘그날’ 이후 서해 머구리들에게 군산 앞바다는 인생 역전이 가능한 기회의 땅이 됐다. 시작은 아주 우연한 사고였다. 지난 2002년 4월6일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해상에서 9t짜리 소형 저인망 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한 어민의 그물에 고려청자 243점이 무더기로 딸려 올라왔다. 질이 좋은 12세기 고려청자였다.
화들짝 놀란 문화재청은 서둘러 발굴조사에 나섰고, 문화재청 소속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비안도 앞바다에서 2년 동안 5차례나 발굴조사를 벌여 2935점의 청자를 건져올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1년 뒤인 2003년 9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비안도로부터 40㎞ 떨어진 옥도면 십이동파도 앞바다에서 11~12세기 것으로 보이는 옛날 배와 보물 8121점을 건져냈다. 뻘 속에서 잠자고 있던 청자는 육지에서 풍상을 겪은 물건들보다 상태가 좋았고 값도 비쌌다. 척박한 바다에 기대 살던 머구리들은 너도나도 군산으로 향했다. 군산에서 만난 한 머구리는 “이번에 잡힌 사람들은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며 “보물을 캐내 짭짤한 재미를 본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군산 러시’나 ‘보물선 로또’ 같은 말들이 머구리들의 입소문을 타고 삽시간에 퍼졌다.
광고
군산 바다는 머구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지난 11월1일 야미도 앞바다에서 고려청자 500점을 건져올린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이아무개(45)씨도 그렇게 흘러든 머구리 가운데 하나였다. 이씨는 20년 경력의 베테랑 머구리로 그동안 대천·서천에서 활동해왔다. 지난해부터 후배 머구리 박아무개(38)씨와 함께 군산 앞바다에 3t짜리 무허가 굴 채취선을 띄워놓고 바다 밑을 뒤지기 시작했다. 1년여의 탐사 끝에 10월9일 드디어 청자 무더기를 발견했다. 경찰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부탁해 이들에게서 압수한 청자 320점(접시 98점, 대접 176점, 주발 46점)을 감정한 결과 “품질과 보존상태가 양호해 점당 약 100만원씩 시가 3억2천만원 상당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이날 진행된 현장 조사에서 고무보트에 올라 “여기서 보물을 건졌다”며 고개를 숙였다. 야미도에서 간척지 쪽으로 겨우 30~50m 떨어진 해상이었다. 이들이 찾아낸 청자는 모두 500점이지만, 경찰은 320점을 압수하는 데 그쳤다. 남은 180점은 어디로 갔을까?
강신태 문화재청 문화재사범 단속반장은 “이들이 청자를 얼마나 건져 얼마나 팔아먹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도굴범들은 캐낸 유물을 일단 비닐 보관 창고로 옮겨둔 뒤, 사진을 찍어 전국의 문화재 매매상이나 소비자들과 접촉을 시작한다. 유물은 단속에 대비해 몇 군데 비밀 창고에 나누어 숨기는 게 철칙이다.
거래는 소비자와 직접 만나거나, 믿을 수 있는 중간상인을 거치는 게 상례다. 유통 단계가 복잡해지면, 마진이 줄고 비밀이 새어나갈 가능성도 커진다. 이씨를 검거한 유 팀장은 “도굴범들은 증거를 남기지 않아, 물건 유통 단계에서 현장을 덮치지 않고는 붙잡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2004년 7월 비안도 앞바다 해저에 있던 청자상감국화문베게와 접시·대접 등 고려청자 128점을 도굴한 머구리 박아무개(47)씨를 붙잡을 때에도 경찰은 문화재 수집가로 위장해 현장을 덮쳤다.
문화재 수집가로 위장해 현장 덮쳐
거래는 철저히 현금을 통해 이뤄진다. 유 팀장은 “미리 준비해간 현금이 없었으면 이들을 붙잡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1월1일 이씨와 접선에 성공한 유 팀장은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사장님’으로, 그와 같은 팀의 김동길(35) 경장은 그를 수행하는 ‘비서’가 됐다. 경찰은 “먼저 돈을 보여달라”는 이씨 등의 요구에 미리 준비해온 현금 1억5천만원을 내밀었다. 돈을 확인한 이씨는 “물건이 집에 있다”며 충남 서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경찰을 안내하다 꼬리를 잡혔다.
수중 발굴은 도굴꾼들과 전쟁을 통해 발전해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 발굴인 신안 해저 발굴이 이뤄질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주먹구구였다. 수중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히 발굴지점을 집어내는 것이다. 지금 같은 인공위성위치추적장치(DGPS)가 없었던 시절에는 일일이 부표를 설치해 위치를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발굴이 끝나면 도굴을 우려해 부표를 제거했고, 다음날 다시 발굴을 시작할 때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수온이 내려가는 겨울이나, 물 흐름이 거칠 때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안 앞바다는 물의 흐름이 거세, 잠수부들의 애를 태웠다. 신안 발굴은 1976년 10월부터 1984년 9월까지 꼬박 8년이 걸렸다.
△ 지난 2002년 5월에는 비안도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청자가 쏟아져 나왔다. 문화재청은 2년동안 5번의 발굴조사를 벌여 문화재 2935점을 건져올렸다(위). (사진/ 연합). 서울 남대문 경찰서 유병노 강력5팀장과 김동길 경장이 문화재 도굴꾼에게서 압수한 청자 주발을 살펴보고 있다. 그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현금 1억5천만원을 미끼로 던졌다(아래). (사진/ 류우종 기자)
강신태 반장은 “발굴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중간에 도굴꾼들이 들어와 유물을 건져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해경은 새까만 밤에 목숨 걸고 바다에 뛰어드는 머구리들을 막을 수 없었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문화재가 돈 된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광주 지역 조폭들이었다. 신안에서 발견된 배는 중국에서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송·원대의 무역선으로, 동북아 3개국의 유물 2만7점이 쏟아져나왔다. “그때만 해도 문화재 경기가 좋았다고. 유물의 다양하고 값나가는 것들이 많았거든. 일본 사람들은 다완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고. 수사를 해서 도굴꾼들을 잡아보면, 조폭이 꼭 몇 명씩 끼어 있더라고. 조폭은 돈이 되면 물불 안 가리니까, 우리가 힘들었지.”
군산 앞바다는 고려시대 유명한 가마터가 있던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출발한 배들이 당시 수도였던 개경으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필수 해로였다. 강경숙 문화재청 동산문화재분과 문화재위원은 “당시 배는 크기가 작아 바다 밖으로 멀리 나갈 수 없었고 작은 물살에도 쉽게 침몰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수중 문화재 발굴의 효시인 1976년 신안 해저 발굴 이후 지금까지 이뤄진 10건의 발굴 가운데 9건이 서해에서 이뤄졌고, 옛날 배 6척은 모두 완도~군산 사이 바닷길에서 발견됐다.
새만금 방조제가 물길을 틔우다
그렇지만 느닷없이 군산 앞바다에서 보물선이 떠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새만금 간척사업 덕분이다. 농업기반공사는 새만금 방조제를 만들면서 동진강·만경강 물이 서해로 흘러들 수 있도록 비안도 앞(가력배수갑문)과 신시도 앞(신시배수갑문)에 각각 하나씩 물길을 틔워놨다. 하루에 두 번씩 밀리고 쓸리는 바닷물은 좁은 물목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켜켜이 쌓여온 뻘층을 파헤쳤고, 뻘 속에서 잠자고 있던 옛날 배들과 청자들이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 나오기 시작했다.
섬 주민들은 처음에는 이따금 그물에 쓸려 올라오는 청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섬에서 횟집 청솔가든을 운영하는 김순자(41)씨는 “처음에는 누가 바다에 쓰레기를 버린 줄 알았다”고 말했다. “잘 아는 동네 사람이 재작년 겨울에 갯 거두러(갯벌에서 조개 따위를 줍는 일) 바다에 나갔거든요. 오는 길에 그릇 여남은 개를 주워왔더라구요. 그릇을 보니까 바닥에 모래 같은 게 붙어 있고 모양도 평범하기에 ‘남이 쓰다 버린 그릇을 뭐하러 가져왔냐’고 핀잔을 했죠.” 김씨는 그릇을 깨뜨려 하수도 구멍에 버렸다. 그는 “그 그릇들이 고려청자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전북 군산해양경찰서는 11월8일부터 도굴을 막기 위해 야미도 앞바다의 순찰을 강화했고, 문화재청은 발굴조사를 위해 이 지역을 사적으로 가지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바다가 사적으로 가지정되면 어민들은 바다로 배를 몰고 가 그물을 내릴 수 없다. 어민들은 70년 전에 쌀을 가득 실은 일제의 수탈선이 오가던 군산 앞바다에서, 700년 전에 가라앉은 조상들의 청자를 건지기 위해 해경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가난한 욕망과 허황된 꿈으로 가득 찬 군산 앞바다의 가을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 | ||||
![]() | 뻘 속의 역사가 열린다 |
백제 부흥군과 일본 구원군의 흔적이 새만금 밑에 있을 수도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해양 고고학의 보고다. 지난 1976년 전남 신안 해저 발굴 이후 모두 9건의 수중 발굴이 서해 바다에서 이뤄졌다. 전남 야미도 발굴현장에서 만난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이철한 학예사는 “서해에서 발견되는 옛 선박들을 통해 화려했던 우리 해상 문화와 동북아의 무역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중 고고학이란.
=바다나 강, 호수 등에 가라앉은 고대 유적이나 유물 등을 발굴해 당시의 문화상을 복원하려는 고고학의 한 분야다. 1976년 신안 발굴과 1983년 완도 발굴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수중 고고학의 역사가 축적됐고, 1994년 12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만들어 발굴 성과를 전시하고 있다.
군산 앞바다에서 고려 청자 등 유물 발굴이 잦은데.
=고려 시대에는 당시 수도 개경으로 올라가는 유물을 대부분 바다를 통해 배로 운반했다. 그 와중에 가라앉은 배들이 뻘 속에 묻혀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발굴돼 나오는 것이다. 백제가 망한 뒤 백제 부흥군이 일본 구원군과 연합해 싸운 백강구 전투의 무대가 이곳 동진강이라는 설이 있다. 그때 일본 구원군이 타고 온 배가 400척이다. 그 흔적이 새만금 방조제 바다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유물이 쏟아진 야미도 앞바다는 어떻게 되나.
=일단 현장 조사를 벌여 추가 발굴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사적으로 가지정된다. 군산 비안도와 십이동파도도 사적으로 가지정돼 유물 발굴이 마무리됐다. 이곳도 사적으로 가지정한 뒤 발굴 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 | ||||
![]() | 보물 발견하면 합법적 대박? |
바다에서 보물을 건져올린 경우 합법적으로 ‘대박’을 터뜨리는 방법도 있을까. “그때그때 다르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올해 7월 문화재보호법이 바뀌면서 억대의 ‘대박’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먼저, 합법적으로 보상을 받으려면 몇 가지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발견자가 보물을 ‘우연히’ 발견해야 하고, 둘째 문화재청에 즉시(7일 이내) 신고해야 하며, 진행하던 모든 작업을 멈춰 발굴 터 훼손을 피해야 한다. 보상금은 감정평가를 거쳐 정해지는데, 최초 발견자에게 평가액의 50%, 땅 주인(바다의 경우 국가)에게 나머지 50%를 준다. 서해안 머구리들은 돈을 벌기 위해 청자를 건져올렸기 때문에 애초부터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다.
때때로 보상금을 놓고 정부와 발견자 사이에 법정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문화재청은 2002년 4월 전북 군산 비안도 앞바다에서 고려청자 243점을 발견해 신고한 조아무개씨 등 3명에게 감정평가액의 50%인 3730만원, 2003년 9월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고려청자 622점을 발견한 윤아무개씨에게는 1274만원을 보상했다. 이후 보물이 계속 쏟아진 게 문제였다. 조씨와 윤씨는 “첫 발굴 이후에 쏟아진 보물에 대해서도 보상금을 줘야 한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조씨는 1억2천만원, 윤씨는 1억4천만원을 추가로 요구했고, 재판은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문화재청은 비슷한 소송을 피하기 위해 올해 7월 법을 바꿔 최초 발견 이후에 쏟아진 문화재는 보상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대신 유물의 가치에 따라 최고 2천만원까지 포상금을 준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더는 못 기다린다 탄핵이 답”…시민들, 헌재 앞 간절한 외침
산 정상에 기름을 통째로…경찰, 화성 태행산 용의자 추적
권성동 “이재명·김어준·민주당 초선 72명 내란 음모죄 고발”
[단독] ‘내란’ 김용현, 군인연금 월 540만원 받고 있다
냉장고-벽 사이에 82세 어르신 주검…“얼마나 뜨거우셨으면”
최상목, 2억 상당 ‘미 국채’ 매수…야당 “환율방어 사령관이 제정신이냐”
한국도 못 만든 첫 조기경보기 공개한 북한…제 구실은 할까
4월 탄핵 선고 3가지 시나리오…윤석열 파면·복귀, 아니면 헌재 불능
프로야구 NC-LG 창원 경기 중 구조물 추락…관중 3명 부상
일요일도 꽃샘추위 기승…경상권 강풍에 대기 건조